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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묘 도굴

개항을 위한 비상 수단인가, 일확천금을 노린 도적떼인가?

1868년(고종 5)

남연군묘 도굴 대표 이미지

남연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1868년(고종 5) 독일 출신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2 오페르트의 1·2차 조선 항해와 도굴 시도의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정세 속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오랫동안 조선이 사대(事大)하고 있었던 청이 아편전쟁으로 인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봉기로 인해 크나큰 위기에 빠지자, 조선 역시 서양의 침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펴 서양 각국과의 통상을 거부하고, 내부의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반면 서구 세력은 중국·일본에 이어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무역·전도 등의 목적을 갖고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하였다.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 역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페르트는 독일 함부르크(Hamburg)에서 태어난 유태인 상인으로서, 일찍부터 홍콩으로 건너와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개항한 이후 나가사키를 왕래하면서 중국 상인들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듣고, 조선과 무역을 하면 전도가 유망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건너가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1866년(고종 3) 조선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제1차 항해는 1866년 3월에 이루어졌다. 오페르트는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 & Co.) 소속의 영국 상인 위탈(Wittall)로부터 당시 상하이(上海)를 출발하여 뉴좡(牛莊)으로 가는 증기선 로나(Rona) 호를 빌려, 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 닷새 동안 조선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의 1차 목적은 조선의 수도, 즉 서울로 가는 큰 강을 발견하여 그곳을 항해해 들어가서 조선의 관헌과 더불어 무역 및 그 밖의 교제를 위한 예비적인 교섭을 하는 것이었다.

오페르트는 3월 24일(이하 모두 양력)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27일 조선 해안에 도착하였고, 28일에는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조금진(調琴津)에 상륙했다. 오페르트는 그를 맞이하러 온 평신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과의 면담에서 자신들은 영국 상인으로서 오로지 교역을 목적으로 왔음을 밝히고, 조선에 우호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김영준은 그의 요청을 조정에 보고하고 회답을 듣는 데 4~6일 정도가 걸린다고 대답하였고, 그만한 시간이 없었던 오페르트는 해미현감 김응집(金膺集)에게 서신을 보내어 통상하지 않으면 각국의 군함이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4월 1일 통상 조약의 체결 및 한강 입구의 발견에 실패하고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1차 항해는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오페르트는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 자신이 조선을 방문한 동안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이화양행의 지원을 받아 제2차 항해를 준비하였다. 그는 조선 해안에 오랫동안 머물기 위하여 증기선 엠페러(Emperor)호를 사들여 소구경 대포를 비롯한 무장을 갖추고, 같은 해 7월 31일에 상하이에서 출항하여 8월 6일에 다시 충청도 해미현에 도착하였다. 그는 다시 교섭에 나선 해미현감 김응집에게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8월 12일에 북쪽으로 항해하여 19일에 한강 하구에 있는 교동도에 도착하였다. 오페르트는 강화유수 이인기(李寅夔)를 비롯한 조선측 지방관들에게 자신의 목적이 통상과 무역에 있음을 전하였으나, 조선 측은 통상 문제는 중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구실로 그의 요구를 끝까지 회피하였다. 오페르트는 더 이상 교섭이 진전되지 않고, 배의 연료인 석탄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한강의 바닥이 얕아서 항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오페르트의 제2차 항해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한강 하구의 위치를 확인하였고, 병인박해로 인해 피신하고 있던 프랑스의 리델(Ridel) 신부의 편지를 받았으며,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하여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및 쇄국정책 등 조선의 정세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오페르트는 1·2차 항해를 통해 조선의 일반인들은 개국을 바라고 있으며, 대원군의 통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즉 대원군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파악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그가 제3차 항해에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시도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3 남연군묘 도굴 시도와 실패 경위

