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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260여 년간 이어진 평화의 시대

미상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 대표 이미지

교정대일본원비도(校正大日本圓備圖, 1702)

울산박물관

1 개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뒤,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더욱이 히데요시 사후 일본은 국내적으로도 다시금 전란에 접어들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한 뒤, 에도 막부(江戶幕府) 즉 도쿠가와 막부를 수립하고 도요토미 정권을 멸망시켰다.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의 통치하에 이후 260여 년 동안 국내외적 평화가 이어졌기에 이 시기를 가리켜 이른바 팍스 도쿠가와나(Pax Tokugawana)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도쿠가와 가문의 출자

도쿠가와 가문의 전신이었던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은 본래 강력한 전국 다이묘(戰國大名)들의 틈바구니에 낀 미카와(三河, 현재의 아이치현 동부) 지역의 군소 영주였다. 더욱이 이에야스의 조부와 부친 모두 가신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세력이 더할 나위 없이 위축되었을 때 태어난 이에야스는 유년 시절부터 인근의 오다(織田), 이마가와(今川) 가문에 인질로 보내어지는 처지였다. 이마가와 가문 밑에서 관례를 치른 직후,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를 딴 모토노부(元信)를 칭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당시 마쓰다이라 가문이 처해 있던 현실을 알 수 있다.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에 대한 이마가와 가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모토노부는 모토야스(元康)로 개명하였다.

이마가와 가문에 예속되어 있던 모토야스의 처지는 1560년의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기습으로 피살되면서 전환을 맞이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모토야스는 미카와로 돌아와 자립을 선언하였으며, 머지않아 이에야스로 개명하여 이마가와 가문과 완전한 단절을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협력하여 그의 정복사업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으며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미카와를 통일한 뒤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아 도쿠가와(德川)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는 이마가와 세력을 양쪽에서 같이 공격하던 다케다(武田) 가문이 침공해와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하였지만, 1575년에 오다 가문과 연합하여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1581년에는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 과거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 모두를 손에 넣었다.

한편 1582년에 벌어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變)으로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뒤, 일본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노부나가의 정치적 파트너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상하관계에 있었던 이에야스에게도 당시의 요동치는 정국은 일본의 패권을 넘볼 기회로 다가왔으나, 그보다 먼저 기회를 잡은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노부나가의 아들 중 도쿠가와 가문이 지지하던 노부카쓰(信雄)가 히데요시에게 회유되면서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결국 외교전에서 패하여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히데요시에 다음가는 2인자 자리에 만족해야만 하였다.

3 히데요시 사후의 정국

전국시대의 통일에 기여한 세 인물을 두고 ‘오다(노부나가)가 반죽하고 하시바(羽柴, 히데요시)가 지은 떡, 그것을 먹은 이는 도쿠가와(이에야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울지 않는 새’가 있다면 곧바로 죽이는 노부나가, 울 때까지 달래는 히데요시, 울 때까지 기다리는 이에야스라는 인물평도 유명하다. 자신을 굽히고 후일을 도모하던 이에야스에게 1598년에 드디어 히데요시의 죽음이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임진왜란 때에도 이에야스는 간토(關東)로 영지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병력 동원을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의 유력 다이묘로 구성된 고다이로(五大老)의 필두에 해당하는 지위였으며, 더욱이 히데요시 사후부터 주요 다이묘들과 혼인을 통해 은밀히 결속을 다져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중 행정관료인 고부교(五奉行)을 중심으로 한 문치파(文治派)와 임진왜란의 참전 무장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파(武將派) 간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에야스는 중재자의 입장에 서서 무장파 측을 회유하고 문치파 측의 실권을 회수하는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세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에야스의 움직임을 가장 경계하던 이는 문치파의 중심에 서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였다. 그러나 당시 무장파의 살해 위협을 받았던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에게 구명을 요청하였으며, 그 대신 실권을 반납하고 오미(近江, 현재의 시가현)에 있는 자신의 거성에 칩거한 상황이었다. 무장파 다이묘들을 회유하며 세를 불리고 있던 이에야스의 야심을 경계한 미쓰나리는 다른 고부교와 고다이로들을 규합하여 이에야스에게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결국 1600년에 일본 전역의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양분되어 격돌한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가 벌어졌다. 초기 전황은 전장에 늦게 도달한 데다가 이에야스의 주력군이 참전하지 못한 동군이 불리한 판국이었다. 그러나 사전에 서군을 배반하기로 밀약하였던 다이묘들이 서군 측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어 결국은 동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미쓰나리는 탈주 중에 생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서군 측에 가담한 다이묘들은 영지를 대거 몰수당하였다.

