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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와 남명정권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변

미상

명청교체와 남명정권 대표 이미지

정성공(鄭成功)

위키피디아

1 개요

16세기 말 발생한 임진왜란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조·중·일 삼국은 전쟁으로 막대한 국력이 소모되었다.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여진은 부락을 통일하고 ‘만주’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후금(後金)을 세우고 조선을 침공하고 명의 변방을 위협하였다. 재정 고갈과 기근에 시달리던 중국에서는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고, 이자성(李自成)이 이끈 반란군이 베이징으로 쇄도하면서 숭정제(崇禎帝)는 자결을 택하였다.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꾼 만주의 군대는 산하이관(山海關) 너머 베이징으로 진격하였고 명의 뒤를 이어 새로운 중국의 왕조로 자리하였다. 남으로 도망간 명의 황족들은 남명(南明)으로 통칭되는 정권들을 세우고 청에 저항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남명 정권을 지지하던 정성공(鄭成功)과 그 후손들은 타이완을 거점으로 청에 저항하였다. 동남 연안을 평정한 청은 그 기세를 몰아 서북 변방도 평정하였고, 거대한 다민족 제국을 수립하였다.

2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정치 변동

임진왜란 이후, 조·중·일 삼국의 정치 체제에는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여진(이후의 만주)의 두 차례 침공을 겪었다. 명 역시 크고 작은 전쟁들을 거치면서 상당량의 국고가 소모되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직후 다이묘들 간에 분란이 발생하였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東軍)이 승리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江戶)에 새로운 막부를 창설하였다.

반면 명과 조선의 사이에 위치한 여진인들은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전쟁 직후부터 세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 건주여진(建州女眞) 숙수후부(Suksuhu Aiman) 소속 누르하치(Nurhaci)는 건주여진의 여러 부락을 통일하고, 1616년 금(金, 1115~1234)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금(金), 연호를 천명(天命, 만주어로 abkai fulingga, 1616~1626), 수도를 흥경(興京, 만주어로 Hetu Ala)으로 정하였다. 편의상 누르하치가 세운 금은 ‘후금’으로 통칭되고 있다.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이후에 들어설 중국의 통일왕조 청(淸)의 건국 시조로 추존되어 ‘태조(太祖)’라는 시호로 불리게 된다.

1618년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을 선포하고 명과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1619년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사르후(Sarhū)에서 여진 군대와 격돌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후 누르하치는 다른 부락을 규합한 후, 1621년 랴오양(遼陽)을 점령하고 동경(東京)이라 칭하여 천도하였다. 1625년 누르하치는 다시 선양(瀋陽)으로 천도하였으며, 1634년에는 선양을 성경(盛京, 만주어로 Mukden)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1626년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곧바로 명의 수도 베이징으로 진격하였으나, 영원성(寧遠城)을 지키던 원숭환(袁崇煥)의 홍이포 공격을 받고 대패하였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누르하치는 그해 9월에 사망하였다.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Hong Taiji, 皇太極, 재위 1626~164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금의 한(han, 汗)에 오르고 연호를 천총(天聰, 만주어로 abkai sure)으로 정하였다. 1627년 홍타이지는 조선 가도(椵島)에 주둔 중이었던 명 장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홍타이지는 인조와 형제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1636년 홍타이지는 종족명을 여진에서 ‘만주(滿洲)’로 고쳤다. 또한 국호를 대청(大淸, 만주어로 Daicing Gurun)으로 고치고, 연호도 숭덕(崇德, 만주어로 wesihun erdemungge)으로 고쳤다. 그해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하여 삼전도에서 인조로부터 항복 서약을 받고 군신관계를 맺었다. 이때의 침공을 병자호란이라 한다. 조선은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심양에 보내야 했으며, 수많은 조선인들이 청으로 끌려가는 등의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로써 홍타이지는 명의 산하이관 이동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1643년 9월에 급사하였다. 홍타이지의 아홉 번째 아들 풀린(Fulin, 福臨)이 5세에 황위에 등극하였고 연호를 순치(順治, 만주어로 ijishūn dasan)로 고쳤다. 어린 순치제(順治帝, 1638~1661, 재위 1644~1661)를 대신하여 숙부 도르곤(Dorgon, 多爾袞, 1612~1650)이 섭정을 실시하였고, 곧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베이징으로의 진공을 지시하였다. 1644년 산하이관을 지키던 명의 장수 오삼계(吳三桂)의 항복으로 청군은 산하이관을 쉽게 통과하였고, 곧장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이자성 군대를 물리쳤다. 베이징을 점거한 청은 곧바로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남은 명의 황족들은 중국 남방 일대에서 명의 부흥을 꾀하였다.

