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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인의 옥[姜尙仁의 獄]

상왕 태종의 병권 장악을 거스르다

1418년(세종 즉위)

강상인의 옥 대표 이미지

심온선생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1418년(세종 즉위) 8월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모든 권력을 다 물려주지는 않았다. 특히, 병권(兵權)만큼은 상왕이 된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양위 직후 4개월 동안 상왕의 병권 장악에 불만을 나타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논란이 된 사람은 강상인(姜尙仁, ?∼1418)이었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병조의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했다는 이유로 결국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된 이후에도 탄핵이 이어져 강상인에 대한 혐의는 추가되었다. 강상인이 심정(沈泟), 박습(朴習)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상왕의 병권 장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이 논란이 되어 모반대역(謀反大逆)의 죄목을 받아 관련자 모두 처형되었고, 연좌된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특히, 심정의 형이자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沈溫)이 ‘괴수(魁首)’, 즉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당시 명 사행 중이었던 심온은 귀국하자마자 국문을 당했고 곧바로 상왕의 명에 따라 자진하였다.

2 상왕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다

1418년(태종 18)은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해이다. 재위기간 동안 여러 차례 내선(內禪)을 추진한 바 있었던 태종은 재위 18년에 결국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다.

우선 6월에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급작스레 폐위되었다. 세자의 행실이 줄곧 문제되기는 했지만, 그가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궁중에 들인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폐위가 강행되었다. 한편, ‘택현(擇賢)’이라는 명분 하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새롭게 세자에 책봉되었고, 약 2개월 후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태종은 상왕이 되었지만, 당일 그는 “주상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할 것”임을 밝혔다. 또한 군사 외의 국가의 중요한 일에도 참여할 수 있음을 덧붙였다. 태종의 언급에 따르면, 그의 병권 장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어린 세종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실상 당시 세종은 22세여서 아주 어리지는 않았지만, 세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던 상황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세종의 정치적 기반이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태종은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 부자나 양녕대군을 끼고 ‘틈을 엿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3 강상인, 상왕의 뜻을 거스르다

강상인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나서 우왕대 말엽부터 이방원(李芳遠)의 가신(家臣)으로 활약하였다. 태종 집권 이후부터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태종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기도 했다. 관력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는 않은데, 1402년(태종 2) 강계(江界)에 파견되어 임팔라실리(林八刺失里)의 여진을 위무하고, 이후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 병조참판 등을 역임한 정도가 확인된다.

강상인의 옥은 그가 병조참판이 된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인 8월 말경에 발생하였다. 상왕 태종은 강상인과 병조좌랑 채지지(蔡知止)를 잡아 의금부에 하옥할 것을 명하였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강상인 등이 군사에 관한 일을 상왕이 아닌 주상에게만 보고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상인이 거짓으로 상왕의 교지를 꾸며 자기 아우 강상례(姜尙禮)에게 사직(司直) 벼슬을 주고 나서 상왕 태종에게 세종이 벼슬을 내린 것처럼 했다는 것이었다. 강상인, 채지지 외에도 병조판서 박습(朴習)을 비롯하여 병조의 낭청들이 모두 잡혀가 국문을 받았다.

이때 이들에 대한 처벌은 추방, 속장(贖杖) 등으로 그다지 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간원, 형조 등의 처벌 요구가 이어지면서 강상인, 박습 등에 대한 처벌 강도는 점차 높아졌다. 강상인은 옹진 진군(甕津鎭軍)에 붙이도록 했다가 단천(端川)의 관노가 되게 하였다.

4 옥사가 크게 확대되다

강상인이 관노가 된 지 한 달여가 지난 11월 초, 상왕은 편전에 나가 강상인에 대한 처리 문제를 다시 언급하였다. 이에 관련자들은 다시 한양으로 잡혀 왔고, 국문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압슬(壓膝)의 가혹한 형벌을 당하던 강상인의 진술에 동지총제 심정(沈泟), 이조참판 이관(李灌), 전 총제(摠制) 조흡(趙潝), 영의정 심온,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거론되었다. 그들은 병권의 체계가 일원화되기를 바라거나 그러한 의견에 수긍한 사람들로 지목되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강상인은 백관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했는데, 그는 죽기 전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를 견디지 못해서 죽는다.”는 말을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어 박습, 이관, 심정 역시 참형을 당했으며, 관련자들의 형제·아들들도 대거 유배에 처해졌다.

더불어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행해졌고, 상왕 태종을 중심으로 하는 군무 처리 방식도 정리되어 갔다. 병조는 상왕의 직속 기구로 명시되었고, 출납까지 담당했다. 즉, 주상전의 출납은 승정원에서, 상왕전의 출납은 병조에서 맡는 방식이었다. 또한 의건부(義建府)와 삼군부(三軍府)로 이화되었던 군부도 삼군부로 통합하여 일원화했다.

5 심온, 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진하다

관련자들이 또 다시 잡혀 오고 대질 신문이 이어지던 와중에 가장 논란이 되었던 인물은 당시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 있었던 영의정 심온이었다. 심온은 “군사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옳다.”고 말하며 상왕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는 여론을 주동한 혐의를 받았다.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자 공비(恭妃, 소헌왕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조말생(趙末生) 등은 폐비(廢妃)를 청하기도 했다. 상왕이 폐비 논란에 반대하면서 직접 며느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고 하는데, 위로가 되었을지는 미지수다. 폐비가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약 한 달 뒤 아버지 심온은 죽임을 당했다.

심온은 12월 말엽 거의 귀국과 동시에 자진하였다. 태종은 의주에 의금부 관원을 보내 심온을 잡아오라고 하였고,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국문이 행해졌다. 심온은 강상인 등이 이미 죽은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문을 당하다가 결국 자복하였고, 하루만에 상왕 태종의 명에 따라 자진하였다.

6 양상(兩上) 통치의 기반이 구축되다

강상인의 옥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강상인을 비롯한 병조의 관리들이 상왕 태종의 병권 장악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비롯하였다. 상왕이 병권을 행사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일부 관료들이 제대로 따르지 못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강상인의 옥은 결국 심온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태종이 재위 기간 동안 민무구(閔無咎) 형제들을 제거함으로써 외척의 정치적 참여를 차단했던 전력을 감안한다면, 심온의 죽음도 병권 장악에 반대 의견을 나타낸 것보다 이후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될 외척에 대한 경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옥사가 마무리된 이후 ‘상왕(上王)’ 태종과 ‘주상(主上)’ 세종이 함께 정치를 운영해 나갔던 이른바 ‘양상(兩上) 통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상왕 태종은 병권을 통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고, 1421년(세종 3)에는 ‘태상왕(太上王)’으로 존숭(尊崇)되었다. 그리고 주상 세종은 태종의 업적을 계승하며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양상 통치는 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1422년(세종 4) 5월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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