오페르트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에 자신의 항해를 통해 작성한 지도를 제공하는 등 조선이 개항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으나, 프랑스 함대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조선에서 철수하자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오페르트는 1, 2차 항해를 감행하였다가 실패한 이후 빈털터리가 되었기 때문에 병인양요 이후 2년간 재차 조선에 관계된 행동에 나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을 개국시키겠다는 생각, 그리고 조선의 개항을 방해하는 것이 대원군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 불을 붙인 것이 병인양요 당시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이었다. 그는 천주교 탄압 이전부터 대원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병인박해가 시작되어 가까스로 탈출한 이후 이러한 태도는 더욱 강해졌다. 오페르트는 페롱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를 통해 조선의 정세에 관한 소식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었으며, 서구 열강이 조선에 개입하여 조선을 개항시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해를 피해 조선에서 탈출하여 상하이·옌타이(煙臺) 지역에 살던 최선일(崔善一) 등 천주교도들이 페롱에게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 부장품을 탈취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들은 페롱은 오페르트에게 조선의 개항을 위해 한 번 더 항해할 의향이 있는지 묻고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부장품을 획득한 뒤, 이것을 가지고 대원군과 협상하여 조선의 개항을 성사시킬 것을 제안하였고, 오페르트는 며칠 동안의 검토 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흥선 대원군이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吉地)에 이장하였으며, 무덤을 쓰기 위해 원래 있던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는 소문은 민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청에 도망가 있던 천주교인들 및 조선에 오랫동안 체류했던 페롱 역시 이러한 소문을 알고,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면 대원군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에 동참해 줄 것을 오페르트에게 제안하게 되었다. 오페르트 역시 조선이 개항하지 않는 원인 및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가 대원군에게 있다고 보았으므로, 대원군에게 압력을 넣을 좋은 수단으로서 남연군묘 도굴에 나서기로 하였다. 오페르트에게 이번 항해는 조선을 개항시키려는 그의 숙원을 이룰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오페르트는 함부르크 회사인 선신양행(禪臣洋行, Siemssen & Co.)에서 648톤 증기선 차이나(China) 호를 빌리고, 그 대가로 조선과의 교역에서 얻은 수익의 일부를 주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60톤 소형 증기선 그레타(Greta) 호를 확보하여 수로를 통해 남연군묘에 접근할 준비를 갖추었다. 또한 유럽 선원 10여 명, 마닐라인 선원 25명, 중국인 선원 및 잡역부 100여 명을 고용하여 항해를 준비하였다.

오페르트는 아울러 새로운 조력자로 상하이 미국 총영사관의 통역을 지낸 미국인 젠킨스(Fredrich B. Jenkins)를 설득하였다. 젠킨스는 오페르트에게 은 5천 냥을 빌려주었고, 이 돈은 배를 빌리는 데 필요한 지불금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젠킨스는 중국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전적인 조력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조력도 기대할 수 있었다.

오페르트와 페롱, 젠킨스 일행은 고용한 선원들 및 길을 안내해 줄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데리고 1868년(고종 5) 4월 30일에 상하이를 출항하여 원정에 나섰다. 이들의 배는 오페르트의 국적이 있는 북독일 연방의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동자인 오페르트, 페롱, 젠킨스 3명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항해의 목적지가 어디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도중에 나가사키에 들러 석탄과 음료수를 보급하고, 무기로 쓸 소총 10상자를 사들였다.

