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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세기 동아시아의 크리스트교 선교

미상

16~18세기 동아시아의 크리스트교 선교 대표 이미지

리치의 초상

위키피디아

1 개요

16~18세기 동아시아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대항해시대와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위 ‘지리상의 발견’으로 대항해시대를 주도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무역이익과 해외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해외 선교’였는데, 교황은 둘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일련의 협상 과정을 거쳐 양국은 대서양에 위치한 카보베르데(Cabo Verde) 섬 서쪽의 서경 46도 37분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관할하도록 나누는 토르데시야스조약(1494)에 합의하였다. 이로써 두 나라는 해당 지역의 ‘선교관할권’ 혹은 ‘선교보호권’을 누리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선교에 대한 독점 권한이 포르투갈에게 부여되었다.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를 잇는 연안의 항구들을 식민지로 확보했던 포르투갈은 16세기 초 마침내 중국 광둥성(廣東省)의 마카오(Macao, 澳門)에 조차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동아시아의 선교거점으로 삼게 된다.

한편, 1517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신학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교회의 부패함을 비판하며 내걸었던 95개조 반박문은 이 무렵 유럽 전역에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후 유럽의 크리스트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지게 된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 가톨릭교회의 쇄신과 회복을 주도한 것은 1534년 이냐시오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등이 설립한 신생 수도회인 예수회였다. 바로 이 예수회가 16~18세기 동아시아 크리스트교 선교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요컨대,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이 열어놓은 유럽-동아시아 항로와 마카오를 통해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의 왕래가 본격화하였다.

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선교

예수회의 창설회원이기도 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직접 아시아로 건너가서 해외 선교를 하였고 인도와 일본 선교의 선구자로 불린다.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 지역의 영주 집안에서 태어난 하비에르는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 유학길에 올랐는데, 여기에서 이냐시오 로욜라를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면서 해외 선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비에르가 일본 선교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말라카에서 당시 도망자 신분이었던 안지로(安次郞)라는 일본인을 만난 것이었다. 하비에르를 만나 개종한 안지로는 그를 일본으로 안내하여 크리스트교를 전하는 일을 자청하였다. 항해 끝에 하비에르 일행은 안지로의 고향인 가고시마에 도착하였고 이것이 일본 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처음 경험한 동아시아 사회는 이전까지의 선교지에서의 경험, 즉 소위 ‘이교도’들의 전형적인 모습과 사뭇 달랐다. 하비에르는 일본 사회가 이미 매우 고등한 문명과 종교 사상을 뿌리 깊게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기존까지 전형적인 선교방식이었던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거리 선교의 형식에서 탈피하는 몇 가지 방법론상의 전환을 채택하였다. 첫째, 일본에서 하비에르는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논리적 설득의 방식으로 크리스트교를 전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이때부터 이미 동아시아의 현지의 언어를 잘 구사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다. 둘째,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세속 권위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하비에르는 위계를 중시하는 일본사회의 특징을 간파하였고, 이에 맞추어 엘리트와 권력자들을 만날 때에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예물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였다. 일본의 하비에르는 당시 수도회의 상징과도 같았던 가난한 수도자의 행색을 버리고 화려하고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이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엘리트 지배층을 선교의 첫 대상으로 삼으며 선교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언어에 적응하여 크리스트교를 전하고자 했던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방식을 규정하는 표현인 ‘적응주의’ 노선의 시작점이 되었다.

하비에르로 시작된 16세기 일본에서의 선교는 이후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봉건영주 다이묘(大名)를 비롯해 30여 만 명의 개종자를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군웅이 할거하였던 전국시대의 일본 사회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선교사들을 수용하는 일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여기에는 유럽 세력을 통해 무기와 무역이익의 획득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작용했다. 전국통일 이후 대대적인 일련의 박해가 이어지기까지 대략 100년간 지속된 소위 ‘크리스트교의 세기’가 열렸던 것이다.

