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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약조

일본과의 평화적 교류 기틀이 마련되다

1443년(세종 25)

계해약조 대표 이미지

계해약조 기록(1)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443년(세종 25) 해마다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지급하는 미두(米豆)의 수량 및 대마도에서 조선에 파견하는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정한 약조이다.

2 왜구의 발생과 조선의 대책

14세기 후반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무너지고 남북조시대가 열리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이를 틈타 일본 서부에서 대규모의 무장세력들이 왜구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연안을 약탈하였다. 고려에서는 1350년(충정왕 9)부터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는데, 특히 우왕(禑王) 때는 연해 지역이 초토화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는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홍산대첩·황산대첩·관음포전투 등에서 왜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그 기세를 한풀 꺾었고, 1389년(창왕 1)에는 박위(朴葳)로 하여금 왜구의 본거지 중 하나였던 대마도를 타격케 하기도 했다.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수는 크게 감소했으나,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왜구는 여전히 중대한 현안이었다. 따라서 태조와 태종은 다방면으로 왜구 대책을 추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수군을 정비하고 병선을 개량하며 연해 지역에 방어시설을 설치하는 등 왜구에 대한 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외교적으로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진압과 붙잡힌 조선인의 송환에 노력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고, 이는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왜구를 통제하는 데 가장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왜구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태조와 태종은 왜구의 회유에 힘을 쏟아, 왜구를 평화로운 통교자(通交者)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왜구의 진압에 공을 세우거나 조선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 혹은 특별한 기술이 있는 투항자에게는 명목상의 관직을 수여하고, 조선에 투항한 이들에게는 토지·가옥·노비 등의 물질적 대가를 주어 조선에 정착하게 하며, 일본 내 여러 세력들의 사신들을 받아들여 접대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왜구들은 평화적인 통교자로 점차 변화하여, 귀순해서 조선에 정주하는 향화왜인(向化倭人), 조선에 찾아와 평화롭게 무역하는 흥리왜인(興利倭人), 일본 내 여러 세력들의 사신으로서 조선과의 관계를 중개하는 사송왜인(使送倭人),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분화해 갔다. 이는 태종 중반 이후 왜구의 수가 급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회유책이 궤도에 오르기는 했으나 왜구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 내의 정세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왜구가 다시 출몰할 소지가 남아 있었다. 실제로 1418년(태종 18) 이전까지 조선의 왜구 대책에 협력적이었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자리를 상속하자 대마도에는 정치적 불안정이 빚어졌고, 또한 흉년으로 인해 생활이 궁핍해졌다. 이에 대마도인들은 다시 왜구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연안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1419년(세종 1) 5월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운 후 황해도 연평도(延平島)를 약탈하고 요동반도로 나아갔다.

이에 이전에도 강경책을 주장했으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상왕 태종의 주도 하에 이종무를 지휘관으로 하여 6월에 대마도 정벌이 단행되었다. 이후 대마도가 조선에 항복의 뜻을 전하고 조선으로부터 대마도주임을 증명하는 인신(印信)을 받음으로써 대마도와의 통교관계가 정립되었다. 대마도 정벌은 원래 목적대로 왜구를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지만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 정립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왜구의 근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정벌 이전부터 추진되던 회유책이 더욱 확대 실시되었고, 동시에 대마도를 축으로 하는 조선의 대일 통교체제가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3 통교체제의 정비