명의 멸망에는 기후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1629년 혹독한 기근이 발생하자 산시(陝西) 등지에서는 백성들이 봉기하였다. 1644년 반란군 지도자 이자성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을 점거하였다. 명의 황제 숭정제(崇禎帝, 1611~1644, 재위 1628~1644)는 자금성 경산(景山)에서 자결하였고, 이로써 명 왕조는 멸망하였다. 이자성은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만주족 군대에 의해 밀려났고, 도주 중에 후베이(湖北)에서 사망하였다. 쓰촨(四川)을 근거지로 한 반란군 지도자 장헌충 또한 1646년 청군에 의해 전사하였다.

3 남명 정권의 저항과 삼번의 난

남방으로 도주한 명의 황족들은 숭정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르고, ‘복명(復明)’ 즉 명의 복구를 위하여 청군과 맞섰다. 복명의 기치를 내건 정권들을 남명(南明, 1644~1664)이라고 한다. 남명 정권은 하나의 왕조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군데군데 수립된 정권들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남명 황제인 복왕(福王) 홍광제(弘光帝, 재위 1644~1645) 주유숭(朱由崧)은 만력제의 손자로서 난징(南京)에서 즉위하였다. 당왕(唐王) 융무제(隆武帝, 재위 1645~1646) 주율건(朱聿鍵)은 홍무제(洪武帝)의 9세손으로, 정지룡(鄭芝龍)이 옹립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즉위하였다. 계왕(桂王) 영력제(永曆帝, 재위 1649~1662) 주유랑(朱由榔)은 만력제의 손자로서 광둥성(廣東省) 자오칭(肇慶)에서 즉위하였다. 홍광, 융무, 영력 세 정권을 가리켜 ‘전삼번(前三藩)’이라 칭한다.

전삼번을 비롯한 남명 세력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청군에게 철저히 진압되었다. 베이징 입성 이래로 청군은 남하하여 남명 세력을 압박하였다. 1646년 홍광제는 청에 투항한 장수들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고, 여러 세력들이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면서 반청 세력 내에서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홍광제의 뒤를 이어 옹립된 황제 중 한 명이었던 융무제는 1646년 푸젠성 푸저우에서 청군에게 생포되었고 이윽고 사망하였다. 1659년 중국 서남단에 위치한 윈난까지 진격한 청군을 피해 영력제는 미얀마 일대로 도주하였지만 오삼계는 미얀마까지 추격하였고, 1662년 영력제를 살해하였다. 영력제의 사망으로 남명 정권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남명 정권의 소멸 이후에도 남방에서는 청에 대항하는 반청(反淸) 운동이 이어졌다. ‘후삼번(後三藩)’이라고 칭하는 세 정권은 삼번의 난(三藩의 亂, 1673~1681)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은 1644년 청군이 베이징을 점거하기 전에 청에 투항한 한족 장수들이었다. 1649년 청은 남명 정권을 진압하기 위하여 투항 장수 네 명을 왕(王)으로 봉하고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였다. 윈구이(雲貴, 윈난과 구이저우)에는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둥에는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광시(廣西)에는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푸젠에는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이 봉해졌는데, 이들을 가리켜 ‘사왕(四王)’이라 하였다. 경중명은 정남왕으로 봉해졌으나 부하의 죄를 이유로 자결하였고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정남왕 자리를 이어받았다.

청은 이들의 군사력 보유를 용인해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들이 자체적인 독립 세력을 이루게 될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특히 청은 이들이 동남 연안에서 해양 세력과 연계하여 경제력을 얻는 것을 우려하였다. 실제로 상가희-상지신(尙之信) 부자는 마카오 포르투갈인과 예수회 신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1673년 삼번의 폐지가 결정되자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과 경계무의 아들 경정충(耿精忠)은 각각 1674년과 1676년 반란에 가담하였다. 상가희는 충격으로 자결하였고 경계무는 반란 직전인 1671년 아들 경정충에게 정남왕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들은 한때 창강(長江) 이남과 쓰촨, 산시(陝西)까지 점거하는 등 주로 중국 남방에서 세를 떨쳤다. 그러나 1678년 오삼계가 후난(湖南)에서 사망하였고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吳世蕃) 역시 1681년 자결하였으며, 상지신과 경정충은 체포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삼번의 난은 평정되었다.

