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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남왜

닫힌 중국과 주변 세력의 도전

미상

북로남왜 대표 이미지

왜구도권(倭寇圖卷) 부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왜구도권 디지털 아카이브(hi.u-tokyo.ac.jp/collection/digitalgallery/wakozukan/)

1 개요

몽골 왕조 원(元)의 멸망 이후 중국에는 한족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명은 농본주의와 유교 이념에 기반한 사회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명은 육지와 해상으로 몰려오는 외국 세력들을 배척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 세력의 침공을 막았고, 해금(海禁)은 남쪽 바다에서 나타나는 이방인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인구 증가, 교통 발달, 항해 및 지리 지식의 확장으로 전지구적 범위의 물자와 정보 이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16세기의 상황은 닫혀있던 명의 남북 두 변방을 끊임없이 요동치게 하였다. 북방의 몽골인들은 만리장성을 침공하여 교역의 확대를 요구하였고, 왜구(倭寇)라 불렸던 해상/해적 세력은 해금령을 뚫고 막대한 물자를 유입시켰다. 명은 몽골 수장과의 화의와 교역 확대를 통하여 북변을 안정시켰지만, 남쪽 연안으로 진입하려는 왜구 혹은 일본에게는 완고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2 명초 해금과 정화 원정

1368년 원(元) 순제(順帝, 1320~1370)는 홍건적의 난(紅巾賊)의 공격을 피하여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서 만리장성 이북의 상도(上都)로 도피하였다. 중국에서 도피해 온 몽골인들은 응창(應昌)과 카라코룸 등을 수도로 하는 북원(北元, 1368~1388)을 건국하였다. 한편 홍건적의 난 수장 중 한 명인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중국 전토를 통일하고 난징을 수도로 삼아 명(明, 1368~1644)을 건국하였다. 주원장은 한족 출신으로서 몽골인들의 정책을 폐지하고, 유교 이념에 근거한 농본주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주원장은 ‘한 조각 판자도 바다로 나갈 수 없다(片板不許下海)’고 천명하여 민간의 해양 진출에 대하여 금령을 내렸다. 주원장의 정치 이념은 ‘조훈(祖訓)’이라는 이름으로 명말까지 이어졌는데, 1371년 선포된 해양 진출 금령인 해금령(海禁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대와 원대에는 민간 상인들의 해외 교역이 활발하였다. 명이 건국되고 곧바로 해금(海禁)이 실시되면서 민간의 해외 교역은 전면 금지되었다. 예외적으로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재위 1402~1424)는 환관 정화(鄭和, 1371~1433)가 지휘하는 대규모 함대를 동남아시아, 인도, 서남아시아로 파견하였다. 정화는 대형 선단을 이끌고 7차례에 걸쳐 대원정을 떠났다. 정화는 기항한 곳마다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였고, 말라카 등의 조공국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화가 사망한 이후, 명 조정은 바다로 진출하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3 몽골과의 대치와 토목보의 변

명에게는 북방의 몽골을 상대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명은 멸망에 이를 때까지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 세력을 압도하지 못하였다. 명은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위하여 여러 조처를 취하였다. 영락제는 몽골 부락에 마시(馬市) 형태의 조공무역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북변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이를 통해 몽골인들은 명에 말과 같은 가축을 주로 팔았고, 명은 의복과 식량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명이 규정한 마시 무역은 점차 그 원형을 잃고 변형되어 갔다. 명은 몽골인들의 사신 수를 수십 명으로 제한하였으나, 실제로는 수 천 명대로 늘어났고 이에 따라 무역량도 증가하였다. 게다가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몽골과의 무역은 명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은 무역을 제한하여 교역 질서를 되찾고자 하였다.

교역의 제한으로 경제적 손실을 입은 몽골인들은 명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되었다. 1449년 오이라트(Oirat, 瓦剌)의 지도자이자 북원의 대칸 에센(Esen, 也先, 1407~1454)이 명의 대동(大同)을 침공하였다. 당시 정통제(正統帝, 1435~1449) 주기진(朱祁鎭)은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지만, 토목보(土木堡)에서 에센에게 생포되었다. 에센은 베이징에 사신을 보내어 교섭하려 하였지만 베이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에센의 당초 목적은 교역 활성화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죽이지 않았고 계속 협상을 벌였으나, 황제를 인질로 붙잡아 둔 것이 교섭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에센은 끝내 불리한 조건으로 무역 재개를 약속받고, 1450년 정통제를 돌려보내었다.

