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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수양대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대표 이미지

청주 모충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 세조[조선](世祖)가 조카 단종[조선](端宗)에게서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킨 사건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수양대군은 문종[조선](文宗)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 수십 인을 살해하고 조선의 실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난(難)을 다스렸다’는 뜻인 ‘정난(靖難)’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을 핑계로 그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계유정난, 이징옥의 난(李澄玉-亂) 등을 통해 기반을 다진 수양대군은 결국 정난 2년 뒤에 단종으로부터 선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조선의 제 7대왕 세조(世祖)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 전체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계유정난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후 사육신(死六臣) 사건 등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일어나며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세조는 자신의 왕권을 확고히 하고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물려받아 손자 성종[조선](成宗)의 치세로 이어지는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치세를 유지하기 위해 공신(功臣) 책봉을 남발하여 이후 훈척세력의 거대화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2 수십 년 동안의 태평성대

세종의 재위기간은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했던 태평성대로 손꼽힌다. 조선 건국 이후 최대의 과제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잡는 사업, 즉 각종 문물제도의 정비였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부터 계속된 이 사업은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왕자의 난 등 태종[조선](太宗)대까지 이어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그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학문을 사랑하는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세종은 태종이 닦아놓은 안정적 왕권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학문 역량을 십분 발휘,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중요한 과제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각종 의례를 정비하고 재정의 근간인 공법(貢法)을 실시하는 등, 왕조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편찬,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과학기술의 발달, 국가 전례 음악 정비 등 문화적 성과 또한 뛰어났으며, 농법 개량, 무기 개발 및 국토 개척 등에서도 뚜렷한 성취를 이루었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 또한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이어받았다. 그는 이미 세종이 이루어낸 각종 성취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1445년(세종 27) 이후로는 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면서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각종 서무에 대한 처리를 담당하였고, 이를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3 태평성대의 이면

그러나 문종에게는 단 한 가지의 흠이 있었다. 몸이 지나치게 허약했던 것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세자를 책봉하였으나, 유고가 있을 경우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은 앞으로 찾아올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1452년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서른아홉의 한창 나이로 병사하였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단종의 나이는 겨우 열두 살에 불과했다.

한편, 세종대를 거치며 닦아놓은 태평성대의 이면에는 불안이 내재해 있었다. 세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한 김종서, 황보인 등 문신 세력이 전체 정사를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어린 아들 단종을 염려하며 부탁한 문종의 유지를 받들었다는 명분이 있었다.

단종 스스로도 즉위교서에서 모든 사안을 의정부(議政府) 및 육조(六曹)와 상의하겠다고 명시하면서, 육조의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의정부 및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켰다. 김종서 등이 소위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통해 관직인사를 농단하는 소문도 돌았다. 요직을 임명할 때에 국왕에게 후보자 3인의 명단을 올리는데, 후보자 중 한명의 이름에 황표(黃標)를 붙여 사실상 자신들이 점찍어 놓은 이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대신들이 막대한 뇌물을 받거나 그들의 자손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등의 소문은 결국 수양대군이 이들을 처단할 수 있게끔 하는 명분이 되었다.

물론 대신들의 정권 농단에 대한 여러 소문들은 수양대군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의정부 및 대신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던 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집현전 출신으로 세종대의 치세에 일조하였던 관료들 중 상당수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일조 또는 방조하였던 것을 보면, 일면 수양대군의 위세가 워낙에 대단했던 탓도 있겠지만 의정부의 권한 증대에 대한 관료들의 반감 또한 상당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의 권한을 다시 줄여야 한다는 간언이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단종을 보위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욕심 때문인지,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강성한 대군들을 의심하여 당상관 및 대군들의 집에 잡인들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고자 하였으나, 강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대군에 머무를 수 없었던 그릇들

성군 세종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서일까, 세종의 아들들 또한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났다. 첫째아들 문종은 세종의 학자적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학과 예술에 뛰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당대 제일의 서예가이기도 했던 안평대군은 문인 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단종 즉위 초기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과 연합하여 실권을 휘두르는 등, 정치적 기량 또한 원숙했다.