4 정성공과 타이완의 정씨 세력

비슷한 시기 동남 연안에는 청에 대항하는 정씨(鄭氏)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푸젠성 취안저우부(泉州府) 난안현(南安縣) 출신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중국 연안 일대에서 거대한 해상 세력을 이룬 이단(李旦)의 부하였다. 정지룡은 이단의 세력을 계승하여 중국은 물론 일본과 타이완 등지의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거대한 상업·군사 집단을 이뤘다. 1628년 명은 정지룡을 해방유격(海防遊擊)으로 임명하여 포섭하였고, 이후 정지룡은 총병관(總兵官)을 거쳐 총독(總督)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1645년 정지룡은 융무제 주율건을 옹립하여 반청복명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646년 청에 항복하였다. 정지룡에게는 일본 여성 다가와 마쓰(田川松)와 결혼하여 히라도(平戶)에서 낳은 아들 복송(福松, 후쿠마쓰)이 있었다. 정성공(鄭成功, 1624~1662)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복송은 아버지를 도와 반청복명 운동에 참가하였다.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이 청에 투항한 이후에도 반청복명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융무제는 정성공에게 명 황실의 성씨, 즉 국성(國姓)인 ‘주(朱)’와 ‘성공(成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 때문에 정성공은 ‘국성야(國姓爺)’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네덜란드인들도 이에 따라 정성공을 ‘콕싱아(Koxinga)’라고 칭하였다. 이후 정성공은 영력제를 호위하면서 연평군왕(延平郡王)에 봉해졌다. 1659년 정성공은 난징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겼으며, 1661년에는 동녕국(東寧國, 1661~1683)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일찍이 중국인들은 오늘날 타이완이라 불리는 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정씨 세력이 점거하기 이전에는 타이완으로 대량 이주한 역사는 없었다. 고대 중국 사서를 살펴보면, 타이완은 『삼국지』에는 ‘이주(夷洲)’, 『수서』에는 ‘유구(流求)’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명대에는 타이완 서남단을 왕래하는 중국 상선들에 의해 ‘타고산(打鼓山)’, ‘타구산(打狗山)’ 등으로 불렸다. 이는 푸젠 남부 방언인 민난어로 ‘dakausua’로 표기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고산국(高山國, 다카산)’ 혹은 ‘고사국(高砂國, 다카사고)’ 등으로 칭하였다.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도 이와 비슷한 발음으로 타이완을 표기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타이완은 ‘포르모사(Formosa)’라는 별칭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타이완’이라는 명칭은 현지 원주민어로 ‘외지인’을 뜻하는 ‘타요완(Tayouan)’에 대하여 네덜란드인들이 ‘타요완’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하였다. 당시 한문 문헌에서도 ‘대원(大員)’, ‘대원(大圓)’, ‘대원(臺員)’, ‘대원(臺圓)’, ‘대만(大灣)’, ‘대번(大樊)’, ‘대환(臺環)’, ‘대완(大菀)’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나, 청의 점령 이후 비로소 ‘대만(臺灣)’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다.

주변 어느 왕조에게도 지배받지 않은 채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섬이었던 타이완은 네덜란드인들이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622년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는 푸젠과 타이완 사이에 있는 펑후를 점거하고 요새를 축성하였다. 1624년 명군이 네덜란드인들을 펑후에서 쫓아내자, 이들은 타이완으로 가서 현재의 타이난 지역에 정주하고 요새를 건설하였다. 1627년 요새가 완성되었고 ‘질란디아성(Zeelandia Fort)’이라고 명명하였다. 1626년 스페인인들은 타이완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성채를 세웠으나, 타이완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는 네덜란드인들과 대립 끝에 1642년 타이완으로부터 축출되었다. 이후 정성공은 타이완으로 건너와 네덜란드인들과 전투를 벌여 타이완을 점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1662년 돌연 정성공이 사망하였고, 아들 정경(鄭經, 재위 1662~1681)이 그 지위를 이어 나갔다. 정경은 경중명을 통하여 삼번 세력과 연합하였으나 이들의 연합은 곧바로 와해되었다. 분노한 정경은 푸젠 연안 일대를 무력으로 차지하였다. 경정충이 청에 투항한 후에는 청군과 경정충이 정경을 공격하였고, 대륙의 영역 대부분을 빼앗긴 정씨 세력의 활동 범위는 타이완으로 축소되었다. 정경의 아들 정극상(鄭克塽, 재위 1681~1683)이 12세에 즉위하였을 때에는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다. 1678년 푸젠총독(福建總督)에 임명된 요계성(姚啓聖)이 구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청은 시랑(施琅)이 이끄는 원정군을 타이완에 파견하였다. 1683년 시랑의 항복 요구에 응한 정극상은 청에 귀순하였다. 이로써 타이완은 청의 판도에 들어갔다.