대마도 정벌로 왜구에 대한 토벌 및 왜구의 근거지·중간기착지였던 대마도와의 관계설정이 일단락되고, 왜구에 대한 회유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왜구 문제는 점차 해결되어 갔다. 그런데 평화적인 대일통교체제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 각지로부터 조선에 오는 통교자들을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당시 조선에 오는 일본인들을 규제하는 규정들이 정비되지 않아, 이들이 해안지방을 마음대로 왕래하면서 무역을 하여 많은 폐단을 낳았으며, 심지어는 군사상 비밀이 노출될 우려도 있었다. 또한 위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로부터 아래로는 소규모 지방세력까지 독자적으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도 무제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접대하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일본인들이 지나가는 연로의 백성들 역시 큰 부담을 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접대를 완전히 중단하면 이들이 왜구가 될 것이 명백하였으므로, 회유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에 대한 회유책 자체는 이어나가되, 방만한 통교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치안상의 혼란 및 재정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 골자는 일본인들과의 접촉을 정해진 창구에 한정시키고, 일본인 통교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대마도주에게 통교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통교체제를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우선 일본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를 제한하였다. 일찍이 1407년(태종 7)부터 흥리왜인이 무역할 수 있는 장소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 즉 제포(薺浦)의 2개 항구로 제한하였고, 1418년(태종 18)에는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을 추가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이들 항구들이 일시 폐쇄되었으나, 1423년(세종 5)에 태종이 죽자 다시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항하고, 1426년(세종 8)에는 염포를 추가로 개항하여 일본인들이 이곳으로만 도항해서 무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포(三浦)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본의 다양한 세력들에게 인장 등을 지급하여 조선에 사신을 보낼 때 증거로 삼게 했다. 즉 무로마치 막부나 오우치씨(大內氏) 등 주요 세력에게는 통신부(通信符)를, 이외의 통교자들에게는 도서(圖書)를 발급하여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때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은 공식적으로 발급된 증서를 소지한 이들에게만 입국을 허용함으로써 통교자들의 무질서한 왕래를 통제하고자 했다. 이는 현대에 여행자들이 본국의 여권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 입국할 수 없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유사하다. 조선 초 일본에서 오는 통교자들은 반드시 자신을 파견한 사람이 작성한 외교문서인 서계(書契)를 지참하여야 했는데, 특히 대마도 정벌이 끝난 1420년(세종 2)부터는 대마도인은 대마도주의 서계를, 규슈에서 온 통교자들은 규슈 지역을 관할하는 규슈탐제(九州探題)의 서계를 지참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신 명목으로 조선에 온 사송왜인들은 대마도주나 규슈탐제의 서계가 없으면 공식적으로 접대를 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장사하러 오는 흥리왜인들 역시 사송왜인과 동행하거나 서계의 지참을 요구받았다. 이는 대마도주와 규슈탐제를 이용해 통교자들을 규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대마도의 정치적 불안정과 규슈탐제의 지배력 약화, 조선측의 불철저한 통제, 그리고 서계의 빈번한 위조 등으로 인해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서계를 대신하여 통교자들의 신원을 보장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바로 문인(文引)이다. 문인은 행장(行狀)·노인(路引)이라고도 불렸는데, 원래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조선 국내의 통행증명서로 사용하던 것을 일본인과 여진인 통교자에게 전용하여 입국증명으로 삼은 것이다. 문인에는 선박의 대소, 사자 및 선원의 수 등이 적혀 있었으며, 무역을 목적으로 한 배이든 사신을 태운 배이든 조선에 건너오는 모든 일본 선박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통교자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1407년(태종 7)에는 문인 이전의 단계인 행장이 처음으로 적용되었고, 1426년(세종 8)에는 노인이 흥리왜인의 도항증명서로 제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1438년(세종 20)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 이예(李藝)가 대마도주와 문인에 관련한 제도를 약정하면서 문인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 및 일부 주요 세력이 보낸 사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을 지참하도록 하여, 조선은 일본의 모든 통교자를 대마도주를 통해 통제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통교체제상 대마도주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4 세견선 숫자의 제한과 계해약조의 체결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일본에서 건너오는 통교자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교자의 수 자체는 여전히 줄지 않아 조선에 큰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세종대 후반에는 통교자의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는 해마다 일본에서 오는 선박의 숫자 자체를 약정을 통해 제한함으로써 통교자의 총 숫자를 한정하는 방책이 취해지게 되었다. 이것이 세견선(歲遣船)의 정약(定約)이었다.

세견선의 정약이란 일본의 각 세력에 대하여 1년에 몇 척의 배를 파견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것으로서, 종래 무역을 위해 입항하던 흥리선(興利船)과 사신 파견을 명목으로 입항하던 사송선(使送船)을 사송선의 형식으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즉, 사신 파견과 무역을 통합하고, 그에 대한 총량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전통시대 중국이 여타 국가에 조공의 횟수와 시기, 선박수를 한정한 것과 상응하며, 고려시대 일본에서 보내온 진봉선(進奉船)의 정약과도 매우 유사하다.

