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갑자사화

갑자사화

연산군, 폭정을 시작하다

1504년(연산군 10)

1 개요

갑자사화는 1504년(연산군 10) 10월에 일어난 연산군(燕山君)의 대대적인 신료 숙청 사건이다. ‘사화(士禍)’라는 명칭이 붙은 만큼 ‘선비들이 입은 화’로 보아 훈구세력과 대비되는 사림세력의 피화사건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건의 발생 원인과 경과, 특히 피화된 사람들의 인적구성을 감안할 때 사림세력이 피화된 사건으로 보기는 힘들다. 갑자사화는 홍귀달 집안의 왕명 불복에 대하여 연산군이 관련자들을 처벌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언관활동이 극히 위축되어 있었고,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과 갖가지 횡음무도한 행동들에 대한 신료들의 반대가 표면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홍귀달의 일을 시작으로 하여 성종[조선](成宗) 재위시 자신의 모후를 폐비시키고 사사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던 모든 신료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확대하였다. 이로써 약 230여 명의 신료들과 그의 가족들이 처참한 화를 입었으며,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가속화되어 폐위로 귀결되었다.

2 연산군의 폭정과 꽉 막힌 언로

연산군은 즉위 초반부터 외척과 종실 인사에게 지나친 벼슬과 상을 내리고, 부왕이 절대 거론하지 말라고 한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일을 공론화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신료들과 잦은 대립을 빚었다. 연산군이 점차 신료들의 간언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판단에 대해 반대를 하는 신료의 발언이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 출처를 캐묻는 일도 생겼다. 이러한 연산군의 행동은 바로 신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려 한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임금을 능멸한다는 ‘능상’의 혐의는 주로 간언의 임무를 수행하는 언관들에게 집중되었다. 마침 대간의 탄핵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일부 고위직 신료들도 이와 같은 연산군의 의구심에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시 좌의정이었던 노사신(盧思愼)은 연산군이 추진하려는 사안에 대해 언관들이 반대할 때마다 왕의 입장에서 옹호하였다.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이 날로 잘못되어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여기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며, 일의 경중과 대소를 고려하지 않고 이기는 데만 힘쓰고 있다.”는 말로 언관들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연산군의 결정을 ‘위엄 있는 결단’이라 칭송하였다.

무오사화는 위와 같은 연산군 초반의 조정분위기가 배경이 되고,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서 세조[조선](世祖)를 비방하는 여러 글들을 쓴 것이 노사신, 한치형(韓致亨), 유자광(柳子光) 등의 대신들에 의하여 연산군에게 보고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단종[조선](端宗), 사육신(死六臣), 현덕왕후(顯德王后) 등 세조의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에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김일손의 사초를 계기로 그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이 공개되면서 일은 더욱 커졌고, 관련된 사람들이 처벌되었다. 김일손은 물론 김굉필(金宏弼), 임희재(任熙載), 최부(崔溥), 표연말(表沿沫) 등 김종직의 일파, 이유청(李惟淸) 등의 언관들, 정희량(鄭希良), 이극돈(李克墩), 윤효손(尹孝孫), 어세겸(魚世謙) 등의 대신들까지 사형, 유배, 파직의 형을 받았다. 무오사화 이후 언관들은 상당히 위축되어 연산군에게 간언하지 못하는 조정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연산군은 더더욱 왕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폭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이 시기에 연산군의 사치가 급증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즐겨 하였던 사냥과 연희에 쓰이는 비용과 총애하는 궁인들이나 기생들에게 후한 포상을 하면서 생기기 시작한 문제였다. 내수사(內需司)의 재정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자 연산군은 급한 일에 쓴다는 핑계를 대서 물자의 진상을 독촉하였고, 진상품을 구하러 간 주변인에게 필요 이상의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 결과 독수리 깃털, 살아있는 수달이나 여우, 수달 가죽, 산호 갓끈, 공작 날개, 청옥, 마노석, 황금, 털모자 등 각종 진귀한 물자들의 품목과 수량이 크게 증가였고, 그 만큼 국고는 만성 부족에 시달리고 민생은 힘들어졌다. 더군다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하며, 비가 지나치게 많이 오기도 해서 농사도 잘 되지 않는다.”는 장령 김광후(金光厚)의 보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유난히 심각한 자연재해가 빈발하던 때였다.

