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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

새로운 토지 제도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다

1391년(공양왕 2) ~ 1466년(세조 12)

1 사회적 배경

고려는 초기부터 전시과(田柴科) 제도를 운용하면서 문·무 양반들과 군인, 향리(鄕吏) 등에게 일정 규모의 토지에서 조세를 걷을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收租權)을 분급하였다. 분급 대상이 되는 토지는 수조지(收租地)라 부르는데, 개인의 신분이나 직역(職役)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배분하였다. 이러한 수조지는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수조지를 받은 이들은 해당 토지에서 국가를 대신하여 조(租)를 받고 그에 상응하는 직역을 담당하였다. 중앙에서는 군인이나 향리를 맡을 이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수조지와 직역을 함께 묶어 관리하고자 하였다. 이에 직역을 담당하던 이가 죽거나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직임을 다할 수 없게 되면 그 직책을 대신할 사람에게 직역은 물론이고 기존에 분급 받은 수조지도 함께 넘겨주도록 하였다. 이를 전정연립(田丁連立)이라 한다.

그런데 직역 담당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겠다는 의도와 달리 전정연립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본질이 흐려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직역과 수조지를 이어받는 이들은 혈연적 관계였고, 그러다보니 수조지는 국가에 역을 지는 대가로 받는 토지가 아니라 상속이나 세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국가를 위해 직역을 담당하지 않으면서 조상이 받았던 수조지에 대한 수조권만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는 직역 담당자들 간 수조지 점유의 불균형은 물론이고 수조권의 남발, 경작자들의 반발 등을 불러오게 되었다. 결국 전시과 운영은 마비되고 수조지 분급 역시 점차 와해되었다.

신분과 직역에 따라 토지를 분급한다는 전시과의 기본 방침이 흔들리게 되면서, 토지를 점유하면서 갖게 된 직역에 대한 의무는 약해지고 토지의 소유 자체에 대한 권리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수조지에 여러 명이 동시에 수조권을 주장하게 되거나, 권력을 이용해 강제로 토지와 경작 농민을 점유하는 등의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자신의 권세와 경제력을 활용해 토지 소유 규모를 늘려가는 데 집중하였다. 이들은 대규모의 농장(農莊)을 형성하고 불법적인 방식으로 점유지에 부과된 토지세나 그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부과된 역(役)을 면제받았다. 농장의 규모는 산이나 하천을 경계로 할 정도로 상당한 것이었다.

전시과 운영이 마비되어 새로운 직역 담당자들에게 적당한 수준의 수조권을 나누어주지 못하는 가운데 기존의 권세가들은 지속적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지배 계층 내부의 불균형이 가중되었다. 또한 재정 수입의 근본이 되는 토지나 양민들이 불법적으로 조세와 역의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국가는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관료들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농장의 확대로 인해 갖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하자 토지를 둘러싼 개혁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 말의 토지 제도 개혁은 일부 계층에 집중된 토지 소유를 혁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토지의 주인들이 수조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이익만 탐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직역 담당자의 안정적인 확보나 조세 수입원의 확충을 위해서 현 상태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269년(원종 10)부터 권문세족에게 탈취, 점유된 토지와 양민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한 임시 기구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전민변정도감은 1388년(우왕 14)까지 총 7차례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면서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방안에 불과하여 농장이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근원적으로 막기는 어려웠다.

무신정권(武臣政權)을 거치면서 전시과의 성격이 변질되고, 1231년(고종 18)부터 30여 년간 지속된 몽고와의 전쟁으로 농경지마저 황폐화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여기에 권문세족들의 농장 개발까지 가속화되면서 고려 사회는 제도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2 토지 제도 개혁안 논의 과정

고려 조정이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했던 전민변정도감은 끝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고, 전시과를 대신하여 시도했던 녹과전(祿科田) 지급 역시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토지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고 느낀 관료들은 일차적으로 농장을 확대하던 권문세족들을 제거함으로써 상징적인 의미로 삼고자 하였다. 이 때 축출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인임(李仁任)을 들 수 있다.

