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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荒山大捷]

이성계, 폭주하던 왜구의 불길을 진화하다

1380년(우왕 6)

황산대첩 대표 이미지

남원 황산대첩비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황산대첩은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크게 격퇴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오랜 시간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기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고, 이성계는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2 왜구들이 고려의 내륙으로 모여들다

우왕대 고려는 지긋지긋한 왜구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80년(우왕 6) 8월, 대규모의 왜선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이를 거점으로 하여 왜구들이 고려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또 전해졌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심덕부(沈德符),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을 진포로 급파하였고, 이들은 그동안 화통도감에서 최무선을 중심으로 개발해 온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진포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고려 수군의 함포는 왜구의 함선을 거의 다 불태워 버렸다. 바다에서 퇴각로가 막히자, 살아남은 왜구들은 악에 받쳐 포로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몸을 돌려 내륙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옥주(沃州)였는데 이곳에서 이미 내륙에 침투해 있던 왜구 무리와 합세하게 된다. 일본학계에서 왜구의 실체가 일본인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할 정도로 이때 왜구는 고려 내륙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진포의 달콤한 승리도 잠시. 고려 백성들의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상당한 규모로 결집된 왜구들은 충청북도 일대를 거쳐 경상북도 쪽으로 이동하며 마침내 상주(尙州)에 다다랐다. 왜구들이 거쳐 간 고을마다 초토화되었고 길은 피바다를 이루었으니, 당시 무고한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상주에서 이들은 2~3살 정도는 되는 어린 여자아이를 붙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기고는 쌀과 술을 함께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고 여자아이를 불태우자 창자루가 갑자기 부러졌다. 이 기이한 현상을 반드시 패배할 징조라고 생각한 그들은 이곳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왜구는 선주(善州)와 경산부(京山府)를 도륙하고 경상남도의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이곳에서 고려는 또다시 쓴 패배를 맛본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사근내역 전투이다.

왜구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피해가 최악의 사태에 치닫자, 고려 조정에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배극렴(裵克廉), 김용휘(金用輝), 지용기(池湧奇), 오언(吳彦), 정지(鄭地),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도흥(都興), 하을지(河乙沚) 9명의 원수를 출정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이 전투에서 원수인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사졸 500여 명이 사망하는 대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왜구들은 기세를 이어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남원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그들은 운봉현(雲峯縣)을 불태우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였다.

3 황산에서 이성계가 적장의 목을 베다

이때 이성계는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도체찰사(都體察使) 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왜구를 정벌할 군대를 이끌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길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성계가 잠을 설치며 남원(南原)에 도착하자 구원자를 본 듯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장 공격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이성계는 그 길로 적진과 수십 리 떨어진 곳으로 가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그는 지형을 분석하여 작전을 짰는데, 큰 길 오른쪽에 있는 작은 샛길을 보고 “적은 반드시 이리로 나와서 우리의 후방을 칠 것이니, 나는 마땅히 이 길로 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머지 장수들의 군대는 평탄한 길로 진군하게 한 뒤 자신은 적군의 기습이 예상되는 곳으로 갔던 것이다. 과연 그의 예상이 적중하여 이성계는 험지에서 왜구의 기병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험한 곳에서 싸우게 되다 보니 승기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료에 당시의 아슬아슬하고 급박했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적의 장수가 창을 들고 몰래 이성계의 뒤쪽으로 접근하는데 미처 보지 못하는가 하면, 계속해서 이성계가 탄 말이 화살을 맞아 넘어져 다른 말로 바꾸어 타다가 결국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적군이 이성계를 두서너 겹으로 집중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을 기병 두어 명과 뚫고 나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용맹하게 하늘의 해에 맹세하고 주위에 소리쳐 지휘하기를, “겁먹은 자는 물러나라. 나 또한 적에게 죽을 것이다.”라고 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물론 태조 이성계의 구체적 행적과 관련해서는 사료에 다소의 과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당시의 교전이 치열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전투에서 적군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불리는 자였다. 용모가 아름답고 용맹스러움이 발군이었던 아지발도는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를 때마다 모두 쓰러져 고려 병사들이 대적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그를 생포하고자 할 정도로 특출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것일까? 아지발도 또한 이성계가 진을 설치한 것을 보고는 자신의 무리에게 “결코 지난날의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측근 이두란(李豆蘭)의 만류로 생포계획을 포기하고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문제는 아지발도가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어 화살을 쏴서 죽일 만한 틈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두란과 이성계는 영화에서 나올 법한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다. 이성계가 활로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 부분을 맞춰서 투구 끈을 끊어 떨어뜨리자마자 이두란이 활을 쏘아 죽였던 것이다. 이에 전세는 급격히 고려군으로 기울게 된다.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의 정예군을 거의 다 죽이고 크게 승리를 거둔다.

그 많던 왜구 중 70여 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이성계는 이들을 보며 “세상에 적을 섬멸하는 나라는 있지 않다.”라며 웃으며 추격하지 않는 여유를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리품으로 말을 1,600필을 얻고 무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획득하였다. 이때의 전투로 냇물이 온통 붉게 물들어 6~7일이나 색이 변하지 않아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전투가 얼마나 큰 격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 이성계가 국가의 영웅으로 빛나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선하자 영접하러 나온 판삼사(判三司) 최영(崔瑩)은 눈물을 흘리며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의 중흥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었으니, 공이 아니라면 나라에서 장차 누구를 믿겠소?”라고 말하였다. 우왕은 이성계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하사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하여 전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 전 삼사좌사(三司左使) 김구용(金九容), 성균좨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이 연달아 시를 지어 이성계의 공을 칭송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이 승리를 얼마나 반겼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황산대첩은 고려말 고질적인 왜구의 침략을 저지한 결정타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이때 물리친 왜구는 진포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비롯하여 고려 내륙에 침투해 있던 왜구들이 집결된 대규모 세력이었기 때문에 향후 왜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황산대첩을 기점으로 왜구의 침입 지역이 한반도 서부지역에서 동부지역으로 변화하였고, 규모나 빈도가 감소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이후 벌어질 역사적 결과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황산대첩은 이성계에게 전쟁영웅으로서의 확실한 존재감을 새겨주며 나아가 조선 건국에 초석이 되었던 중요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겠다.

5 황산대첩이 남긴 것

황산대첩에서의 업적은 이성계의 대표 군공으로서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도 지속적으로 소환되며 기억된다. 조선 세종 때 지어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후 1577년(선조 10)에는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박계현(朴啓賢)의 건의로, 『고려사(高麗史)』와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고증하여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한 비를 남원에 세웠다. 안타깝게도 본래의 비는 일제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니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비는 해방 이후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남원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는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어느 날 정약용(丁若鏞)이 황산을 지나다가 황산대첩비를 읽고 이성계와 아지발도가 치열하게 싸웠다는 곳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그곳이 골짜기가 크고 깊은 데다 숲이 우거져 험한 지형임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왜인이 보전(步戰)에 유리하고 산골짜기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으니, 그 승리는 신묘한 무용(武勇)에서 나온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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