5 동남 연안의 평정과 청의 전성기

정씨 세력의 평정은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2~1722)에게 중대한 과업이었다. 9세에 즉위한 강희제를 사대신(四大臣)이 보필하여 섭정을 수행하였는데, 강희제는 16세가 되던 해 사대신 중 가장 권세가 큰 오보이(Oboi, 鰲拜)를 숙청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불안한 청의 기반을 다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동남 지역 내륙과 해안에 자리한 반청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강희제는 이들의 재정적 기반이 되는 해상 무역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해안에서 일정 거리 내의 지역을 모두 비워버리는 천계령(遷界令, 1661~1683)을 공포하였다. 천계령은 1661년에 처음 실시되었지만, 강희(康熙) 연간(1662~1722)에 가장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천계령은 정씨 세력은 물론 동남 연안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정씨 세력 주요 구성원들은 경제적 이익을 따라 모여든 무역상 출신이 대부분이었기에, 천계령의 실시는 정씨 세력은 물론 연안 상인 집단마저 고사시켰다. 또한 천계령은 연안 지역 사회의 붕괴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해안이 철저하게 봉쇄되면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은이 감소하면서 구매력이 급감하였고, 그 결과 청대 전반에 걸쳐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였다.

천계령은 무역의 양상도 바꾸었다. 중국 해안이 차단되면서, 비단 등 중국 상품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조선에서는 중개무역이 활발히 이뤄졌다. 중국 도자기를 구입하여 유럽으로 팔았던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는 대체 공급지로서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이에 일본에서는 자기의 제조가 크게 활성화되었고, 일본 자기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연해 지역민들은 천계령의 폐지를 강력히 요청하였고, 정극상의 항복이 있었던 1683년 마침내 천계령은 폐지되었다. 또한 강희제는 이전에 비해 좀더 개방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천계령으로 발생한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사구통상 체제가 구축되었고 청은 중국 상선과 외국 상선의 교역을 허용해주기도 하였다.

동남 연안이 안정되자 청은 서북방으로 눈을 돌렸다. 1689년 청은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이후 강희제는 세 차례 원정을 통하여 준가르(Dzungar)를 정벌하였고 티베트(Tibet)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청은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들 옹정제(雍正帝, 재위 1722~1735)와 손자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6~1795)의 치세에 이르러서 청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기를 이르러 ‘강건성세(康乾盛世)’ 혹은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라고 한다.

6 새로운 시대 새로운 관점

‘화(華)’를 대표했던 한족 정권 명이 무너지고 ‘이(夷)’로 취급되었던 여진인들이 중원을 차지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은 중국 주변 국가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이’에게 당한 치욕과 ‘화’가 사라진 상황으로부터 초래된 이념적인 위기를 극복하고자 조선 조정에서는 북벌론을 논의하였다. 또한 정성공과 남명 정권의 첩보를 수집하고 이들의 활약을 주시하였다.

조선은 호란 이후에 청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품고 북벌 논의를 전개하였다. 조선은 정씨 세력과 삼번의 난과 같은 반청복명 운동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성경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머물던 임광(任絖)은 조선 조정에 남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은 사절단, 쓰시마, 표류민 등을 통하여 정씨 세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정성공의 후예인 진상의(陳尙義)라는 해적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풍문도 조선에 전달되었다. 진상의는 광둥성 차오저우(潮州) 출신이지만, 일설에는 저장성(浙江省) 출신이라고도 한다. 진상의는 서용(徐容) 등의 해적들과 해상 집단을 조직하였고, 정씨 세력이 타이완으로 옮겨간 강희 연간 중엽부터 푸젠 등지 연안에서 활동하며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저장성 저우산(舟山) 군도의 다취산(大衢山)을 근거지로 삼았으며, 산둥(山東), 장난(江南), 저장, 푸젠, 광둥, 랴오둥(遼東) 등 중국 동남 연안 전역에 걸쳐 활약하다 1716년 청에 귀순하였다.

조선은 이전부터 중국 해적들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1710년 청으로부터 해적 방비 관련 문서를 전달받았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경기도 양주 홍복산에 성을 쌓아 피난처를 구축해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초반에는 조선 조정이 이들 해적 집단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1712년 김창집(金昌集)을 정사로 한 연행사절단이 정보 수집을 통하여 처음으로 이 해적이 ‘평강왕(平康王)’ 진상의라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후 1720년 이기지(李器之)도 진상의에 대한 정보를 탐문하였다.

그러나 진상의를 끝으로 더 이상 명의 부흥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나타날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사상적으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등장하여 명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자각되었다. 반면 일부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새롭게 들어선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을 통틀어 북학론(北學論)이라 칭하였다.

일본에서는 이 상황에 대하여 ‘화이변태(華夷變態)’라는 용어로 설명하였다. 이는 1732년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 가호(林鵞峰)와 하야시 호코(林鳳岡) 부자가 지은 책의 제목에서 유래하였다. 화이변태는 청을 새로운 ‘화’로 인정하지 않고 ‘이’로 치부하는 한편, 일본을 새로운 ‘화’로 본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조·중·일 삼국은 스스로를 ‘화’로, 타자를 ‘이’로 간주하면서, 격변기 이후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해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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