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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己亥迫害]

최초의 서양인 성직자, 조선에서 순교하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대표 이미지

척사윤음(斥邪綸音)

e뮤지엄(국립고궁박물관)

1 개요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 3월부터 10월까지 자행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말한다. 기해사옥(己亥邪獄) 혹은 기해교난(己亥敎難)이라고도 불린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조선에서 자행된 가장 큰 규모의 천주교 탄압이었다. 신유박해 당시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면서 조선에는 정식 사제가 사라졌다. 이후 조선 천주교도들의 끊임없는 요청으로 1831년(순조 31) 조선대목구가 설치되었고, 1836년(헌종 2) 모방(Maubant ; 나백다록(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면서 조선에 다시 정식 사제에 의한 성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조선 최초로 서양인 신부가 입국하여 성사를 베푼 것이다. 이어 샤스탕(Chastan ; 정아각백(鄭牙各伯)) 신부와 앵베르(Imbert ; 범세형(范世亨)) 주교가 입국하면서 천주교의 교세는 더욱 확장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졌다. 사학인 천주교의 확장에 대한 우려와 정치적 대립 속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3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해 100여 명이 넘는 순교자가 발생한 사건이 바로 기해박해이다.

2 교회 재건 운동과 서양인 성직자의 입국

1801년(순조 1)에는 신유박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도가 순교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에 내방한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은 조선 천주교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일시 위세가 감소했지만, 천주교 재건을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조선 천주교도들은 주문모 신부를 이어 조선에 내방할 성직자 영입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부를 공개된 장소에서 참형에 처하고 그 목을 내걸어둔 조선 정부의 행태 때문에 조선에 들어와 선교를 하겠다는 사제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1816년(순조 16)부터 새롭게 조직된 조선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은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劉進吉), 조신철(趙信喆), 현석문(玄錫文) 등이었다. 이들은 신유박해 이후 조직력을 결속해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고자 힘썼다. 특히, 신유박해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은 중국을 아홉 차례나 넘나들며 외국인 선교사 입국에 매우 큰 노력을 쏟아 부었다. 1827년 9월, 이들의 주도적인 노력에 감동한 교황청과 그 산하의 포교성성(布敎聖省)에서는 선교단체인 파리 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 조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장은 지원하는 사람도 없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제 숫자도 적었기 때문에 조선에 파견할 사제는 바로 정해지지 않았다.

1831년(순조 31)에 이르러서야 시암(Siam) 교구의 보좌주교였던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가 조선 교회의 목자로 자원하면서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 설치가 결정되었다. 조선대목구의 제1대 교구장은 자연히 브뤼기에르로 결정되었다. 1834년(순조 34) 1월 우선 조선인과 유사한 외모를 지닌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조선대교구의 보좌로서, 정하상의 안내로 입국하였다. 유방제 신부는 한양에 마련한 집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준비하였다.

한편, 1832년(순조 32)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출발한 브뤼기에르는 사천성으로 전교하러 가던 모방 신부를 만났다.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에게 함께 조선에 가서 선교할 것을 제안하였고 승인을 받았다. 두 사람은 타타르 지역에서 목자 생활을 하며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1835년 10월, 조선으로 길을 떠나던 중에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결국 불가피하게 모방 신부 홀로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1836년(헌종 2) 1월 모방 신부는 조선인 교우들의 도움으로 서양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월 15일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는 먼저 도착해 있던 유방제 신부, 정하상, 조신철 등과 함께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1836년 12월에는 자크 오노레 샤스탕(Chastan)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1837년 12월에는 제2대 교구장에 임명된 앵베르(Imbert) 주교가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 이후 외국인 성직자들이 속속 입국하며 조선 천주교의 교세는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모방 신부와 2대 교구장 앵베르, 샤스탕 신부의 입국은 조선 천주교의 발전과 사세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천주교의 발전은 조선 당국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가중했다. 조선에 입국한 3명의 외국인 성직자의 힘으로 천주교인들의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김대건(金大建) 등을 중국에 보내 사제 수업을 받게 하는 한편 국내 독실한 신자들을 성직자로 서품하려는 계획도 하였다.