4 도쿠가와 막부의 수립

도요토미 정권의 내분으로 시작된 세키가하라 전투였지만, 승리의 주역이자 새로운 권력의 중추로 부상한 이는 이에야스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만 참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논공행상 과정에서 도요토미 가문 휘하의 무장파 다이묘들에게 대규모의 영지를 하사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히데요시의 아들이었던 히데요리(秀賴)에게 여전히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으며, 이에야스 또한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을 섬기는 입장이었다. 이에야스가 막부를 창설한 이유가 바로 도요토미 가문을 정점으로 한 상하관계를 유명무실화하고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를 편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1603년에 막부를 창립한 뒤, 2년 만에 쇼군직을 셋째 아들인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大御所)로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또한 도요토미 가문과의 상대적 지위를 고려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지만, 히데요리가 장차 성장해서 과거 히데요시가 올랐던 간파쿠(關白) 직을 이어받게 되면 조정의 우두머리가 되어 무사들의 정점에 선 이에야스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히데타다의 어린 딸과 히데요리가 1603년에 혼인한 상황에서 자신은 물러나고 히데타다를 쇼군으로 세운다면, 히데요리가 성장해서 간파쿠 직을 이어도 자신이 가부장적 질서를 통해 히데요리와 히데타다의 후견인으로서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부에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낭인이 된 세력이 히데요리를 구심점으로 삼아 다시금 항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불안 요소로 남아있었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남긴 난공불락의 오사카성(大坂城)과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는 반(反) 도쿠가와 세력의 결집을 실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소진시키고자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한 호코지(方廣寺)의 재건을 히데요리에게 권유하였다. 그리고는 재건한 절의 범종에 새겨진 ‘국가안강(國家安康) 군신풍락(君臣豐樂)’이라는 글귀가 ‘이에야스(家康)를 쪼개면 나라가 평안하다’, 그리고 ‘도요토미(豐臣)가 군주가 되니 즐겁다’는 저주를 퍼부은 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도요토미 가문 측에게 인질 파견 혹은 영지 교체를 요구하였다. 히데요리 측이 이에 불응하자 이에야스는 1614년에 전국의 다이묘를 동원하여 오사카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장기전으로 치닫자 성의 외부 해자를 메우는 조건으로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 측은 합의를 어기고 성의 내부 해자까지 메워버렸으며, 이에 히데요리 측이 항의하자 이듬해 오사카성을 재차 공격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전국시대부터 이어진 기나긴 전란의 세월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무가와 공가에 대한 통제

흔히 막번제(幕藩制)라고 부르는 에도 시대의 통치구조는 중앙의 막부와 지방 다이묘들의 영지 및 지배기구로 구성된 연합 체제였다. 막부는 전국 2800만 석(石)의 토지 중에서 400만 석 가량을 직할지로, 그리고 300만 석 가량을 직속 무사인 하타모토(旗本)의 영지로 삼고 있었으나, 지방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거느린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함락시킨 뒤 다이묘들을 소집하여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반포함으로써 다이묘를 비롯한 무사들에게 적용할 규범을 마련하였다. 이는 쇼군과 다이묘 간의 관계가 사적인 주종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변화한 것을 뜻한다. 이후 막부는 무가제법도에 기반하여 지시를 위반한 다이묘의 영지 몰수나 삭감, 혹은 이전을 단행하였다. 게다가 무가제법도 조항에 포함된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은 다이묘의 영지 내에서 하나의 거성을 제외한 모든 지성(枝城)을 파괴하도록 명한 것으로, 다이묘들이 막부에 대항할 군사적 거점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후 무가제법도는 새로운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개정 반포되었다. 1635년에 막부가 공식적으로 의무화한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는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거주시켜 인질로 삼고, 다이묘 자신은 에도의 저택과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게 함으로써 견제를 꾀한 조치였다. 참근교대는 매년 에도와 영지를 왕복하는 다이묘에게 막대한 경제적 지출을 요구하는 것이었지만, 다이묘와 그 수행원들이 이동하고 체재하는 과정에서 에도라는 신도시의 성장과 일본 각지의 교통 발달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조정에 대해서도 막부는 1613년에 공가중법도(公家衆法度)를, 이어서 1615년에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를 반포하여 천황 및 귀족의 역할과 행동규범 등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조정 귀족 중에서 막부와 소통하는 부케덴소(武家傳奏)를 2인 임명하고, 교토의 시정을 담당하는 막부 휘하의 관리인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를 통해 조정을 간접으로 규제하였다. 또 막부는 1627년에 천황이 무분별하게 선종 승려들에게 최고위의 상징인 자의(紫衣)를 하사함으로써 지위를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칙허자의(勅許紫衣)의 법도를 제정하였는데, 1629년에 이를 어긴 천황을 힐문한 자의 사건(紫衣事件)을 일으켰다. 반면 조정에 대한 막부의 경제적 지원은 이후 학문의 발전과 옛 의례의 복원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6 막부 통치체제의 정비