토지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던 관료들이 모두 같은 입장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크게 개선론과 개혁론이라는 두 계열로 나누어졌다. 개선론은 온건파라고 불리는 권근(權近), 이색(李穡) 등이 주축이 되었고, 기존의 수조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토지 점유의 문란함이나 농민층의 피해 상황만을 파악하여 해결하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반면 개혁론은 이성계(李成桂), 조준(趙浚) 등이 주도하며 기존에 분급된 수조지를 모두 회수한 뒤 재분배 할 것을 주장하였다.

두 노선은 논쟁을 지속하다가 1388년(우왕 14) 5월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전면적 개혁론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6월에 우왕(禑王)을 축출하고 창왕(昌王)을 왕으로 세우면서 최영(崔瑩)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토지 제도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의 주요 방향은 사적으로 점유되고 있는 수조지들을 회수하여 국가 수조지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진행된 작업은 전세(田稅) 부과의 대상이 되는 토지를 파악하는 양전(量田)이었다. 새로 개간된 토지나 현재 경작 중인 농지의 면적, 등급 등을 조사하는 작업인데, 남부 6개 도(道)를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 8월에 시작해 1년 뒤에 완료된 이 양전 사업을 기사양전(己巳量田)이라고 부르는데, 이후 과전법을 시행하는 바탕이 되었다.

기사양전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자 조정에서는 새로 수조권을 받을 관료를 선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때 분급되는 수조지는 경기(京畿) 지역으로 한정되었다. 1389년(공양왕 1) 11월, 이성계 세력이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恭讓王)을 왕으로 세운 뒤에도 경기 지역의 토지만을 양반 관료들에게 수조지로 분급한다는 원칙은 유지되었다. 이 때 분급의 대상이 되는 경기 지역의 토지를 과전(科田)이라 하였다. 전국의 토지를 수조권 분급의 대상으로 삼았던 전시과와 달리 경기 지역의 토지만 분급하고자 한 것은 중앙에서 관리하기 수월하고 불법적으로 수조권을 행사하거나 토지 규모를 넓혀가는 것을 감시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권문세족들은 경기 이외의 지역에서도 수조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12월에 이미 관료들에게 경기 지역의 토지를 분급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기사양전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증빙 문서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 9월에는 기존에 활용되고 있던 모든 토지 관련 장부들을 불태우면서 기왕의 토지 수조권을 청산하기에 이르렀다.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 이후 개혁 세력은 경기 지역 이외의 토지를 각 기관과 지방관, 향리 등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 6월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발의된 토지 개혁안은 3년에 걸쳐 추진되면서 1390년(공양왕 2) 말까지 전국의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토지 장부를 불태우면서 기왕의 수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보이고, 양반 관료들에게 지급되는 토지는 경기 지역에만 한정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권신들이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지도 표명하였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고 법제화하는 과정을 거쳐 1391년(공양왕 3) 5월에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는 이듬해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기본적인 토지 제도로 존속하며 계속 유지되었다.