3 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의 문을 열다

말년의 하비에르는 일본에 이어 중국 선교를 계획하고 항해에 나섰다. 그러나 중국 본토로 들어가기 위해 광둥 상촨도(上川島)에 머무르던 중 사망하였다. 하비에르가 못 다한 예수회의 중국 선교를 이어간 인물이 바로 그가 사망한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Macerata)에서 태어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였다.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리치는 83년 광둥성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여러 중국의 문인 및 관료들과 교유(交遊)하며 선교사들의 중국 내지 거류의 여지를 넓혔으며, 1601년에는 마침내 북경에 입성하여 천주당의 건립을 허가받기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1610년 사망하기까지 중국 선교의 책임자로서 수많은 업적과 성과를 남겼으며, 사후에는 황제로부터 베이징 근처 등공책란(滕公柵欄)이라는 곳에 장지를 하사받을 정도로 중국 지배층에게 폭넓은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리치가 중국인 엘리트 사대부들과 성공적인 교유를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짚을 것이 있지만 가장 큰 지점은 그의 뛰어난 언어 능력과 학식에 있었다. 수학, 천문학 등 당시 유럽의 최신 지적 성과를 습득하고 있었던 리치가 빼어난 중국어 실력을 장착하게 되자 중국의 문인 사대부들은 앞다투어 리치와 교유하기를 원했으며 새로운 지적 자극을 구했다. 중국의 지리정보와 유럽의 지도기술이 접목돼 완성된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 소개한 『기하원본(幾何原本)』, 유럽의 수리법을 소개한 『태서수법(泰西水法)』, 서양식 기억술을 소개한 『서국기법(西國記法)』 등은 리치의 지식과 언어능력의 조합으로 탄생하여 중국인들의 큰 반향을 이끌어낸 성과였다.

처음에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감탄했던 일부 문인들은 이제 사교와 지식교류의 차원을 넘어 선교사들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크리스트교의 종교사상에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가장 대표적인 한문서학서로 회자되는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리치는 크리스트교의 절대자인 ‘데우스(Deus)’에 대응하여 ‘천주(天主)’라는 번역어를 제시하였고, 더 나아가 이 ‘천주’가 다름 아니라 고대 중국 유가경전 속에 기록된 ‘상제(上帝)’와 동일한 존재라는 주장을 폈다. 이를 받아들인 중국의 문인사대부들은 크리스트교가 동아시아의 유가전통과 상통하며 더 나아가 유가를 보완하는 가르침이라 여기게 되었다. 『천주실의』를 비롯한 리치의 한문서학서들은 일본과 조선에도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되며 커다란 파급력을 미쳤다. 명청시기 중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 회자되는 리치의 이러한 성과는 동아시아 선교 역사를 넘어 동서교류사상에 일대 획을 그은 업적으로 평가된다.

탁월한 언어능력과 지식을 통해 중국 사상계와 고도의 지적 교류를 실현한 리치는 하비에르의 성과를 넘어 예수회 동아시아 선교방침의 핵심인 ‘적응주의’의 전범(典範)을 제시한 인물이었다. 먼저 언급할 것은 예수회 중국 선교의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승복에서 유복(儒服)으로의 전격적인 전환이었다. 그전까지 수도자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불교 승려의 복장을 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치 이후 승복을 벗고 중국 엘리트 사대부의 복장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외양의 변화를 넘어 선교의 방법론 자체를 바꾼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유복의 채택을 통해 예수회는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크리스트교와 유가사상과의 친연성(親緣性)을 강조하는 입장을 명확히 하였으며, 동시에 불교와의 확실한 선긋기를 하는 노선을 공식화하였다.

명청시기 크리스트교 전래의 역사에서 선교사들이 대대로 북경 궁정에서 천문역법을 담당하는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 또한 리치가 남긴 또 하나의 결정적인 유산이었다. 중국의 지배층이 일식과 월식의 정확한 예측과 계산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깨달은 리치는 천문과 역산에 식견을 갖춘 선교사들이 중국에 파견되어야 함을 강조하였고, 이는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 등 천문역법에 뛰어난 식견을 갖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활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베이징 황실의 천문기구였던 흠천감(欽天監)에서 사실상 관리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일부 중국인 관리들과 갈등을 빚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17세기 중반 명-청 왕조교체라는 엄청난 격변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아 선교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핵심 배경이 되었던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리치가 남긴 이 두 가지 유산은 중국에서 선교사들의 활동에 가장 커다란 토대를 제공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평가할 수 있다.