연산군은 사냥에도 탐닉하여 아차산, 정토산, 창릉(昌陵), 경릉(敬陵) 일대에 새로운 사냥터를 개발하기 위해 민가를 철거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거나, 사냥에 쓰이는 매를 기르는 일을 관리하는 응방의 인원과 규모를 확대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재위 8년부터는 연희를 빈번하게 실시하였는데, 술에 만취하여 신하들에게 폭언을 하거나 욕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간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아예 발언 자체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3 갑자사화, 장기적인 숙청의 시작

연산군의 도가 넘은 행동이 계속되고 국정의 모든 사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무오사화의 여파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신료들의 비판과 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삼사의 언관뿐만 아니라 언관들의 말이 지나치다고 지적했던 대신들까지 연산군에게 사안의 심각함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신료들의 비판적인 태도에 연산군은 ‘능상’이라며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여 점차 자신의 앞에서 작은 실수를 저질러도 자신을 능멸하는 짓이라고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대사례를 마친 뒤에 벌주를 마실 때 최응현(崔應賢)이 침을 흘렸다고 지적하면서 국문하라고 하거나, 사냥을 나갔을 때 영의정 성준(成俊)의 자세가 무례하다면서 경고하였다.

이러던 시기에 이세좌(李世佐)와 홍귀달 사건은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예조판서였던 이세좌는 인정전에서 열렸던 양로연 자리에서 국왕이 하사한 술잔을 엎질러 어의(御衣)를 적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는 당연히 고의가 아니었지만 연산군은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이세좌는 물론 그의 위세가 두려워 잘못을 힘써 지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간에까지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다.

결국 이세좌는 전라도 무안을 거쳐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되었다가 해배되었지만,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갑자사화의 도화선이라고 지적되었던 홍귀달 사건이 그것이다. 1504년(연산군 10) 3월 11일 연산군은 홍귀달의 아들인 참봉 홍언국(洪彦國)의 딸을 후궁으로 삼기 위해 입궐시키라고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명이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 홍귀달은 손녀가 병으로 인해 왕명을 따르지 못하였다고 해명했지만 연산군은 또다시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진노하였다. 홍귀달은 이 때문에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고, 연산군은 왕을 능멸하는 신료들의 행동을 근절하겠다며 이에 해당하는 행동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는 신료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연산군이 보기에 가장 큰 죄목이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자신의 모친인 폐비 윤씨의 폐서인과 사사 건에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후궁이었다가 중전으로 간택되어 2번째 왕비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후궁들을 투기하고 독약이나 굿을 할 때 쓰는 책인 방양서(方禳書)를 몰래 숨겨놓는 등 행실이 좋지 못하여 서인(庶人)으로 폐해졌고, 마침내 사사되었다. 그녀가 죽을 때 피눈물이 닦은 수건을 모친 신씨에게 주면서 장차 자신의 아들이 자라면 이것을 전해주고, 자신을 길가에 묻어 임금이 행차하는 것을 보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야사에 전해진다.

윤씨의 유언이 실현이 된 듯, 연산군은 즉위한 지 얼마 성종의 묘지문을 살펴보다가 승지들에게 폐비의 일을 들어서 알게 되었고, 그 날 밥을 굶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생모를 복위하고 외가친지들을 살피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갑자사화가 일어난 즈음 폐비의 사사를 막지 못한 왕실 사람들과 신료들이 바로 자신을 능멸하고 무시한 자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죄인은 지위여하를 가리지 않았고, 처벌은 잔인했다. 왕실 사람들을 보면, 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정씨와 그의 아들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우선적인 대상이 되었다. 이복동생들을 차례대로 압송해서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처소로 가서 모욕을 주고 정씨와 엄씨는 죽여서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버리게 하였다.