세견선 숫자를 처음 정한 것은 1424년(세종 6) 규슈탐제와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사송선을 파견하도록 약정한 것이지만, 본격적으로 대 일본 통교체제의 기본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1443년(세종 25)에 계해약조를 통하여 대마도주가 파견하는 세견선의 숫자를 정한 뒤부터이다. 이후 일본의 여러 세력들에 대해서도 세견선 숫자에 대한 정약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 전기의 대일본 통교체제는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해약조의 내용 및 정확한 체결시기, 체결주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록이 많지 않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계해약조는 1443년 7월에 파견된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 이예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와 교섭하여 체결하였으며, 당시 교토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신숙주(申叔舟)가 약조의 교섭 과정에 공헌한 것으로 보인다. 계해약조라는 이름은 1443년이 계해년(癸亥年)이었기 때문에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라 가키츠조약(嘉吉條約)이라고 한다.

계해약조의 내용은 이하의 2개 항목만 남아 있다. 첫째,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한다. 둘째, 대마도주는 조선에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 이 두 항목이 계해약조의 전체 내용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약조의 핵심이었음은 분명하다. 첫 번째 항목은 곡물의 생산량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대마도에 대해 물질적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고, 두 번째 항목은 세견선 수의 고정을 통해 통교자의 수 및 그에 따른 교역의 규모를 한정시킨 데 의의가 있다. 이후 일본 내의 여타 세력들이 기껏해야 수 척의 세견선을 허용받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마도주에게 허락된 50척의 세견선은 조선의 대 일본 관계에서 대마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잘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계해약조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지만, 이는 단순히 대마도주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조선 초기 대 일본 통교체제의 기본약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조약을 선례로 하여 세종대에는 대마도에 거주하는 대마도주의 일족들과 세견선 약정이 마무리되고, 세조대에는 일본 본토 각지의 세력들에게도 세견선 약정이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성종 초에 다시 한 번 제도를 정비하여, 세견선 약정을 기반으로 한 조선 초기 대 일본 통교체제는 완성을 보게 된다.

5 계해약조의 의의 및 결과

계해약조를 기점으로, 위로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아래로는 소규모 세력까지 포괄하는 일본의 다양한 통교자들을 세견선 약정을 축으로 하여 통일적으로 체계화하는 통교체제가 정립되어 갔다. 직접적으로는 조선의 대일본 통교체제의 핵심이 되는 대마도에 대해서도 세견선을 매개로 한 통제가 가능하게 되어, 대마도를 조선의 외교 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계해약조를 기반으로 한 대마도와의 관계는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지속되어, 삼포왜란 이후 1512년(중종 7)에 맺어진 임신약조(壬申約條)나 사량진왜변(蛇梁津倭變) 이후 1547년(명종 2)에 맺어진 정미약조(丁未約條)는 내용의 변화는 있었으나 모두 1년에 하사하는 곡물의 양 및 세견선의 수를 규정하는 계해약조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며, 심지어 임진왜란 이후 1609년(광해군 1)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면서 맺은 기유약조 역시 계해약조를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계해약조는 조선 말까지의 대일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대마도 입장에서 계해약조는 대마도주의 대조선무역 이권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이전까지 제한이 없이 이루어졌던 교역의 총량이 규제되었다는 점에서 불만의 소지가 컸다. 따라서 대마도에서는 조선에 세견선 숫자의 증액을 요구하는 한편, 숫자가 정해져 있지 않은 특송선을 활용하는 방도를 모색하였다. 아울러 대마도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강화하기 위해 대마도 내의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진 통교권, 즉 세견선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고, 나아가 일본 내 다른 세력들의 명의를 위조하여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는 위사(僞使)를 통해 교역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계해약조는 단순히 조선-일본 관계를 규정한 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의 조선-일본 관계의 전개 양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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