3 기해박해의 정치적 요인

기해박해의 중요한 원인은 이처럼 서양인 선교사의 입국과 교세의 확장에 있었지만, 이 보다 직접적인 박해 원인은 조선 내 두 정권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당시에는 안동김씨를 중심으로 한 시파 세력이 정권을 지녔는데, 벽파 세력은 이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들은 시파의 천주교 옹호 내지 방관이라는 정치적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하였다.

시파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별다른 천주교 박해가 없었던 것은 당시에 천주교도가 다수 피해를 입은 측면도 있었지만, 당시 정국 주도권을 잡은 시파가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벽파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인식하며 매우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시기는 1837년 이후이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안동김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안동김씨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순원왕후의 오빠인 김유근(金逌根)이 정사를 보필하였다. 그러나 1837년 10월 김유근이 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자, 벽파 계열의 이지연(李止淵)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지연은 천주교에 부정적이었고, 천주교에 우호적인 시파 계열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천주교도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지연은 정권을 잡은 동시에 천주교 정책에 대한 매우 부정적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 :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하여, 임금을 인정하지 않는 역적의 사상이라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천주교를 옹호하는 것은 곧 역적이라는 이지연의 상소에 따라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지연은 시파 계열 정치인 중 천주교도인 사람이 체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를 기회로 시파를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려했다. 이지연의 뒤를 이어 사헌부 집의였던 정기화(鄭琦和) 역시 천주교의 원흉을 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1839년(헌종 5) 3월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을 내려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4 기해박해의 전개 과정

1839년 3월에 시작된 박해는 12월이 되어서야 종결되었다. 장장 9개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박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다. 사학토치령이 나오고 처음 천주교인이 체포된 것은 3월 20일이었다. 모두 4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천주교를 배신하고 죄를 면제받은 천주교도는 34명이었다. 남명혁(南明赫), 박희순(朴喜順) 등 9명은 끝까지 남아 천주교를 배신하지 않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후에도 조선 교회의 재건운동에 앞장서서 지도자 역할을 하였던 다수의 인원이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서양인 성직자를 조선에 불러온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도 포함되었다.

이처럼 천주교인의 박해가 심해지자 7월 3일, 한양에서 수원으로 피신했던 조선대목구의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포도청에 스스로 출두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많은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고초를 겪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는 편지를 보내 지방에서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할 것을 권유하였다. 결국 두 신부 역시 충청도에서 손계창(孫啓昌)에게 자수한 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서양인 성직자들은 여러 차례의 고문 끝에 조신철과 정하상의 도움으로 입국하였으며, 현재는 정하상의 도움으로 한양에 머물고 있다고 자백하였다. 그러나 그 외의 수많은 정상에 대해서는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함께 추국을 당한 유진길은 국문 현장에서 자신들이 서양인 선교사를 모셔온 것은 천주교의 의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기 때문에 초빙한 것이지, 결코 서양 세력을 끌어들여 국가를 전복할 목적이 없었다고 강변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3명의 서양인 선교사는 유진길 등과 함께 군영(軍營)에서 참수되었다.

1839년 10월 18일, 조정에서는 천주교 박해를 마무리 지으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였다. 다시는 사학을 끌어와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붙잡혀온 천주교인들의 사형 집행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12월 28일 10명을 처형한 것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5 기해박해의 결과와 영향

기해박해는 신유박해 이후 처음으로 전국적인 박해가 자행된 사건이었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은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와 충청도 등 전국에 걸쳐 있었다. 기해박해의 피해자를 기록한 『기해일기(己亥日記)』에 따르면, 54명이 참수되고, 교수형이나 모진 고초 끝에 사망한 사람이 60여 명에 이르는 등 모두 100여 명이 넘는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기해박해는 수많은 순교자를 발생하게 했지만,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천주교의 세력은 확장되었다. 기해박해로 희생당한 모방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는 김대건(金大建)과 최양업(崔良業) 신부를 중국으로 보내 유학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인 사제를 만나 정통 방식의 천주교 의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렇듯, 기해박해는 신유박해 이후 거의 40년 만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었음에도 이후 천주교의 교세가 보다 확장되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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