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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위 설치[鐵嶺衛 設置]

철령 이북의 땅과 사람을 둘러싼 명과 고려 사이의 갈등

1388년(우왕 14)

1 개요

철령위(鐵嶺衛) 설치 사건은 1387년(우왕 13) 명나라가 철령(鐵嶺) 이북은 옛 원나라의 땅이므로 이곳에 살던 토착 군민을 명나라에 귀속시켜 편제하겠다고 결정한 후 고려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일이다. 이는 최영(崔瑩)의 요동(遼東) 정벌 시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 그리고 조선(朝鮮) 건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철령과 철령위의 위치 비정 및 철령위 설치 사건의 성격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다.

2 철령위 설치 사건의 전말

1387년 12월, 명나라의 황제 홍무제(洪武帝)는 호부(戶部)에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리고 이를 외교문서로 작성해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철령의 북, 동, 서쪽은 옛날 개원(開原)에 속했으므로 그 토착 군민(軍民)인 여진(女眞), 달단(韃靼), 고려인(高麗人) 등을 요동이 통할하도록 하고, 철령의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했으므로 인민(人民)은 모두 그 나라 관할에 속하도록 하라. 경계(境界)와 강역(疆域)을 바로 잡으니 각기 지키도록 하며, 다시는 침범하고 넘어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침 이때 홍무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방문한 고려 사신단 일행이 수도 남경(南京)에 체류하고 있었다. 홍무제는 고려 사신단의 대표였던 설장수(偰長壽)와의 대화 도중 이 명령을 알려주고 국왕에게 전하게끔 하였다. 설장수는 이듬해 2월에 귀국하여 우왕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우왕은 이미 다른 루트를 통해 해당 사실을 접한 후였다.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를 통해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압록강 쪽으로 사람을 보내 “철령의 북쪽, 동쪽, 서쪽은 원래 개원로에 속해 있었으므로 소속된 군인으로 한인, 여진, 달달, 고려는 그대로 요동에 귀속한다.”라는 방문을 붙였다는 사실이 개경에 전해졌던 것이다.

이 보고가 개경에 전해진 직후, 최영은 재상들과 함께 이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요동을 공격할 것인지 혹은 화친을 청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모두 화친을 청하는 것에 동의했다. 평화적인 해결을 바랐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장수가 귀국했고 황제의 명령이 다시 한번 전달되었다. 이에 최영은 백관을 모아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당연하겠지만, 모두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군사 행동에 대한 대비를 하는 동시에 외교적 해결도 모색하였다. 특히 우왕(禑王)과 최영은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우왕은 5도의 성을 수리하고 서북지역에 여러 원수(元帥)를 파견하여 급작스러운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최영과 함께 요동 공격에 대해 은밀하게 의논하는 한편 한양(漢陽)의 중흥성(重興城)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철령 이북의 땅이 예부터 고려의 영토이므로 넘겨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히도록 했다. 그런데 당시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몇년간 사행에 실패했던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고려에서 사신 파견을 통한 외교적 해결 모색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왕은 3월이 되자 사냥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뽑고 세자와 여러 왕비를 한양의 산성으로 피난시키는 등 본격적으로 요동 공격 준비를 시작하였다. 요동 공격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이에 반대하는 재상을 죽일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원지가 요동도사에서 철령위를 세우고자 병사들을 강계(江界)에 보내고 역참을 설치했다고 보고하였다. 우왕은 이를 듣고는 결국 8도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본격적으로 군사적 대응에 나섰다. 그 직후에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이 도착하여 철령위를 세울 것을 통고하였다. 우왕은 그를 접견조차 하지 않은 채 돌려보내고 계속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요동 정벌군은 4월 18일에 출정하였다. 위화도 회군으로 귀결되는 이 출정의 결과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한편,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박의중은 예상외로 무사히 명나라에 입국하였다. 박의중은 4월에 남경에 도착하여 홍무제에게 철령 이북의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표문(表文)을 바쳤다. 홍무제는 이 표문을 받고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원명(李原明)에게 고려에 대한 생각을 길게 토로하며 철령위에 대해서는 고려가 말한 대로라면 이 땅을 모두 고려에 귀속시켜주어야 할 것 같다면서도 이치로 따지자면 이 땅은 원나라에 속했던 곳이니 지금 마땅히 요동에 속해야 할 것이라고 불평하였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으니 자세히 살펴봐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고려의 표문에 대한 홍무제의 답변은 6월에 박의중이 고려로 귀환한 후에 전해졌다.

그러나 철령위 설치 문제는 의외로 허무하게 해결되었다. 박의중이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인 3월에 홍무제가 철령위를 고려 영토 근처가 아닌 요동 내지로 옮겨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려에 전해진 때에 고려는 이미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한 상황이었다. 철령위 설치에 대한 논쟁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유야무야 종결되었다.