4 ‘중국의례논쟁’의 촉발

한편, 예수회의 적응주의가 갖는 선교방법론상의 혁신성은 적지 않은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중국에서 예수회 이외의 선교수도회의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중국의례논쟁(Chinese Rites Controversy)’이 촉발되었다. 예수회에 비해 동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후발주자’였던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문제 삼았다. 1633년에서 1639년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추방된 도미니코회 선교사 모랄레스(Juan Batista de Morales, c.1597-1664)는 1643년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비판하는 17개 조의 항의성 질의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예수회가 중국의 의례와 문화를 지나치게 포용함으로써 크리스트교를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교황청은 모랄레스의 문제제기와 예수회에 대한 비판에 손을 들어주었고, 조상에 대한 제사나 공자에 대한 제사 의례 참석 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예수회는 1651년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라는 예수회 선교사를 로마에 보내어 이 사안에 대한 예수회의 입장, 즉 조상 의례나 공자 의례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의례에 불과하기 때문에 엄격하게 금지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는 입장을 전하여 교황청의 결정을 되돌리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해 교황청은 1656년 3월 훈령을 통해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재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Domingo Fernandez de Navarrete, 1610~1689)가 1674년 로마로 돌아가 정식으로 예수회의 중국 선교 노선에 대해 교황청에서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다시금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1676년 예수회의 노선을 비판하는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예수회에 불만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바레테의 이 저서는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고 논쟁의 무대를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5 프랑스 출신 예수회 ‘궁정 수학자’들

중국 의례 문제가 유럽에서 크게 논쟁거리로 격화되기는 했지만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명청교체 시기를 현명하게 넘기고 청나라 황제들에게 큰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하면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황청에서 예수회의 입장은 재승인되었고 중국에서 예수회의 입지는 왕조 교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대략 17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중국에서 예수회의 활동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명-청 왕조교체기가 끝나고 새롭게 중국을 차지한 청이 안정기에 들어서자 선교사들의 활동에도 중대한 국면 전환이 일어났다. 이전까지 주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의 남유럽 출신 선교사들이 활약했던 데에서 새롭게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서 핵심자원으로 떠오른 것이다.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들이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제국으로서의 힘을 급격히 상실해 간 포르투갈 그리고 그러한 포르투갈이 보장받았던 선교관할권에 도전해 새롭게 중국과 직접 관계를 맺고 동아시아 선교를 주도하고자 한 프랑스 왕정의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은 교황으로부터 선교관할권을 인정받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루이 14세가 1685년 파견한 장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1643~1710), 죠아생 부베(Joachim Bouvet), 장-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1654~1707) 등 5명의 프랑스 국적 예수회 선교사는 중국에서 ‘궁정 수학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청의 전성기를 열었던 강희제(康熙帝)의 신임 속에 중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693년 학질에 걸린 강희제가 프랑스 선교사 측이 제공한 약재로 완쾌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궁정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질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독립적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프랑스 국적 선교사들은 의례논쟁이 심화해 가면서 적응주의 선교방침이 유럽에서 큰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점에 오히려 중국 문헌 번역 등 한학(漢學) 연구에 박차를 가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유가 사상과 크리스트교 사이의 접점을 강조하는 노선을 주도하였다. ‘색은주의(Figurism)’로 명명된 프랑스 예수회 주도의 선교 노선은 리치가 세운 중국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한 단계 심화하였다.