문종과 안평대군이 문(文)에 치중된 인재들이었다면, 둘째아들 수양대군은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여, 세종이 강무할 때에 16발의 화살로 16마리의 사슴을 잡아,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가졌던 태조를 닮았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북한산(北漢山)과 같은 험준한 산세를 가진 곳도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쉽게 내려왔다고도 하니, 타고난 신체 능력과 후에 연마한 기술이 모두 뛰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성품 또한 뛰어난 무예 실력에 어울리게 괄괄하고 호방하였으니, 그가 무사들이 추앙하는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신들의 권한이 점차 비대해지기 시작했으며 대신들과 연합한 안평대군도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실권자로 떠올랐다. 수양대군도 물론 자신의 세력을 더욱 규합하기 시작하여, 두 대군파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나이 어린 단종에 비해 세종의 아들 여덟 대군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

특히 수양대군에게는 전략을 가다듬을 모사꾼이 필요했는데, 그런 그에게 한명회(韓明澮)와의 만남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권람(權擥)의 소개로 한명회를 만난 수양대군은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였으며, 한명회를 두고 자신의 장자방(張子房)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중요한 간언을 한다.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게 되니, 이때에는 항상 충의로운 신하가 있어서 반정(反正)을 하는 것이 천도(天道)에 부합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한명회와의 만남은 이미 왕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수양대군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명회의 조언을 받아들여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의 무사 세력을 더욱 규합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대신 세력이 각축하던 세력 경쟁은 드디어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다다랐다. 단종이 즉위한 해 9월 명(明)에서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은사(謝恩使)를 파견해야 하는 때였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결정되자, 권람과 한명회 등은 수양대군이 명으로 떠나있을 때, 상대편 세력이 움직일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떠나려는 수양대군을 만류하였다.

이는 당시 어느 한쪽이 먼저 움직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에 수양대군은 황보인이나 김종서는 호걸이 되지 못해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안평대군 또한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5 몰아치는 피바람

명에 다녀온 후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은 마침내 상대 세력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10월 10일에 거사하기로 주위 인물들과 약정하였다. 상대 진영 또한 수양대군이 곧 움직일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은 상대 진영이 수적으로 열세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자신하였다.

바야흐로 10일 아침,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달손 등을 불러 거사 계획을 확인한 후, 강곤(康袞), 홍윤성(洪允成), 임자번(林自蕃), 안경손(安慶孫), 홍순로(洪純老), 민발(閔發), 곽연성(郭連城) 등을 모아 그날의 거사를 의논했다. 그러나 아직 계획에 이견이 있어, 몇몇은 국왕에게 먼저 아뢴 후에 거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수양대군은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활을 들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수양대군이 먼저 노린 것은 대신 중의 실세 김종서였다. 김종서는 당시 ‘큰 호랑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기 때문에, 그를 먼저 없앨 수 있다면 거사에 큰 탈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갑옷을 속에 입고 수하 몇 명과 함께 김종서의 집에 이르렀다. 김종서는 그를 의심하여 집안으로 수양대군을 들이고자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한사코 집 밖에 머물렀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 또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수하들과 함께 김종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꾀를 내어 김종서에게 사모뿔을 하나 빌려 달라 청하여 김승규를 집으로 들여보낸 후, 은밀히 의논할 것이 있다며 신사면, 윤광은 등을 멀리 물리치도록 하였다. 김종서의 호위가 모두 사라지자 마침내 철퇴가 김종서를 내리쳤다. 거세게 몰아칠 피바람의 시작이었다. 놀라 뛰어나온 김승규마저 칼로 찔러 쓰러뜨렸다.

