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3년(세종 25)
공법(貢法)은 조선시대 과전법 체제 하에서 실시된 정액 세법이다. 다만, 전답(田畓)의 토질과 한 해의 풍흉(豊凶)에 따른 수확량의 차이를 고려한 차등 정액으로 실시되었다. 공법은 원래 중국의 제도였다. 고대 하(夏) 왕조에서 농민 1인에게 토지를 50무(畝)씩 지급하고 그 가운데 1/10에 해당하는 5무의 수확량을 세금으로 거두었던 정액세제이다. 정액 세액은 수확량의 중간을 따져서 정해졌다. 그러나 풍흉에 따라 수확량 차이가 크기 때문에 공법의 적절성 여부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맹자(孟子)』에서는 공법이 풍년에는 수취하는 국가에서 손해이고, 흉년에는 납부하는 백성들이 고통스럽다고 비판했다. 이는 세종이 공법을 제정할 때 우선적으로 고민한 부분이기도 했고, 조정에서 관련 논의를 할 때에도 가장 화두가 되었던 문제였다.
세액 산정은 세종대 이전 과전법 체제 하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과전법은 전국의 토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고 국가에 역을 부담하는 기관과 개인에게 수조권(收租權, 경작자로부터 1/10의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을 나누어 주었던 토지제도이다. 국가에서는 수확량을 파악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여 작황을 조사하여 등급을 정하는 답험법(踏驗法)을 시행하였고, 등급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세금을 감면해 주는 손실법(損實法)을 실시하였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답험손실법 혹은 손실답험법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조선 전기 전국 대부분의 땅이 토질이 나쁜 하등전(下等田)이었던 상황에서 토지를 세 등분으로 구분했던 것은 근본적인 한계로 지적되었다. 또한 답험손실의 과정에서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관리들이 부정을 자행하기도 했고, 전주(田主)가 실제보다 수확량을 초과하여 산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세종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세액 산정 방식을 추구하고자 했고, 기존의 답험손실 대신에 중국 고대의 공법을 선택했다. 단, 기존 공법의 단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조선의 실정에 알맞은 공법을 수립하고자 했다.
세종은 즉위 후부터 공법 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관련 논의가 행해진 때는 1427년(세종 9)이었다. 그 해 세종은 공법 시행의 가부를 문과시험의 문제로 냈다. 문제에는 기존 답험의 문제점이 열거되었고, 기존 공법에서 드러난 단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묻는 것이 서술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좋은 답안을 채택하여 시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지금 응시자들의 답안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후에는 조정에서도 공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세종이 가장 고민했던 점은 역시 풍흉의 수확량 차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좌의정 황희(黃喜), 호조판서 안순(安純) 등은 추수기마다 각 도의 고을로 하여금 풍흉을 따져 3등으로 나누어 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답험법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1430년(세종 12)에 세종은 더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자 했다. 세종은 일단 남쪽과 북쪽 지역 간의 수확량 편차를 감안한 정액세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전답(田畓) 1결마다 조(租) 10말을 거두게 하되, 평안도와 함길도는 7말을 거두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중앙의 관리, 각도의 관찰사와 수령, 일반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도록 하였다. 지금의 국민투표와 같은 형식으로 백성들의 의사를 적극 고려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정책의 실시 여부를 물었던 것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참여한 사람은 무려 172,806명에 달했는데, 그 결과는 98,657명 찬성, 74,149명 반대였다. 하지만 과반이 넘었음에도 지역별 의견을 감안해 보면 그 격차가 컸다. 생산성이 좋은 경상도 등에서는 찬성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반면, 토질이 척박하여 생산력이 열악한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강원도, 함길도 등은 반대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국 조정에서도 세액의 형평성이 논란이 되었고, 공법 시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다시 공법이 논의된 시기는 1436년(세종 18)이다. 영의정 황희 등은 각 도의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상(경상, 전라, 충청), 중(경기, 강원, 황해), 하(평안, 함길) 3등으로 나누어 세액을 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관련 사무를 담당할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다. 물론 이후에도 공법은 쉽게 실시되지 못했다. 시행이 결정되었다가 취소되기를 반복하면서 제도 자체의 시행 여부를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그래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관련 내용을 보완하고 다듬어갔다.