에도막부를 창설한 초대 쇼군 이에야스는 16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슨푸(駿府, 현재 시즈오카시)에서 사망한 그는 인근의 구노잔(久能山)에 매장한 뒤 작은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도록 유언을 남겼으나, 이듬해 막부는 닛코(日光)에 대규모의 사당을 조성하고 이에야스의 시신을 이장하였다. 이어서 조정을 설득하여 이에야스에게 도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는 신호(神號)를 부여하였다. 도쇼다이곤겐의 신격화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재임 1623~1651)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조부에 대한 숭배의식이 강했던 이에미쓰는 닛코의 사당을 호화롭게 중건한 뒤, 1645년에는 조정으로부터 궁호(宮號)를 하사받아 닛코도쇼구(日光東照宮)로 개명하였다. 이에미쓰 시기와 그의 사후에 파견된 세 차례의 조선통신사가 이례적으로 닛코도쇼구에 참배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두 도쇼다이곤겐의 신적 권위를 통하여 쇼군과 막부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막부의 통치 질서 또한 이에미쓰의 치세에 한층 체계화되었다. 이에미쓰는 막부 권력 강화에 열의를 지니고 있었지만 병약했기에, 그의 건강 상태에 따라 정책의 최종 결정에 종종 공백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본래 쇼군을 보좌하여 막부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위직인 로주(老中)들의 합의를 통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체제가 성립하였으며, 나아가 로주들이 달마다 교대로 막부의 정무를 책임지는 쓰키반제(月番制)가 도입되었다. 이는 막부의 정치가 쇼군 1인의 결정에 의존하는 체제에서 로주 합의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의 방향으로 변화하였음을 뜻한다.

한편 1638년에 벌어진 대규모 농민반란이자 기독교도들의 항거였던 시마바라(島原)의 난, 1640년부터 1643년에 걸쳐 발생한 간에이(寬永)의 대기근은 막부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다.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백성에게 사치를 금하고 생업에 힘쓸 것을 명하는 32개 조항인 게이안오후레가키(慶安御觸書)가 이 무렵 반포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이 시기 막부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민생을 챙기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부는 다이묘들에게도 사치와 백성 수탈을 금하며 선정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다이묘들 또한 마찬가지로 이 시기부터 이른바 영지 내의 정무 개혁에 착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7 기독교 금제와 나가사키 통제

도요토미 정권과 마찬가지로, 본래 막부는 기독교는 통제하되 서양과의 무역은 장려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바다를 건너오기 시작한 영국과 네덜란드 등 신교 국가들은 기존에 일본과 교류하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독교 포교가 침략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모함하였다. 이리하여 1612년부터 막부는 직할지를 중심으로 기독교 금교령을 선포하였으며, 신도에게 개종을 강요하였다. 1622년에 막부가 55인의 선교사와 신도들을 처형한 겐나(元和)의 대순교를 일으킨 이후, 기독교에 대한 막부의 탄압 정책이 확실해지자 기독교도들은 음지로 숨어들어 은밀히 신앙을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규슈(九州) 지역은 전국시대부터 기독교도 다이묘들이 서양과의 교류를 확대하기 위하여 포교를 후원하던 지역이었다. 더욱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새로이 영지를 하사받아 규슈로 입성한 다이묘들은 백성들에게 무지막지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에도 시대 최대의 농민반란이자 기독교도들의 마지막 항거였던 시마바라의 난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었다.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시마바라의 반란군을 철저히 진압한 뒤, 막부는 기독교도 색출에 나서는 등 금교(禁敎) 정책을 강화하였다. 기독교 유입을 막기 위하여 일본인의 해외 도항 및 해외에 있는 일본인의 입국도 금지하였으며, 이어서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벌이던 포르투갈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는 이른바 ‘쇄국령’을 선포하고 선교사들을 처형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의 보복을 우려한 막부는 대외 교류 창구였던 직할지 나가사키(長崎)를 중심으로 연안 경비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처럼 막부는 서양 선박의 일본 입항을 금지하였지만, 종교적 이유를 배제하고 오로지 무역만을 목적으로 도일하였던 네덜란드와는 유일하게 교류를 유지하였다. 단 네덜란드인들 또한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에 수용하여 민간인과의 사적인 접촉을 통제하였다. 네덜란드의 상관장은 매년 에도로 상경하여 쇼군을 알현하였으며, 서양의 사정을 기록한 보고서인 네덜란드 풍설서[阿蘭陀風說書]를 제출하였다. 이는 막부가 해외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