오페르트 일행이 조선에 들어온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오페르트의 여행기와 미국 영사재판 진술기록, 조선측 보고서의 내용이 각각 서로 상충된다. 오페르트와 선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5월 8일 밤 10시 이들은 아산만으로 들어왔고, 이튿날 오전 10시에는 충청도 홍주의 행담도(行擔島)에 이르렀다. 5월 10일 새벽에 젠킨스와 차이나 호의 선장을 포함한 일부는 차이나 호에 남고, 오페르트와 페롱을 비롯한 수십 명은 오페르트의 지휘 하에 총기를 지급받은 뒤 그레타 호로 갈아타고 삽교천(揷橋川)을 거슬러 올라가 구만포(九萬浦)를 향해 출발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만조(滿潮)를 이용해 최대한 깊숙이까지 그레타 호를 타고 접근하여 빠른 시간 내에 남연군묘에 도착, 도굴을 끝마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레타 호가 수차례 좌초하면서 이미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오전 11시경에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묘가 있는 덕산읍 가야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길잡이인 조선인 천주교도가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너무 짧게 계산한 나머지, 예상보다 4시간이나 늦은 오후 5시 30분경에 남연군묘에 도착하였다. 삽 4자루를 제외한 어떤 중장비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오페르트 일행은 현지에서 도구를 구하여 묘를 파헤치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다섯 시간 동안 파헤친 뒤 묘 입구를 막은 돌덩어리가 나오자 도굴을 포기하고 간조 시간이 오기 전에 황급히 그레타 호로 철수하였다. 이후 그레타 호는 삽교천을 빠져나와 다시 차이나 호와 합류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이 이 과정에서 조선측과 교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양쪽의 기록이 엇갈린다. 공충감사(公忠監司) 민치상(閔致庠)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구만포에 상륙한 오페르트 일행 100여 명은 러시아 사람이라고 칭하며 군복을 입고 창, 칼, 총 등을 가지고 덕산군 관청으로 들이닥쳐 무기를 빼앗고 관청 건물을 파괴하였으며, 이들이 남연군묘로 향하자 덕산군수 이종신은 아전, 군교, 군노, 사령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저항하였으나 우월한 무력 앞에 대적하지 못하여 도굴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반면 오페르트의 증언 및 미국 영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남연군묘를 향해 직행하다가 조선 군병들의 저지에 맞닥뜨렸으나, 간단한 위협만으로 물리치고 행로를 재촉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동행했던 선원들은 조선에서 위협사격을 제외한 어떤 교전도 하지 않았으며, 오페르트와 동행한 중국인 잡역부들은 총을 쏠 줄 몰랐고, 총을 지급받을 때도 실제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갖고만 있으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든 오페르트 일행이 간조·만조 시간을 의식하여 신속히 이동하였고,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체재하였으며, 조선측이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빠져나간 것은 분명하다. 보고를 받은 공충감사 민치상은 그의 감영(監營)에 있는 별초군관(別抄軍官) 50명, 군뢰(軍牢) 30명과 우병영(右兵營) 소속 군졸 20명에게 각기 무기를 주고 공주 영장(公州營將) 조희철(趙羲轍)로 하여금 그들을 통솔하여 급속히 가야동(伽倻洞) 경내로 향하게 하였고, 사수(射手)와 포수(砲手)를 계속 모집하여 뒤따라 보내도록 하였으며, 홍주(洪州)와 해미에서도 급히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오페르트 일행은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나간 뒤였다.

4 최후의 교섭과 총격전, 철수

오페르트 일행의 도굴 시도는 준비 부족 등의 요인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그 행위의 여파는 컸다. 보고를 통해 오페르트 일행의 침입 및 도굴 미수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조정은 크게 놀라 즉각 대응 조치를 강구하였다. 한편으로는 홍주목사(洪州牧使) 한응필(韓應弼)로 하여금 남연군묘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고하게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침입자들을 격퇴할 방책을 세우는 데 골몰하였다.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의 부친이자 현재 국왕인 고종의 조부였으므로, 조선 조정으로서는 이 사건을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도굴에 실패한 오페르트는 페롱과의 상의 끝에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선과 교섭하기로 마음먹고, 뱃머리를 돌려 북상하여 5월 13일에 영종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5월 14일 영종첨사(永宗僉使) 신효철(申孝哲)이 중군(中軍) 이보능(李輔能)을 파견하여 내항한 이유를 묻자, 오페르트는 대원군 앞으로 서신을 보내어 “아리망(亞里莽, Allemagne: 독일)” 수군 제독을 자칭하면서 자신들이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고자 한 것은 비록 무례한 짓이지만 백성들을 해치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므로 부득이하게 취한 조치라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으며, 자신들이 도굴에 성공하여 남연군의 관을 가지고 올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나친 것 같아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4일 안에 사신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들은 철수하겠지만 몇 달 안에 조선 역시 침략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나름의 조약안을 작성하여 조선에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영종첨사 신효철의 명의로 강경한 내용의 답신을 보내어 오페르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답신은 두 나라 사이에는 원래 교류도 없고 원수진 일도 없었는데 이번에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였으니, 조선과 귀국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되었음을 천명하였으며, 앞으로 전함을 끌고 쳐들어오더라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다. 또한 이번 침략을 천주교도들이 부추긴 것으로 비난하였다. 오페르트가 시도한 최후의 교섭은 결렬된 것이다.