뒤이어 신하들에게도 그 화살을 돌려 연산군은 당시 그 사건에 개입한 모든 신하의 명단을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본격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갑자사화로 형벌을 받은 인원은 관련자 본인만 계산 했을 때 23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여기에 가족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우선 그 인적구성을 보면 윤필상(尹弼商), 한치형,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어세겸, 심회(沈澮), 이파(李坡), 김승경(金升卿),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을 연산군이 십이간(十二奸)이라 지목하여 처벌하였는데, 이세좌는 폐비윤씨의 사약을 들고 간 인물이며 앞서 자신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던 인물이다. 한명회, 정창손 등 이미 죽은 사람들은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내는 부관참시의 형벌을 당했다. 또한 홍귀달, 권달수(權達手), 이유녕(李幼寧), 변형량(卞亨良), 이수공(李守恭), 곽종번(郭宗藩), 박한주(朴漢柱), 강백진(康伯珍), 최부, 성중엄(成重淹), 이원(李黿), 김굉필, 신징(申澄), 심순문(沈順門), 강형(姜詗), 김천령(金千齡), 정인인(鄭麟仁), 이주(李胄), 조지서(趙之瑞), 정성근(鄭誠謹), 정여창(鄭汝昌), 성경온(成景溫), 박은(朴誾), 조위(曺偉), 강겸(姜謙), 홍식(洪湜), 김처선(金處善)은 혹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혹은 바른 말로 간했다는 이유로 모두 참혹한 화를 당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모두 시체를 욕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앙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거나 흔히 사림이라고 불리는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갑자사화의 피화인들은 본인에게 가해진 사형, 유배, 파직 등의 형벌은 물론 8촌 범위의 친족들까지 처벌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신하들에 대한 처벌이 거의 끝났을 무렵 연산군은 〈갑자년흉사정죄안(甲子年兇邪定罪案)〉이라는 죄인 명부를 작성하게 하고 얼마 뒤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4 가속화되는 폭정과 중종반정

갑자사화로 인하여 대신이나 승지들, 언관들까지 연산군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어떠한 바른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산군의 정치는 포악한 정치가 아니며 풍속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연산군은 언론을 완전히 통제하여 당시 조정의 일이나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발설을 지극히 싫어했으며, 역사서술과 관련한 기록도 통제했다. 유흥과 사냥을 즐기기 위한 장소를 넓히고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토목공사와 각종 건축이 시행되었다.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1,300여 명의 인원을 동원해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인공산을 조성하고 거기에 봉래궁 같은 건물들을 만들었으며, 수백명이 탈 수 있는 황룡을 조각한 배를 만들어 놀았다.

사냥터를 위해 도성 안의 민가를 철거하고 백성들의 접근을 차단시키기 위해 서울과 경기도 일대 곳곳에 연산군시대금표비(燕山君時代禁標碑)를 설치했다. 엽색행각은 더욱 더 심해져서 기녀의 숫자와 조직을 대폭 확대하여 선발하고 운영했으며, 이들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당연히 이들과 관련한 각종 추문이 나돌았으며, 이러한 성적인 추문은 기녀들과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종실의 여성들과 신료들의 부인에게까지 미쳤다. 이 중 가장 충격적인 추문은 큰어머니인 월산군(月山君) 부인 박씨와의 염문설이며, 좌의정 박숭질(朴崇質)의 아내 정씨가 가장 젊고 아름다워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까지 있다. 재정적 지출은 날로 무거워져 백성들의 삶이 고단해지는데도 정무에는 태만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폭정은 결국 1506년(중종 1) 9월 1일 저녁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끝을 보게 되었다. ‘반정(反正)’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일은 연산군의 10여 년간의 폭정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그 날 바로 잡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다가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갑자사화는 그 발생 원인과 전개과정, 그 이후 정국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폭군 연산군의 이미지를 가장 잘 형상화시키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