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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사건[鹿屯島事件]

1587년, 여진족이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를 공격하다

1587년(선조 20)

녹둔도사건 대표 이미지

함북 경흥 이충무공승전대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녹둔도사건은 1587년(선조 20)에 여진족이 녹둔도를 침략한 사건이다. 당시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은 군대를 인솔하여 녹둔도에서 가을 추수를 하고 있다가 침략한 여진족과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녹둔도 사건에 대해서는 관련 사료가 많지 않다. 기록은 한정되어 있고, 기록 간에 내용상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당시 이순신의 활약에 대해서도 임진왜란 이후의 활약상에 비해 매우 소략한 기록만 있다. 그런데 최근 녹둔도에 대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북한, 러시아도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60년(철종 11)에 영국과 청 사이의 베이징조약으로 녹둔도가 포함된 연해주 지역이 조선의 의사 결정 없이 러시아 땅으로 넘겨졌기 때문에, 우리의 잃어버린 옛 영토에 대한 학문적 탐색이 행해지고 있다.

2 조선과 여진 그리고 명

여진은 금(金, 1115∼1234) 멸망 이후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요동과 만주에 흩어져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위쪽에 분포하고 있던 오도리(斡朶里), 우량하(兀良哈), 우디거(兀狄哈) 등이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중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에 대해 조선은 번리(藩籬), 번병(藩屛) 등으로 이해하여 통치할 대상으로 여겼다.

16세기 이전에 조선은 여진에 대해서 교린(交隣) 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 지역 이남의 여진에 대해 동화정책을 시행하였고, 동북면 밖의 여진에게도 관직을 수여하는 등의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태종대에 들어서는 태조대만큼 관계가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1406년(태종 6)에는 함경도의 경성(鏡城)과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여 시장 거래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진은 종종 조선의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적 마찰이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세종은 4군 6진(四郡六鎭)을 개척하여 여진 세력을 압박하였고, 1467년(세조 13)에는 조선과 명이 함께 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주변의 건주여진 부족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여진은 점차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에는 조선에 노골적으로 반발하였다. 이후 조선은 여진에 대해 소극적인 대응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3 녹둔도는 어떤 섬인가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었던 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사차마도(沙次亇島, 沙次磨島, 沙次麻島), 사혈마도(沙泬麻島)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두만강 하구에는 녹둔도 외에 적도(赤島), 마전도(麻田島), 추도(楸島), 난도(卵島)가 더 있었다. 이 지역은 여진과의 관계에서 두만강 가의 우디거와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군사 요충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녹둔도에 대해 “〈경흥도호〉부의 남쪽 56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는 1, 247척, 높이 6척이다.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조산포(造山浦)까지가 20리인데, 병선(兵船)이 있고 조산만호(造山萬戶)가 이를 관장한다. 여름에는 본포의 수군이 여기에 나누어 주둔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시대 6진 개척 이후 녹둔도는 함경도 경흥도호부 조산만호가 관장하였는데, 관방(關防, 국경의 요새)인 조산보(造山堡)에 섬인 녹둔도가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여진족의 약탈을 방지하고자 녹둔도의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가 종종 내려지기도 했다.

녹둔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국경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녹둔도농보(鹿屯島農堡)라는 표기도 보인다. 녹둔도의 농토가 비옥하여 조산보 군민이 녹둔도로 들어가 살기도 했다. 성종대에는 조산보를 녹둔도로 이설(移設)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선조대에는 정언신(鄭彦信)의 제안으로 녹둔도에 둔전(屯田)을 설정하고 경흥부사로 하여금 대대적인 개간사업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러나 녹둔도 사건 이후 병조판서의 직에 있었던 정언신은 자신으로부터 발의된 개간 추진이 여진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면서 자책하였다.

4 녹둔도사건의 전개 과정

녹둔도사건에 대한 서술은 사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여러 사료를 조합하여 녹둔도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선조수정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녹둔도의 둔전은 흉년으로 수확이 좋지 않았는데, 마침 조산보 만호 이순신에게 녹둔도를 경영하게 하자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 조산보 만호 이순신이 군리(軍吏)를 모아 추수를 감독하였다. 그런데 이때 추도(楸島)의 여진 추장[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공격하였고, 우리측 10여 인을 살해하고, 160인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다. 여진족의 마니응개도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지만, 조선 측의 피해가 너무 컸다.

『제승방략(制勝方略)』에는 당시 전투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니응개와 사송아(沙送阿) 등이 녹둔도의 방어가 고립되고 약한 것을 보고 농민들이 들판에 나가 흩어져서 일할 때 여러 여진족을 규합하여 쳐들어와 약탈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지만, 둔전 목책을 뚫고 약탈하는 여진족을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추장 마니응개를 이몽서가 화살로 쏘아 죽여서 여진의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에 이순신과 이경록이 그들의 뒤를 공격하여 농민 50여 명을 되찾아 돌아왔고, 적 3인의 머리를 베었으며, 말 1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뒤이어 겨울에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 등과 함께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도(楸島)를 습격하여 적 33명을 죽였다.

1762년(영조 38)에 함경도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 이순신의 업적을 기려 세운 승전대비(勝戰臺碑)에는 이순신이 진(鎭)에서 북쪽으로 3리 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를 방어하며 적이 오가는 길목에 병사를 매복시켰고, 날이 저물어 적이 돌아가는 틈을 노려 습격하여 이후 적이 접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전투 양상이 다른 사료와 다르게 기술되어 있어 주목된다.

한편,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한 이후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는데, 이로부터 그가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실록』이나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다른 전거 기록을 보면, 우을기내를 잡아 죽인 사실이 녹둔도 사건 이전인 1583년(선조 16)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이순신의 행적으로 언급되지 않기도 한다.

5 녹둔도와 이순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순신에 대해서 임진왜란 시기 해상에서의 활약을 주목한다. 상대적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북방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신은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합격한 후 첫 부임지가 함경도였다. 그 후에는 훈련원과 충청도 병영 등지로 임지를 옮겨 다니다가 1583년(선조 16)에 함경도의 군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부친의 삼년상을 치른 후 1586년(선조 19)에 복직하였는데, 이때의 관직이 조산보 만호였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기록된 조산보 만호 무렵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조산보 만호가 된 이듬해인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의 둔전 경영 임무를 겸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병마절도사 이일에게 군사의 보강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얼마 후 8월에 여진족이 침입하였다. 이때 아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병마절도사 이일이 자신의 착오를 무마하고자 이순신을 수감시킨 후 형벌을 가해 죽이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백의종군하도록 하였고, 그해 겨울에 공을 세우자 사면하였다. 그는 이후 조방장(助防將), 정읍 현감, 평안도 강계의 고사리(高沙里) 첨사(僉使)와 만포(滿浦) 첨사 등을 역임하였고, 1591년(선조 24)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6 조선 후기 이후의 녹둔도

조선 후기에는 녹둔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점차 감소하였다. 광해군대에는 후금이 성장함에 따라 녹둔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녹둔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줄어들었다. 게다가 청 건국 이후 두만강을 넘어 녹둔도를 침략하려는 세력도 사라졌다. 이후 녹둔도는 개간이 되지 않아 황무지로 방치되었고, 군사시설로도 활용되지 않았다. 19세기에는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퇴적되어 녹둔도는 육지와 연결되었다.

1860년(철종 11)에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사건)의 결과 베이징조약이 맺어졌는데, 이때 녹둔도를 포함하는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에 넘겨졌다. 이 조치에서 조선 정부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후 수차례 반환 노력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 있다. 현재 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라고 불리는 러시아 영토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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