이후 오페르트는 5월 17일에 페롱 및 20여 명의 선원들을 거느리고 영종도에 상륙하였다가 조선측과 사소한 충돌을 일으켰고, 조선군의 공격을 받아 2명의 마닐라 출신 선원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고 철수, 상하이로 돌아갔다.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 및 제3차 조선 항해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5 사후 처리 및 이후의 영향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는 비교적 짧은 시일 동안 이루어진 해프닝이었지만, 이 사건은 여러 방면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재차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사건 직후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은 서양 오랑캐들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 부추기고 호응한 결과일 것인데, 천주교도들을 다스린 지 이미 3, 4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이들을 모두 소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천주교도들의 탈출을 후원하였던 사간원 정언 조철증(趙喆增)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그는 자결하였고,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의 아들 이신규(李身逵)와 손자 이재의(李在誼) 등이 체포되어 있다가 이때 처형되었다. 또한 오페르트가 수차 내항했던 내포(內浦) 일대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청에 자문(咨文)·주문(奏文)을 보내어 사건의 전말을 알림과 함께 청에 도망친 천주교도들을 체포하여 압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청에서도 천주교도들의 체포를 지시했으며, 영국·미국·독일의 영사들에게 공문을 보냈음을 조선에 알려왔다.

오페르트 일행이 아직 개항하지 않은 조선에 침입하여 왕족의 묘를 도굴하려고 했다는 소식은 중국에 주재하던 서양인들 사이에서 일대 큰 화제를 일으켰다. 특히 스페인 영사는 조선에서 피살된 선원이 자국이 관할하는 마닐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책임소재를 규명하기 위해 프러시아 영사에게 사안을 제소할 것이라는 풍문이 도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스페인 영사는 함부르크 공사관에 필리핀인들의 사망 및 부당한 처우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조선으로부터 도굴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청에서도 서양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어 사안의 처리를 요청하였다. 따라서 남연군묘 도굴 사건은 사건의 피해자인 조선 및 그 종주국이자 대리자로서 서양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청, 그리고 오페르트의 고국 함부르크, 젠킨스의 고국 미국, 페롱의 고국 프랑스, 차이나 호의 선적이 있는 프로이센을 포함한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젠킨스의 모국이자 제너럴셔먼호 사건 등으로 인해 조선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측은 이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젠킨스를 도굴에 가담한 혐의로 고소하여 영사재판을 열었다. 그러나 젠킨스는 자신이 자금을 지원했을 뿐 조선에서 오페르트와 페롱 일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으며, 오페르트를 비롯한 다른 이들 역시 젠킨스가 조선에서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가 없다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젠킨스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반면 배의 선적이 속한 프로이센 영사는 선장 및 선원들이 전혀 음모에 관여한 바 없으며, 사건의 주모자들이 프로이센 소속이 아닌 데다, 차이나 호에는 북독일연방의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혐의사실이 없다고 해명하였다. 또한 프랑스 영사는 페롱과 선주·선원이 모두 무죄라고 주장하였으며, 상하이에 있는 최선일(崔善一) 등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청 관헌의 체포로부터 보호하며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힘입어 페롱 및 조선인 천주교도들은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페롱은 본국 프랑스에 돌아갔다가 1870년 인도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30년간 봉직하였다.

한편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사실을 시인하고, 그를 조사하여 응분의 처분을 가할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실제로 오페르트는 함부르크에 돌아가서 재판을 받았고, 그 결과 유죄가 확정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오페르트는 함부르크에서 상인으로서 여생을 보냈으며, 조선에 대한 관심을 저술을 통해 드러내었다. 그는 조선에서의 경험담을 포함한 『금단의 나라: 한국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1880년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책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그의 저술은 유명한 『하멜표류기』와 함께 서양인이 바라본 조선의 다양한 측면을 전해주는 사료로서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러시아가 조만간 조선을 세력권에 넣을 것으로 보았다.

1898년에는 인도·중국·일본·한국에 대한 또 다른 책인 『동아시아 견문기: 인도·중국·일본·한국의 모습과 회상(Ostasiatische Wanderungen: Skizzen und Erinnerungen aus Indien, China, Japan und Korea)』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는 개항 이후 아관파천에 이르는 조선의 정세를 간단히 설명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전쟁을 치를 것이며, 일본이 영국의 지원을 받아 우세를 점할 것이라고 적확히 예측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조선 민족이 또 다시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이라 평하였다. 그는 1903년 함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사건의 주동자인 오페르트가 자신의 말대로 조선의 개국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위해 도굴이라는 비상수단을 취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를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오페르트에게 진정성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오페르트의 행동은 그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시도는 목표와는 달리 조선인들에게 서양은 남의 무덤을 파는 야만인이라는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따라서 조선의 개항을 늦추는 데 공헌한 셈이 되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촉발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겠다는 오페르트의 또 다른 목적 역시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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