한편, 조선은 철령위 설치 사건의 해결에 있어 고려의 외교적 해결 시도의 성과를 강조하였다. 『고려사절요』는 박의중이 전달한 표문에 대한 홍무제의 답변에 이어 ‘마침내 철령위를 세우는 논의를 중단하였다’고 부기하고 있어 마치 홍무제가 고려의 표문을 보고 철령위 설치를 중지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세종은 명나라에 보내는 상주문(上奏文)에 과거를 회상하며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를 통보했을 때 박의중을 보내어 철령 땅은 우리 땅이라고 주청하니, 홍무제가 ‘철령의 일은 왕국에서 해명이 있었다.’라고 답하며 철령위 설치를 중단해주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3 철령위의 위치 비정 문제

철령위 설치 사건에 대한 논의는 주로 고려와 명의 국경을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목적으로 철령위의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철령위 위치 비정은 철령위 설치 사건이 가지는 의미 파악에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련 사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철령위의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먼저 철령과 철령위를 별도의 개념으로 분리해서 살필 필요가 있다. 철령은 원나라와 고려 영토의 경계로 작용하였던 자연 지명이며 철령위는 명나라가 요동에 설치한 군사조직이다. 철령위의 위치라고 함은 철령위라는 군사조직의 치소(治所)가 위치한 곳을 이른다.

철령의 경우에는 철령이 평안도 강계(江界) 또는 요동의 황성(黃城)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나 대다수의 학자가 철령이 함경도 남부의 철령을 가리키는 것임에 동의하고 있다. 한편 철령위의 경우, 이름에 철령이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철령이라는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명사(明史)』 「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철령위는 1388년(홍무 21)에 옛 철령성에 치소를 두었고 1393년(홍무 26)에 옛 은주(嚚州) 땅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 철령성은 봉집(奉集)을 가리킨다. 문제는 1387년 홍무제가 철령위 설치를 처음 지시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위치가 봉집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많은 학자들이 철령위의 최초 위치가 어딘지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철령위의 최초 위치에 대한 학설로는 함경도 철령설, 함경도 강계설, 요동 황성설, 요동 봉집설이 있다.

최근 철령위가 명나라가 설치한 군사조직인 위소(衛所)의 하나라는 관점에서 명나라의 위소제도를 중심으로 철령위의 위치를 비정해보고자 한 시도가 있었다. 위는 5,600명의 군사로 이루어진 조직인데, 명나라가 고려가 지배하고 있는 철령에 50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군량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철령위의 위치를 철령위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설치되었던 삼만위(三萬衛)의 위치와 함께 고려해보았을 때, 철령위는 압록강 유역에, 삼만위는 두만강 유역에 설치될 예정이었나 여의치 않았던 까닭에 3개월 후인 1388년 3월에 요동의 봉집과 개원으로 옮겨 설치된 것으로, 철령위의 최초 위치는 황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4 철령위 설치 사건의 성격

철령위 설치 사건은 종래 영토 문제로 인해 빚어진 고려와 명의 갈등으로 설명되어왔다. 홍무제가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에 철령 이북의 땅이 옛 원나라의 영토라는 근거를 들어 고려를 침략하려 했으며 고려의 외교적, 군사적 대응으로 명나라가 철령위를 요동성 근처의 봉집으로 옮겨 설치함으로써 철령 땅을 점유하려는 원래의 계획을 포기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명나라의 요동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철령위 사건의 성격을 다시 규명해보고자 한 시도가 있었다.

명나라는 1368년에 대도(大都)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축출했지만 요동 등지에는 원나라의 장수들이 적지 않게 남아 명나라를 적대하였다. 홍무제는 오랜 기간 요동 진출을 시도했고 1387년 마침내 가장 큰 적이었던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항복함으로써 요동을 본격적으로 경략하기 시작했다. 홍무제는 요동에 위소를 설치하여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고려의 요동 진출을 경계하고 여진 장악을 시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각각 철령위와 삼만위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요양에서 너무 멀어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랐고 이에 봉집과 개원으로 옮겨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홍무제가 철령위 설치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철령 이북의 영토가 아니라 바로 ‘인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외교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예부(禮部)를 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나, 철령위 설치를 알리는 외교문서는 호부를 통해 보내려고 했던 사실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홍무제는 옛 원나라 개원로 소속이었던 인민을 위소군으로 편제하여 요동도사의 관할 아래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영토 문제로 파악하였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힘들게 탈환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뺏길 수는 없었다. 이에 철령 이북의 땅이 고려의 영토인 이유를 구구절절 서술한 외교문서를 보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철령위 설치 사건은 명나라와 고려 모두 만족하는 형태로 종결되었다. 홍무제는 철령위를 설치했고 고려는 영토를 지켜낸 것이다.

5 철령위 설치 사건이 불러온 나비효과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명나라의 통보는 고려 조정을 뒤흔들었다.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대다수의 재상이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이성계가 4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게 되었다. 조민수와 이성계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다시 한번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이성계는 회군을 단행하였다. 조민수와 이성계는 최영의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개경을 공격하였고 마침내 최영과 우왕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이성계는 조민수를 제거하고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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