3 과전법의 내용과 의의

과전법은 전국의 모든 토지를 일단 국가의 수조지로 편성한 뒤 수조권을 각 관청에 적절하게 배분하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도 과전을 지급해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료들은 정 1품(品)부터 종 9품에 이르기까지 18과(科)로 나뉘어 각각 다른 규모의 과전을 지급받게 되었다. 가장 높은 1과(科)의 관료는 150결을, 가장 낮은 18과의 관료는 10결을 분급 받았다. 이때의 과전은 경기 지역에 한정되었다. 이후 분급할 토지가 부족하여 1417년(태종 17)에는 일시적으로 과전의 1/3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지급하도록 하였으나 1431년(세종 13)에 다시 해당 과전들을 경기 지역의 토지로 충당하도록 변경하였다. 경기 지역 내의 토지에 한정하여 과전을 분급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과전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농경지인 전지(田地)와 땔나무를 구할 수 있는 시지(柴地)를 함께 지급했던 전시과와 달리 과전법에서는 농지만 분급해 주었다. 전직 관료인 산관(散官)과 현직 관료인 시관(時官)에게 모두 수조권을 주었다는 것은 동일하나, 과전법에서는 관료 본인 세대에 한해서만 수조지를 지급하도록 명시해두어 세습되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과전법 단계에 들어 토지세로 납부해야 하는 액수 역시 크게 감소하였다. 관행적으로 수확량의 절반을 수조권자에게 납부하던 고려 말의 상황에서는 농민들이 과도한 부담을 떠안고 있었다. 이에 수확량의 1/10인 1결당 30두(斗)로 기본 세율을 확정하고 매년 수조권자가 직접 과전에 나아가 작황을 점검한 뒤 세율의 한도 내에서 실제 수취할 수조액을 산정하는 손실답험법(損實踏驗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는 중간착취의 가능성을 없애고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수조권을 분급 받은 이들은 과전을 실제로 경작하는 농민인 전객(佃客)으로부터 1결당 30두를 거둔 뒤, 국가에 2두씩을 납부해야 했다. 이는 국가의 재정에 도움이 됨과 동시에 관료들로 하여금 해당 필지의 근본적인 수조권은 국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방침이었다.

양반 관료가 분급 받은 과전은 본인이 사망하게 되면 원칙적으로 국가에 반납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망 이후에도 해당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수신전(守信田)이나 휼양전(恤養田)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수조권이 존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신전은 관료가 사망한 뒤 홀로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부인에게 분급한 토지였다. 생전에 남편이 받은 과전과 동일한 규모가 지급되었다. 수절(守節)의 대가로 나누어주는 것이었기에 재가(再嫁)할 경우 환수하도록 하였다. 만약 부모가 모두 사망했다면 아버지에게 주어졌던 과전의 절반을 아들에게 지급하였는데 이것이 휼양전이다. 수신전과 휼양전 모두 아들이 20세가 되면 다시 환수하도록 하였다. 관료가 살아있을 때에는 과전을 주고 사후에는 그 가족들에게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조지를 지급한 것이다. 관직 자체는 세습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최소한 신분은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 양반에게 주어지는 과전 이외에도 특별한 공로를 세운 공신들에게 지급된 공신전(功臣田)이나 지방의 한량관(閑良官)에게 분급된 군전(軍田), 향리에게 주어지는 외역전(外役田) 등이 있었다. 이 중 공신전의 경우 초기의 예상과 달리 점차 공신으로 지정되는 인물이 많아지면서 수조지 부족 현상을 부추겼다. 반면 군전이나 외역전과 같이 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지급하고자 했던 수조지들은 점차 직역과 토지 사이의 연관성이 약해지면서 소멸되고 말았다. 더욱이 군전의 경우 처음부터 실제로 군역을 부담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외방의 유력자들에게 지급되고 있어 애초의 목적과 어긋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군전은 과전법 시행 초기에 한 번 성사되는데 그쳤고, 외역전의 경우 1445년(세종 27) 무렵에 대부분 소멸하게 되었다.

과전법을 시행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기사양전을 실시해 전국의 토지를 파악하고 이들을 일차적으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는 국고(國庫) 수조지로 편성한 결과 조선 초 국가 재정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수조권을 위주로 한 토지 지배 방식이 축소되면서 경작권이나 소유권의 행사가 좀 더 자유로워진 측면이 있다. 한편 과전의 분급은 신진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어 개국 초기의 관료체제 정비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4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과전법의 폐지

다수의 수조권자들이 한 필지에서 각기 조세를 수취하면서 발생한 불합리한 상황이나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토지 점유를 확대해가면서 농장을 형성하던 사회적 혼란을 해소했다는 측면에서 과전법의 실시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예견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발생하여 과전법의 본의를 흐리게 되었다.