정통제의 생포 이후, 명에서는 황제의 동생 주기옥(朱祁鈺, 재위 1449~1457)을 새로운 황제로 옹위하고 연호를 경태(景泰)로 바꾸었다. 귀국한 이전 황제는 상황(上皇)으로 추대되어 남궁(南宮)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정통제와 경태제의 파벌로 나뉘었고, 후계자를 정통제의 아들로 할 것인가, 아니면 경태제의 아들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발생하였다. 경태제는 원래 황태자이자 형의 아들 주견심(朱見深)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朱見濟)를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지만, 주견제는 도중에 병사하였다. 1457년 정통제 일파는 정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정통제를 복위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탈문지변(奪門之變)’ 혹은 ‘탈문의 변’이라 한다. 탈문의 변으로 경태제는 폐위 후 한 달 만에 병사하였다. 복위한 정통제는 연호를 천순(天順, 1457~1464)으로 고쳤다. 이에 따라 정통제는 천순제(天順帝)로도 지칭된다. 이후로도 천순제는 타타르(Tatar, 韃靼)의 침략에 계속 시달렸다.

4 알탄 칸의 침입과 융경화의

이후 몽골 초원 일대에 선(腺)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몽골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 몽골의 수장인 다얀 칸(Dayan Qa’an, 達延汗, 1464~1517)이 몽골을 통합하여 재차 명의 북변을 침공하였다. ‘다얀’은 ‘대원(大元)’을 음차한 것으로, 원(元)의 영화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다얀 칸은 명과의 관계를 호의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명은 몽골 사신을 살해하는 등 협상을 거절하였다. 다얀 칸은 명의 북변을 침공하여 약탈을 감행하였다.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Altan Qa’an, 俺答汗, 阿勒坦汗, 1507~1582)은 명의 북방을 자주 침략하여 가축과 식량 등을 약탈해 갔다. 1541년 알탄 칸은 몽골 일대에서 통사로 활약한 한인 석천작(石天爵)을 베이징으로 보내어 무역을 요청하였으나, 명에서는 이를 거절하였고 오히려 알탄 칸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알탄 칸은 타이위안(太原) 일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듬해인 1542년 석천작을 다시 보내어 조공을 조건으로 무역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명은 석천작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그러자 알탄 칸은 다시 산시(陝西)와 산시(山西) 등지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명군을 몰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했지만 명은 거절하였다. 그러자 알탄 칸은 오늘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몽골어 후흐호트Hohhot) 일대에 예케 바이싱(大板升)이라는 성을 세웠다. 알탄 칸은 이곳을 몽골인과 한인들이 함께 거주하며 목축·농업·상업이 이뤄지는 대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후로도 알탄 칸은 명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융경(隆慶) 연간(1567~1572)에 이르자, 알탄 칸 세력에 균열이 발생하였다. 1570년 알탄 칸의 손자 바한나기(把漢納吉)가 명에 투항하면서 몽골 내부에 위기감이 돌았다. 알탄 칸은 명과 협상을 벌여 순의왕(順義王)에 책봉되었고, 예케 바이싱을 귀화성(歸化城)으로 개명하고 명과의 교역 거점으로 삼았다. 이를 중국사에서는 ‘엄답봉공(俺答封貢)’ 혹은 ‘융경화의(隆慶和議)’라 한다. 한편, 이에 앞서 1567년 푸젠성(福建省) 장저우부(漳州府) 하이청현(海澄縣) 월항(月港)에서 상선들이 외국으로 출항하여 교역하는 것을 허용하는 ‘융경개양(隆慶開洋)’이 이뤄졌다. 실시된 시기나 호시(互市)를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취지로 볼 때, ‘융경화의’와 ‘융경개양’은 변경의 분란을 유사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명의 의도를 보여준다.

이후 알탄 칸은 1573년 청해(靑海) 일대를 공격하였고 티베트 일부까지 점거하였다. 알탄 칸은 앙화사(仰華寺)라는 절을 세우고 티베트의 쇠남갸초(bsod nams rgya mtsho, 索南嘉措)를 초빙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 알탄 칸은 쇠남갸초에게 최초로 ‘달라이 라마(Dalai Lama)’라는 존호를 주었고, 이후 쇠남갸초는 자신의 선임 두 사람을 달라이 라마로 추존하면서 자신은 제3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였다. 이후 몽골에는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었다.