이어 수양대군은 궁궐로 향하여 입직승지(入直承旨) 최항(崔恒)을 불러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키려 하여 사세가 급박하므로 임금에게 미처 아뢰지 못하고 그를 죽였다고 고하였다. 단종이 그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수양대군은 왕명으로 대신들을 부르도록 하여,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을 궁문에서 때려죽였으며, 그 일파인 윤처공(尹處恭), 이명민(李命敏), 민신(閔伸) 또한 사람을 보내어 제거하였다. 자신의 동생으로 정치적 라이벌인 안평대군을 강화에 압송한 후, 결국 사사하였다. 정분(鄭苯) , 조수량(趙遂良), 안완경(安完慶) 등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한 함길도절도사로 있던 이징옥(李澄玉)을 김종서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임명하였다. 이징옥은 오히려 박호문을 죽인 후,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스스로를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이징옥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이징옥은 미처 세조에게 위협조차 해보지 못하고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반간계(反間計)로 살해당하였다.

6 계유정난의 결과와 반발

계유정난을 반대세력을 제거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 등 여러 중직을 모두 겸하여 정권과 병권을 모두 독차지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정창손(鄭昌孫), 이계전(李季甸), 권준(權蹲), 박중손(朴仲孫), 최항, 기건(奇虔) 등 자신을 도운 이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이어 국면이 진정된 후에는 자신을 포함해 공을 세운 정인지, 한확, 정창손, 박종우(朴從愚),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신숙주(申叔舟) 등 43인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하였다. 바야흐로 조선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정권을 완전히 탈취한 수양대군에게 남은 것은 옥좌에 오르는 길 뿐이었다. 결국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 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당연히 반발도 있었다. 일부 집현전 학자들이 세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또는 세조의 행위를 묵인하긴 하였지만, 의리를 중요시하는 성리학을 공부하던 당시 학자들에게 세조의 왕위 찬탈은 명분에 어긋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반대세력을 척살할 때만 해도, 많은 관료·학자들은 당시 대신 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저지하고 정치 질서를 회복시키려 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러나 세조가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난을 비롯한 그의 행위는 모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수차례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고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사육신 사건이란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여섯 인물이 세조와 측근 인물들을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사건을 말한다. 세조가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明) 사신을 대접하기로 하였는데, 이 자리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호위인 별운검(別雲劒)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성삼문, 성승, 박팽년, 유응부 등이 모의하여 그 자리에서 세조를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명회가 장소가 협소하니 호위를 들이지 말자고 청하여 거사가 연기되었다. 결국 같이 모의했던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실토, 세조에게 고발한 것이다. 세조는 분노하여 일을 꾀한 자들을 직접 국문(鞠問)하였으나, 이들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세조를 비난하였다. 결국 이들은 사지가 모두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죽었다.

사육신 사건의 여파로 결국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던 중 다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이 터지면서 금성대군은 역모죄로 죽고, 결국 노산군 또한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끝에 죽임을 당하였다.

직접 세조를 몰아내기 위해 행동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세조를 위해 벼슬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킨 학자들도 있었다.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 중 김시습은 거열형을 당해 죽은 사육신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강가에 묻은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7 세조 정치의 명암

왕위를 빼앗고 친동생들과 조카까지 죽였다는 세조에 대한 비난은 그의 치세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풀 수 없는 숙제와도 같았다. 그 스스로도 양심적 가책을 느꼈는지,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가 꿈에 나타나 세조의 자식을 죽이겠다 하여 놀라 꿈에서 깨니, 세자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세조가 말년에 지병으로 매우 고생하였는데, 친족들을 죽인 벌로 문둥병을 앓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세조는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을 수차례 공신에 임명하였고, 이들은 특권층을 형성하여 후일 정치를 농단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이 정계에 등장하는 계기를 열어주게 되었다. 후일 사림(士林)이라 규정된 이 정치세력은 기존 특권계층을 훈구파(勳舊派)로 지목하며 대결하였고, 16세기 이후 붕당정치라는 조선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조의 재위 기간이 내내 불안하기만 한 시기는 아니었다. 세조는 통치의 근본이 되는 법전 편찬을 시작할 것을 지시하여 성종대에 완성되니 바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또한 호패법, 직전법의 시행 등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되었다. 이러한 세조대의 정책은 결국 성종대의 찬란한 문치가 있을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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