나가사키에는 본래 중국인들도 거주하며 상업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나, 중국 본토를 점령한 청(淸)이 대만의 저항 세력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해외 도항을 전면 차단하는 천계령(遷界令)을 반포하면서 일시적으로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대만 복속 후 청 조정이 1684년에 천계령을 해제하면서 이듬해부터 나가사키로 입항하는 중국 선박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막부는 해마다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중국 선박의 수를 제한하고, 나가사키 시가지 내에서 중국인의 거류지를 제한하여 일본인과의 접촉을 통제하였다.

8 ‘네 개의 창구’

나가사키 외에 에도 시대 일본의 국외 창구로는 조선과의 외교·무역을 전담하였던 쓰시마(對馬), 류큐(琉球) 왕국과 교류하던 사쓰마(薩摩), 그리고 에조치(蝦夷地, 현재의 홋카이도)와 소통하던 마쓰마에(松前)가 있었다. 이러한 에도 시대의 대외관계 구조를 가리켜 ‘네 개의 창구’라고 부른다. 단 이와 같은 구조가 막부의 계획하에 에도 시대 초기부터 체계화된 것이라고 보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네 개의 창구’란 에도 시대 초기부터 이어진 대외관계적 상황이 후일에 이르러 관념화된 일종의 인식적 틀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조선과의 관계는 쓰시마의 중개를 통하여 1607년에 조선에서 통신사(이른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되면서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후 통신사는 주로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에도 시대 동안 총 12회 파견되었다. 특히 이에미쓰 시기에는 쇼군 취임에 대한 축하 외에 다른 명목으로도 2차례 더 파견되었는데, 이는 외교사절의 초빙을 통하여 막부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1635년에는 기존에 조일 양국의 외교를 중개하던 쓰시마가 중간에서 외교문서를 위조해왔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일본 측의 인식에 따르면 조선에 대한 외교문서에는 쇼군을 ‘국왕(國王)’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이 순리였는데, 중간에서 쓰시마가 이를 위조하여 ‘국왕’이라고 써넣은 외교문서를 조선에 전달해왔다는 점이 혐의가 되었다. 이후 막부는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쇼군의 외교적 칭호를 ‘대군(大君)’으로 정하였으며, 1636년 통신사 때부터 일본의 쇼군을 ‘대군’이라고 적은 외교문서를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막부를 설립한 뒤 이에야스는 주변국과의 관계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사쓰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에게 류큐 사절의 방문을 희망한다는 지시를 내렸는데, 류큐에 대한 이권을 탐내던 시마즈 가문은 1609년에 류큐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한 뒤 국왕을 연행하여 이에야스를 알현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에야스는 류큐에 대한 시마즈 가문의 지배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류큐 국왕의 지위 또한 인정하였다. 이후 류큐는 국왕이 즉위하면 막부에 사은사(謝恩使)를, 막부의 쇼군이 취임하면 경하사(慶賀使)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류큐는 사쓰마의 속국이자 막부의 외교 상대국이라는 이중적인 지위에 놓이게 되었다. 동시에 류큐는 중국의 청과도 기존에 명과 맺어온 조공 관계를 이어갔다.

에조치에는 국가적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원주민인 아이누가 교류 대상이었다. 14~15세기부터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이 에조치의 원주민들과 교류하였는데, 15세기 중엽에 교역 문제로 발발한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키자키(蠣崎) 가문이 대두하였다. 가키자키 가문은 16세기 말에 마쓰마에(松前)로 개명하였으며, 이후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로부터 아이누와의 독점적인 교류 권한을 인정받았다. 17세기 중엽부터 아이누는 점차 교역상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빈곤화를 겪었는데, 1669년에는 에조치 전역의 아이누가 마쓰마에 측의 부조리에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킨 샤쿠샤인의 난이 발생하였다. 마쓰마에 가문은 막부의 지원을 받아 무력으로 봉기를 진압한 뒤 아이누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후 아이누는 작업장에 예속된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더욱이 18세기에 접어들면 본토에서 건너와 이권을 분배받은 상인들도 에조치의 교역에 참여하여 아이누에 대한 인적·물적 착취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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