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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약조[己酉約條]

1609년,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를 재개하다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 대표 이미지

한국왕복추요서(韓國往復樞要書) 중 만력기유약조(萬曆己酉約條) 부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기유약조는 1609년(광해군 1) 조선이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강화조약이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막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행사하도록 하였고, 대마도주는 조선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통교를 요청하였다.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국교가 재개되었다.

기유약조의 명칭은 문헌에 따라 ‘기유개정약조(己酉改正約條)’, ‘기유년신정약조(己酉年新定約條)’, ‘송사약조(送使約條)’, ‘만력기유년신정약조(萬曆己酉年新定約條)’ 등으로도 불린다.

2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과 일본

임진왜란은 1598년(선조 31) 11월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조선에 남긴 피해는 극심했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들이 엄청났고,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흉작, 굶주림, 전염병의 고통도 심각했고, 농경지는 황폐해져서 다시 농사를 짓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인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국가는 거의 파탄 지경이었다. 그 결과 조선에는 ‘섬 오랑캐의 침략으로 국토가 파괴되어 이미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야말로 일본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전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모두 대내외적인 상황이 급변하였다. 조선은 사회경제의 근간이 붕괴되었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식되었고, 에도막부 성립으로 집권 세력이 바뀌었다. 게다가 명·청 교체로 인해 동아시아 국제 정세까지 크게 변했다.

조선과 일본은 원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전란 이후 후금(後金)이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일본과의 평화 관계가 필요했고, 일본의 도쿠가와막부는 조선과 통교하기를 원하는 다이묘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외교적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집권체제를 강화해야 했다. 특히,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이 절실했던 만큼 국교 재개가 반드시 필요했다.

3 조선과 일본, 국교를 재개하다

일본에서 강화를 하려는 노력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1599년(선조 32) 7월, 일본은 야나가와 세게노부(柳川調信) 명의의 서계(書契)를 보내왔다. 일본측에서 적극적으로 피로인(被虜人, 포로)을 송환할 것이니, 조선측에서는 사신을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강화 교섭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600년(선조 33)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교권을 장악했고, 이듬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확실하게 실권을 잡았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은 명군 인질을 모두 송환하였고, 조선에 지속적으로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해주기를 요청하였다.

1602년(선조 35) 말에는 도쿠가와로부터 강화 교섭을 일임받은 대마도주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국교 재개를 계속 거부하면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협박성의 논조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에 조선은 유정(惟政, 사명대사)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 즉 ’적을 정탐하는 사신‘이라는 명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도쿠가와를 만나고 일본 정세를 살피고 귀국하였다. 전쟁 중에 잡혀간 피로인 3천여 명도 같이 돌아왔다. 1606년(선조 39) 조선은 화친을 원한다면 일본에서 먼저 화친 요청 국서를 조선에 보내고, 조선 왕릉(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들을 묶어 보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몇 개월 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와 범릉적을 조선에 보내왔다. 이듬해에는 조선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과의 국교는 재개되었다.

4 기유약조의 내용

국교가 재개된 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1609년의 기유약조를 통해 다시 규정되었다. 약조 체결을 위한 준비는 1608년(선조 41) 1월부터 시작되었다. 선조의 명으로 이지완(李志完)이 선위사(宣慰使)로 정해졌고, 일본 사신단을 맞이할 준비가 행해졌다. 1609년 3월에는 겐소(玄蘇), 야나가와 가게나오(柳川景直)를 비롯한 3백여 명의 일본 사신단이 조선에 왔다. 이지완과 일본 사신단은 2개월 후 도항이 예정되어 있던 선박의 접대와 문인(文引, 출입 증명서), 세견선(歲遣船, 일본의 각 지역으로부터 교역을 위해 해마다 도항해 온 선박), 수직(受職), 도서(圖書) 등 통교와 관련한 12∼13조항의 약조를 체결하였다.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그리고 5월에 약간의 조정이 있었다. 세사미두(歲賜米豆, 세종대부터 대마도주에게 매년 내려주던 쌀과 콩)를 100석으로 정했고, 세견선을 25척에서 20척으로 줄였다.

기유약조의 내용은 『통문관지(通文館志)』, 『변례집요(邊例集要)』, 『고사촬요(攷事撮要)』, 『대마도종가문서(對馬島宗家文書)』 등의 여러 사료에 수록되어 있는데, 각기 조문의 수와 내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통문관지』에 13개 조로 되어 있는 기유약조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왜관(倭館) 접대는 국왕사(國王使), 대마도주 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대마도 수직인(對馬島受職人, 대마도인으로서 조선의 관직을 받은 사람)의 세 가지 예(例)가 있다.
2) 국왕사가 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만 허락한다.
3) 대마도주의 세사미두는 모두 100석을 지급한다.
4)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며, 이 중 특송선은 3척이다.
5) 수직인(受職人)은 연 1회 내조(來朝)하고,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없다.
6) 배는 세 등급이 있는데, 승선 인원 25명 이하를 소선(小船), 26~27명을 중선(中船), 28~30명을 대선(大船)이라 한다. 선부(船夫, 뱃사람)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정하며, 정해진 수를 넘을 수 없다. 선체의 크기를 재고 선부가 정해진 수를 넘었는지 점고(點考, 명부에 점을 찍어가며 수효를 조사)한다.
7) 입국하는 일본 배는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소지해야 한다.
8) 대마도주에게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되, 종이에 견본을 찍어 예조·교서관·부산포(釜山浦)에 보관하여 서계(書契, 조선과 대마도가 주고받은 공식 외교문서)가 올 때마다 진위를 살피며 격식을 위배한 자는 되돌려 보낸다.
9) 문인이 없는 사람과 부산포 외의 다른 곳으로 입항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10) 일본 사신이 공적인 업무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갈 때 그 소요되는 기간에 따라 지급하던 식량은 대마도인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 10일분, 국왕사 20일분을 준다.
11) 왜관의 체류 시일은 대마도주 특송 110일, 기타 세견선 85일, 표류인(漂流人)의 송환을 비롯한 기타의 경우는 55일로 제한한다.
12)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대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13) 기타는 전례에 따른다.

5 기유약조의 특징

기유약조는 조선과 일본의 옛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약조 체결 방식을 그대로 따랐고, 이전처럼 약조 체결의 상대도 대마도였다. 물론 대마도주가 일본 막부의 위임을 받아 조선 외교를 전담한 것은 형식상의 문제이고, 실제로는 조선 정부와 일본 도쿠가와막부 간의 조약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일본 막부와의 직접적 통교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일본 내의 권력 투쟁을 좀 더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기유약조의 내용은 조선 전기에 비해 더욱 엄격하고 제한적이다. 우선 교역선의 숫자가 줄었고,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개항장이 부산포 1곳으로 제한되어 동래왜관이 유일한 대일 통교의 장이 되었다. 또한 어떤 경우라도 일본 사신은 한양으로 들어오는 것을 일절 금지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울의 동평관(東平館)도 폐쇄하였다. 일본 사신이 상경하면서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지리 정보가 모두 유출되었던 뼈아픈 경험을 고려한 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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