1437년(세종 19)에 호조에서는 각 지역별로 토지의 품질을 나누면서도 수전(水田), 한전(旱田)의 토질을 세분화하여 정액 세액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이로써 지역적인 생산량의 차이와 토지의 비옥도에 따른 정액 세제의 내용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는데, 역시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이 무렵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두 가지이다. 우선 지역별 수확량 차이를 어떻게 일정한 세액으로 부과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토질이 척박한 제주(濟州)는 아예 공법을 쓰지 않도록 하되, 우선 농업생산력이 좋은 경상도, 전라도에 공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해 보게 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세액을 정한다고 했지만, 한 도에서도 고을마다 생산량이 현격하게 다른 점을 어떻게 부과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정액 세제를 부과하면 흉년, 홍수 등으로 세금을 낼 수 없거나 하등전을 소유하여 생산력이 불안정한 백성들의 처지를 배려하기 어렵다는 부분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답의 손해가 막대한 집은 면세하였고, 경상, 전라, 충청의 하등전을 대상으로 1결당 2말[斗]씩 감세해주기도 했다.
세제 개혁에 대한 논의는 1443년(세종 25)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면서 더욱 진전되었다. 전제상정소의 도제조는 진양대군(晉陽大君, 수양대군)을, 제조는 하연(河演), 박종우(朴從愚), 정인지(鄭麟趾)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4년(세종 26)에는 경작 토지의 비옥도와 1년 동안의 작황을 모두 고려하는 공법의 기본 골격을 확정할 수 있었다.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반영한 전분6등법과 풍흉에 따른 연분9등법이 핵심 내용이다. 전분6등법은 토질의 차이를 감안하여 수확량에 따라 공평하게 세금을 거두려는 것이고, 연분9등법은 토지 1결에서의 작황이 매년 달라지는 것을 반영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공법을 실시함에 따라 1444년(세종 26)부터 1489년(성종 20)까지 전답을 측량하는 양전(量田)도 행해졌다.
우선 전분6등법은 결부법(結負法)을 반영하여 비옥도에 따라 전답을 6등급으로 나눈 것이다. 기존의 3등급보다는 세분화하였다. 결부법은 절대 면적이 아니라 상대 면적을 고려하는 방식이다. 1등전이 제일 비옥하고 6등전은 가장 척박한데, 동일한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여 1결의 토지 면적을 산정하였다. 따라서 면적 1결은 상대적으로 6등전이 컸다. 다시 말하면, 결부법에서 토지 면적을 재는 단위는 결(結)·부(負)·속(束)·파(把)인데, 곡식 이삭 한 줌이 생산되는 땅을 1파, 10파는 1속, 10속은 1부, 100부는 1결이다. 즉, 결부법에서의 1결은 곡식 1만 줌이 생산되는 토지 면적으로서, 토지가 척박할수록 실제 면적은 상대적으로 더 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분9등법은 매년 농사의 작황 상태를 상상년(上上年), 상중년(上中年), 상하년(上下年), 중상년(中上年), 중중년(中中年), 중하년(中下年), 하상년(下上年), 하중년(下中年), 하하년(下下年) 등의 총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고, 등급에 따라서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차등을 두어 정액을 거두는 것이다. 다만 연분 9등의 구분은 실무자의 재량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는데, 연분 등급의 책정을 군현 단위로 함으로써 실무자의 판단에 공정성을 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훗날 단종대에는 땅의 품질 차이를 적극 고려하여 연분 책정 단위가 군현에서 좀 더 세분화된다.
기존의 답험손실은 작황을 고려하여 세금을 줄여준다는 취지였지만, 각 전답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력, 비용 측면에서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답험에서의 주관적 판단은 농민의 불만을 야기할 뿐 아니라 답험 주체의 비리가 늘어나면서 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공법을 실시함으로써 객관적 기준에 따른 수조권 제도를 확립하여 소농민의 농업 경영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고려 말 이래 증가된 농업생산량을 국가 재정을 흡수할 필요도 있었다. 정액으로 세금을 받을 경우 세수의 안정적인 확보가 가능했다. 더불어 관리들의 중간 부정을 막으려는 노력도 행해졌다.
공법의 시행 과정에서 보이는 세종의 여론 수렴 방식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공법을 실시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를 국왕의 권력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대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였다. 더욱이 실제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는 백성들의 의견까지도 반영하였다. 약 5개월 간 전국 각 도의 백성들에게 정부에서 시행하려고 했던 조세 법령을 미리 공포하고 그 찬반 여부를 묻는다는 것은 매우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다만 공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여전히 관리들의 비리가 그치지 못했고, 현실에서의 결부 계산도 공정하게 행해지지 못하였다는 점이 그 한계로 남았다. 어찌 보면, 기존 답험손실의 폐단을 공법 실시를 통해 없애보려고 했던 목적성 자체가 퇴색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관리의 부정을 줄이고 공평한 과세를 실시하려고 했던 공법의 시행은 분명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세제 개정의 한 흐름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