5 일본 감합무역 단절과 왜구의 출현

비슷한 시기, 바다에는 왜구의 활동이 번성하였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 말기에 해당하였다. 특히 영주 간의 전투가 치열하던 막부 말기를 센고쿠시대(戰國時代, 1493~1573)라고 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중앙의 무로마치 막부, 혹은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의 통제가 약화되었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영주마다 독자적인 대중 외교를 전개하였는데 이는 명의 대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명초 좌승상(左丞相)을 지낸 호유용(胡惟庸, ?~1380)이 일본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일본에 대한 명의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가정(嘉靖) 연간(1522~1566) 이전까지 명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1358~1408, 재임 1368~1394)의 요청에 따라 명은 요시미츠를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책봉하고 1404년 감합무역을 허가하였다. 감합(勘合)이란 조공 사절단에게 발급해 준 증명서였다. 조공 사절단은 감합을 가지고 닝보를 경유하여 명에 입국하였으며, 하카타(博多)와 사카이(堺) 상인들이 동반하여 사무역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때 파견한 선박을 ‘견명선(遣明船)’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막부가 감합무역 선단 파견을 주관하였으나,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 이후 막부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호소카와씨(細川氏)와 오우치씨(大內氏)가 감합무역 선단 파견 임무를 담당하였다.

1523년 닝보에 도착한 두 가문의 사절단 간에 다툼이 발생하였다. 이해 일본에서는 오우치씨가 겐도 소세쓰(謙道宗設)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 그리고 호소카와씨가 란코 즈이사(鸞岡端佐)를 정사, 중국인 송소경(宋素卿)을 부사로 하는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싸움의 발단은 입항 절차 순서를 놓고 발생하였다. 먼저 도착한 것은 겐도 소세츠가 이끄는 오우치 사절단이었으나, 나중에 도착한 송소경이 뇌물을 사용하여 호소카와 사절단이 먼저 입항 절차를 받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오우치측은 호소카와측 선박을 불태워 버렸다. 또한 겐도 소세츠는 란코 즈이사를 살해하고 달아난 송소경을 추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명의 관료들을 살해하고 민가를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이때의 소란을 ‘영파(寧波)의 난’ 혹은 ‘영파쟁공’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명은 1529년 닝보의 시박사(市舶司)를 폐지하였고 감합무역은 중단되었다. 1540년에 오우치씨가 감합무역을 재개시켰지만 1549년을 마지막으로 일본의 조공 사절단은 더 이상 베이징에 파견되지 않았다.

감합무역은 중단되었지만 연해 지방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의 무역은 지속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왜구라고 칭하였지만 왜구는 반드시 일본인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 일본인인 왜구는 진왜(眞倭), 왜구의 모습을 가장한 중국인 등은 가왜(假倭)라고 하였다. 왜구는 주로 가정 연간에 산둥(山東), 저장(浙江), 푸젠, 광둥(廣東) 등 중국 동남 연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중국인과 결탁하여 필요한 인원이나 물자를 보급받기도 하였다. 연안의 유력자들은 왜구 세력과 결탁하거나 해상 세력을 직접 조직하여 밀무역을 수행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든 해적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밀무역에 종사하는 다국적 교역상이었다. 가정 연간 왜구가 중국 동남 연안에서 크게 활동한 것에 대하여 역사에서는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고 한다. 또한 14세기에 발생한 전기왜구(前期倭寇)와 대비시켜 ‘후기왜구(後期倭寇)’라고도 한다.