6 의례논쟁의 2차 국면과 금교령

그러나 프랑스 국적의 사제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신진 선교 수도회인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중국의례논쟁’은 두 번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제 의례논쟁의 여파는 유럽의 논쟁 차원을 넘어 중국 내부의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1652~1730) 주교는 1693년 푸젠지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선교사들간에 용어 사용과 의례 문제에서 나타난 이견을 종식시키는 의미의 포고령을 내렸다. 이 포고령에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표현하는 용어인 ‘데우스’를 지칭하는 용어로 ‘천’이나 ‘상제’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또한 조상 제사나 공자 제사에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예수회도 다시금 변론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 사안에 대해 중국 황제의 확인을 받아 로마에 전달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베이징에 있던 선교사들은 1700년 11월 30일 당시 청의 황제였던 강희제에게 이 사안에 대한 중국 측의 답변을 요청했는데, 교황청은 예수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한 데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1704년 11월, 교황은 의례논쟁을 다시금 예수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훈령을 내렸다. 훈령에서 교황은 ‘천주’라는 용어는 승인하지만 그 외에 ‘천’이나 ‘상제’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서 공자에 대한 제사에 신자들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아울러 조상 제사에 사용되는 신주를 세우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훈령을 발표한 교황은 청나라에 이 조치를 알리고 설득시키기 위해 투르농(Charles Maillard de Tournon, 1668~1710) 주교를 특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부족했고 또 전략적인 외교술로 협상을 해내는 능력 또한 갖추고 있지 못했던 투르농은 강희제의 분노를 샀고 쫓기듯 로마로 돌아왔다. 결국 교황은 1715년 3월 기존 훈령보다도 더 강경한 어조로 중국 의례에 대한 금지 조치를 담은 칙서(Ex illa die)를 반포하였다.

강희제는 교황의 이 강경한 내용의 칙서를 번역문으로 접하고서 격노하였고, 1717년 4월 16일 금교령을 내렸다. 황제의 분노가 담긴 금교 조치로 각지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조치 등 탄압을 시작한 지방관들도 생겨났다. 이어서 크리스트교 선교문제에 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옹정제(雍正帝)가 황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더욱 경색되어갔다. 옹정제는 흠천감에 종사하는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카오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고, 중국인들의 천주교 신앙행위를 전면 금지하였다. 돌이킬 수 없어진 상황은 이제 중국 당국과 교황청의 물러서지 않는 강 대 강 대립으로 마무리되게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다시금 중국의 의례 논쟁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1742년 7월 11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어조의 다음 칙서(Ex quo singulari)를 반포하였다. 이 칙서로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은 중국 의례가 금지되는 사안을 숙지하고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되는 초유의 사태로 프랑스 예수회가 주도하던 18세기 예수회의 중국 선교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7 적응주의의 ‘연장’, 조선 문인 사회의 크리스트교 자발적 수용

의례논쟁과 금교령 그리고 예수회의 해산으로 이어진 동아시아의 크리스트교 선교의 역사는 또 한 차례의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동아시아에서 상호존중에 기반한 고도의 지적 교류를 이루었던 예수회식 적응주의 선교 철학은 18세기 말을 끝으로 급격히 설 자리를 잃어갔다. 특히 19세기 들어 2차에 걸친 아편전쟁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 열강이 청과 연이어 맺은 ‘불평등조약’은 동서양 관계의 맥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이는 선교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이후 동아시아로 파견된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때 선배 선교사들이 찬사를 보냈던 동아시아의 문명을 반대로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로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예수회 적응주의의 유산을 이어갔던 존재가 바로 조선이었다. 중국에서 예수회 적응주의로 쌓은 성과가 쇠퇴해 갔던 18세기 말 조선에서는 이제 막 크리스트교의 수용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적 유통을 통해 당시 사상계에 서학의 유행을 일으켰고 선교사의 직접적인 활동이 부재한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크리스트교를 수용하였다. 1784년 남인 사대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세례는 조선 크리스트교 전래의 역사를 공식화하는 상징이 됐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해 중국에서 유통되던 다수의 한문서학서를 섭렵하였던 조선의 사대부들 중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실용적 지식 습득과 다양한 사상의 섭렵 차원을 넘어 신앙의 영역에서 크리스트교를 수용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수회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적응주의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한문서학서가 사그라들던 예수회 유산의 불씨를 살리는 역할을 했다. 일본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시작으로 중국의 마테오 리치에게서 정착한 이래 조선에까지 이어졌던 16-18세기 동아시아 크리스트교 전래의 역사는 예수회 적응주의의 성립과 계승의 역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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