분급된 수조지는 원칙적으로 대상자가 사망을 하거나 자격을 박탈당할 경우 즉시 회수하도록 되어있었으나, 그 가족에게 수신전이나 휼양전을 지급하다 보니 기존에 받았던 과전이 그대로 수신전 또는 휼양전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잦았다. 결과적으로 과전의 회수는 정체되었고 새로운 관료에게 지급할 과전이 점차 부족해졌다. 정국이 안정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공신이나 관리의 수가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된 것도 한 몫 하였다. 경기 지역에 한정하여 과전을 분급한다는 원칙을 따르다 보니 과전을 마냥 확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414년(태종 14)부터는 수신전과 휼양전의 규모를 축소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럼에도 과전은 여전히 부족하였고 이내 1434년(세종 16)에는 각 기관과 관청의 재원 마련을 위해 설정된 공해전(公廨田)까지 축소, 정리하여 과전으로 활용하였다.

과전법이 애초 의도했던 대로 기존에 분급한 과전이 제대로 회수되고 곧바로 새로운 대상자에게 재분급 되었다면 과전 부족 문제는 다소 완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분급된 토지들을 회수하는 작업은 수월하지 않았다. 사실 과전을 분급하는 방식 자체가 세습을 수월하게 만든 측면이 있었다. 초기에 과전을 나누어 줄 때에는 각 관리의 품계를 고려하여 과(科)를 나누고 해당 면적의 토지를 배분하였다. 그러다보니 각기 분급 받은 토지의 비옥도가 고르지 못하여 불만이 생기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과전을 더 비옥한 토지로 바꿔달라는 요청이 빈번해지자 국가에서는 애초에 관료들이 소유하고 있던 사전을 과전으로 설정하고 그 땅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상이 수조권을 가지고 있던 과전은 그 자손에게 우선적으로 배분되었다. 수조권이 면세권이 되고, 과전이 세습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세습화 경향은 과전뿐만이 아니라 수신전, 휼양전, 공신전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생하였다. 마땅히 토지를 반납해야 함에도 관청의 눈을 피해 수조권을 계속 행사하는 이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물론 규정상으로는 불법적으로 과전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를 적발하기 위한 진고체수법(陳告遞受法)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는 과전을 받은 자가 범죄를 저질러 수조권자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사망 후 가족이 없는 등 수조권을 회수해야 할 경우에 다른 관료가 이를 적발하여 관청에 신고하도록 한 규정이다. 해당 과전은 신고한 관료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분급되었다. 그러나 국가 기관의 관리, 감독이 아니라 개인 간의 신고에 의해서는 불법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과전을 모두 적발해 낼 수 없었다. 더욱이 남의 허물을 적발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거나, 아직 살아있는 수조권자가 사망하기만을 기다리는 등의 행위는 도덕적 측면에서 문제시 되었다. 이에 1417년(태종 17)에는 다른 관료의 신고 대신 해당 관리의 친족이 신고하도록 하고 그 땅은 호조(戶曹)에서 회수한 뒤 직접 다른 사람에게 분급하는 것으로 내용이 변경되었다. 과전제의 운영을 더욱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은폐되어 있는 수조지는 여전히 많았다.

수조권을 받은 관료들이 과전을 직접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부담을 안기는 것 또한 물의를 일으켰다. 과전법의 규정에 따르면 조세는 수확량의 1/10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해당 년도의 작황을 고려하여 수조권자가 직접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의적으로 과세액을 결정하여 기준의 두 배 이상을 바치도록 하거나 수확물 이외에 땔감이나 볏짚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에 1419년(세종 1)부터는 과전의 작황을 판단하는 주체를 수조권자 개인에서 관청으로 변경하였고, 1444년(세종 26)에는 공법(貢法)을 시행하면서 국가가 해당 연도의 풍흉 정도를 결정하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과 개별 토지의 등급을 고려하는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을 통해 고정적으로 세액을 책정하게 되었다.

과전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보완책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과전은 모든 전·현직 관료들에게 지급하기는 턱없이 부족하였고 은폐되어 통제에서 벗어난 토지들은 증가하고 있었다. 결국 1466년(세조 12), 과전법은 폐지되었고 그 대신 현직 관료들에게만 수조권을 분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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