6 왕직의 죽음과 왜구의 활동

1520년대부터 저장성 저우산군도에 위치한 쌍서(雙嶼, 지금의 루헝다오六橫島)라는 섬은 왜구들의 밀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은 동아시아에도 교역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540년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 서해(徐海), 왕직(王直) 등 당시 이름난 해적 혹은 상인들은 쌍서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쌍서로 데려와 함께 거래를 수행하였다. 쌍서는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명은 쌍서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1547년 대학사 하언(夏言, 1482~1548)은 주환(朱紈, 1494~1549)을 저장과 푸젠의 군사지휘관으로 파견하여 왜구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시하였다. 1548년 주환은 선단을 쌍서에 파견하여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수장 이광두와 왕직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왕직(王直, 혹은 汪直, ?~1559)은 후기왜구를 대표하는 해적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왕직은 상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남직례성(南直隸省) 후이저우부(徽州府) 시현(歙縣) 출신으로, 처음에는 소금 유통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해상 밀무역에 뛰어든 왕직은 동아시아 해상은 물론 동남아시아 해상까지 진출하는 등 광범위한 활동을 보였다. 1540년 왕직은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에 위치한 고토열도(五島列島)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스스로를 정해왕(淨海王)이라고 칭하였다가 나중에는 휘왕(徽王)이라고도 칭하였다. 이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왕직은 명과 일본 간의 밀무역을 장악해 나갔다. 한편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와서 ‘철포’ 즉 조총을 일본측에 건네어 주었을 때 포르투갈인들이 타고 온 배는 왕직의 배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직의 해상 네트워크가 유럽인들에게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왕직 집단이 연안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자 명 조정은 왕직 세력을 처분할 대책을 논의하였다. 주환은 왕직을 잡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왕직은 근거지를 옮겨 다니면서 명군의 공격을 피하였다. 왕직과 동향 출신으로 후이저우부 지시현(績溪縣) 출신의 신임 총독 호종헌(胡宗憲)은 왕직을 설득하여 조정에 귀순시켰다. 그러나 조정에서 왕직이 왜구와 결탁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궁지에 몰린 호종헌은 돌연 왕직을 체포하였다. 그리고는 왕직을 귀순시킨 것은 왕직을 체포하기 위한 속임수였다고 둘러대었다. 그 길로 왕직은 처형되었으며 그의 세력 역시 급격히 와해되었다. 한편 호종헌은 장주(蔣洲)와 진가원(陳可願)을 일본에 보내어 다이묘들에게 왜구를 보내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왕직과 같이 일반 서민 출신 이외에도, 지역 사회 유력자들 역시 왜구와 결탁하였다. 임희원(林希元, 1481~1567)은 푸젠성 취안저우부 통안현(同安縣) 출신의 전직 관료이자 명망 높은 학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밀무역 선단을 운영하여 막대한 부를 쌓음으로써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임희원은 자신의 집 대문에 ‘임부(林府)’라는 현판을 걸고 소송을 접수하여 재판하기까지 하였다.

지방 사회에서는 임희원과 같이 왜구와의 접촉을 통한 해상 교역이 갖는 위법성에 대해 개의치 않은 분위기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지방 사회 경제력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 관료 눈에는 이러한 행위는 엄연한 위법행위였다. 주환은 임희원과 같은 지방 유력자들이 왜구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인식하였고, 임희원이 외국 선박과 내통한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지방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주환을 비난하였다. 지방 사회의 불만은 조정 여론에도 영향을 주었고, 주환은 왜구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체포되었다. 사태를 감지한 주환은 투옥 중에 자결하였다.

척계광(戚繼光, 1528~1588)과 유대유(俞大猷, 1504~1580)는 이 시기 왜구 토벌에 큰 활약을 보인 대표적인 무장이었다. 척계광은 산둥성 덩저우위(登州衛) 출신으로 유대유와 함께 저장, 푸젠, 광둥 일대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척계광의 주력 부대는 저장성 이우현(義烏縣) 출신 농민 등으로 구성된 척가군(戚家軍)이었다. 척계광이 왜구 토벌을 통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기효신서(紀效新書)』 등의 병서(兵書)는 이후 중국은 물론 조선과 일본의 군사 훈련술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유대유는 푸젠성 취안저우부 진장현(晉江縣) 출신으로 척계광과 함께 왜구 토벌에 크게 활약하였다.

쌍서 이외에도 푸젠성 월항 역시 대표적인 밀무역 항구였다. 월항은 외진 곳에 위치하여 지방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한 곳에 있었기에, 이전부터 지방 해상들의 출입 항구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지방 유력 상인들의 영향력이 컸던 곳이었다. 월항 인근 상인 24명이 소란을 일으킨 ‘월항이십사장(月港二十四將)의 반란’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명은 이 일대에 새롭게 하이청현을 설치하고, 월항을 푸젠 당국의 관리에 두었다.

7 북로남왜의 전개와 은 문제

이 시기 북변에서 몽골이 빈번하게 장성 남쪽으로 침입하고 남방 해안에서 왜구가 대규모로 활동한 현상을 역사에서는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부른다. 이 시기 명은 남북 양쪽에서 쇄도하는 외적을 방어해야 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군사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군비 마련에 필요한 은은 조선과 동남 연안을 통하여 명으로 유입되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은을 운반했던 이들은 왜구라고 불린 밀무역상이었다. 동남쪽에서 유입된 은은 서북쪽의 북로 방어 비용에 투입되었다. 북로와 남왜 문제는 은을 매개로 연동하고 있었다.

1557년부터 마카오에 거주하게 된 포르투갈인들은 1570년경 마카오와 일본 나가사키(長崎) 항구를 왕래하는 무역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산 생사(生絲)를 일본에 팔고 그 대가로 일본은을 구입하여 중국으로 들여왔다. 일본은에 대한 높아진 수요, 그리고 일본과의 거래 금지라는 역설적 상황은 포르투갈인들로 인하여 해소될 수 있었다.

명의 왜구 진압이 거세지고 일본은의 생산량이 저하되면서, 왜구와 포르투갈인의 해상 활동도 조금씩 위축되었다. 또한 ‘융경개양’ 조처로 인하여 완강했던 해금령이 일부 완화되면서, 민간인이 허가 하에 월항을 출항하여 해외 무역으로 나갈 수 있었다. 월항을 출항한 중국 상선들은 주로 필리핀 마닐라에 가서 은을 구입해 왔다. 이렇게 신대륙은은 점차 중국의 은 수요를 충당하였다.

융경 연간 왜구 활동은 비록 잦아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광둥과 푸젠의 경계에 위치한 차오저우 지역은 왜구의 소굴로 지목되었다. 차오저우는 문화나 언어 면에서는 푸젠 남부 문화에 가깝지만, 행정상 광둥성에 속하였다. 광둥성 최동단에 위치하였기에 광둥 당국의 공권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가정대왜구가 잦아들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왜구들은 주로 차오저우 일대에서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차오저우 해적인 임도건(林道乾, ?~?)은 푸젠과 광둥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관군에 쫓겨 태국 파타니(Patani)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고위 관직에까지 올랐다. 당시 광둥인과 푸젠인은 동남아 일대까지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임도건 역시 이러한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파타니로 도주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 다른 차오저우 해적 임봉(林鳳, ?~?)은 1570년대 초 관군에게 쫓겨 루손섬 북단에 거점지를 마련하고 스페인인들의 거주지를 공격하였다. 루손섬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스페인인들에게 중국 해적의 등장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때마침 푸젠 당국에서는 임봉을 추적하기 위하여 군관 왕망고(王望高)를 루손섬에 파견하였고, 왕망고는 스페인 당국과 함께 임봉을 쫓아내는데 성공하였다.

8 임진왜란 전야로서의 남왜 사태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적잖은 왜구의 피해를 입었다. 삼포왜란(1510), 사량진왜변(1544), 을묘왜변(1555) 등의 크고 작은 왜란이 모두 이 시기에 집중되었다. 해안에는 ‘황당선(荒唐船)’의 출몰도 잦았다. 황당선은 주로 마카오에서 출항하여 나가사키로 가다가 조선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박들이었다. 정탁(鄭琢, 1526~1605)의 사행을 따라 베이징으로 송환된 막생가(莫生哥)와 마리이(馬利伊)라는 표류인 역시 포르투갈계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남 연안 출신 지식인들에게 남왜의 경험은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과 대처 방안에도 영향을 주었다. 왜구 피해가 극심한 상하이 출신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영파쟁공 이후로 교역로가 막힌 ‘왜구/일본인’이 가정 연간 해상에 출몰한 것이며, ‘왜/일본’의 조선 침공 역시 막혀버린 대(對) 중국 교역로를 돌파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보았다. 따라서 서광계는 이들에게 중국과의 교역로를 열어주는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방안이라고 주장하였다.

북로남왜는 현실적인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명 조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명과 몽골, 명과 일본 사이에는 교역량이 점차 늘었지만, 명 조정은 조공 무역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이에 남쪽 바다와 북쪽 초원에서는 교역을 확대해 줄 것을 주장하는 이방인들이 밀무역과 무력시위를 통해 명의 폐쇄적인 태도에 맞섰다. 그 결과 순의왕 책봉을 통해 몽골과의 교역은 한층 유연해지고 폭넓어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남 연안에도 융경개양이 이뤄져 출항 무역이 일부 허가되었지만, 일본과의 교역 금지령만큼은 끝내 해제되지 않았다. 명의 강경한 태도와 일본의 대중국 교역 재개에 대한 의지는 임진왜란 강화 협상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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