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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구의 옥[閔無咎의 獄]

외척에게 권력이 있으면 불충이다

1407년(태종 7) ~ 1416년(태종 16)

민무구의 옥 대표 이미지

마천목 좌명공신녹권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민무구(閔無咎)의 옥(獄)은 태종이 외척 여흥 민씨 가문을 정치적으로 배척하면서 발생하였다. 민무구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와 남매지간이며, 이들의 아버지는 민제(閔霽)이다. 민무구와 그의 동생 민무질(閔無疾)은 태종의 집권 이후 공신이자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1407년(태종 7)에 권력 남용, 불충, 불손 등의 여러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 약 3년에 걸친 탄핵 및 처벌 요청 끝에 섬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410년(태종 10)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태종의 명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1415년(태종 15)에는 동생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까지 불충의 명목으로 탄핵되었으며, 1416년(태종 16)에 이들 역시 자진하였다.

2 승승장구하던 국왕의 처남들, 탄핵을 받다

민무구 형제는 태종의 집권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1398년(태조 7)에 정안군(靖安君) 이방원은 처남 민무구·민무질 등과 함께 무기를 갖춰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하였고, 1400년(정종 2)에도 무장하여 이방간 세력과 대치하여 승리하였다. 이러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민무구·민무질은 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에 연이어 책봉되었고, 이방원이 제3대 국왕에 즉위하면서 그 가문은 외척이 되었다.

태종 즉위 이후 민무구 형제는 승승장구했지만, 1407년(태종 7) 7월에 영의정부사 이화(李和) 등의 상소를 시작으로 그의 가문은 오랜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화는 민무구·민무질 형제와 신극례(辛克禮)의 처벌을 청했는데, 주로 민무구 형제의 잘못을 거론했다. 우선 국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듯한 행실을 문제 삼았다. 특히, 이화는 1406년(태종 6)에 태종이 내선(內禪) 의지를 표명했을 때 민무구 형제만 유독 기뻐하는 뜻을 보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태종에게 적장자 외에 다른 아들은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한 점은 민무구 등이 다른 아들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의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태종이 자신들을 의심하고 있으며 오히려 참소하는 말을 신뢰한다.’는 등의 불손한 언동도 문제 삼았다. 이후 민무구 형제를 둘러싼 탄핵과 처벌의 여파는 지속되었다.

3 민무구·민무질 옥사의 전개

이화의 상소 이후 민무구를 비롯하여 관련자들에 대한 대질 신문이 행해졌고, 태종은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오히려 신하들의 탄핵 요구를 조장하는 듯한 경향도 없지 않았다. 하륜(河崙)은 민무구 등에 대해 약한 처벌을 원했지만, 태종은 오히려 하륜을 질타했다. 이후 의정부·대간 등의 처벌 요청이 빗발쳤으며, 태종은 민무구·민무질·신극례를 유배시켰다. 태종은 그들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명하면서도 민무구 등의 처벌을 청하지 않는 허조(許稠)와 같은 인물을 예의주시하기도 했다. 민무구 형제와 신극례에 대한 처벌은 거의 모든 관료들에 의해 요구되었다. 이에 하륜도 입장을 바꿔 강경 처벌을 청하였고, 공신을 주축으로 대간·형조 등에서 상소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민씨 가문과 교유를 이어가던 사람들도 탄핵되었다. 민제와 잦은 회동을 갖던 조호(趙瑚)·김첨(金瞻)·허응(許應)·박돈지(朴惇之), 유배지에 있던 민무구를 만난 정남진(鄭南晉) 등이 논란이 되었다. 1408년(태종 8) 9월 민제가 사망한 이후에는 민무구 형제에 대한 죄목이 더욱 늘어났다. 며칠 후 태종은 민무구·민무질의 죄를 다음의 10가지로 정리한 교서를 내렸다.

1. 1402년(태종 2) 태종이 종창(腫瘡)을 앓았을 때 9살인 세자를 끼고 권세를 쥐려 했다.
2. 민무질이 이무(李茂)에게 ‘태종이 자신들을 보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불평하며 앞날을 걱정했다.
3. 1406년(1406) 태종이 내선(內禪)하려 하자 좋아하더니 정사를 다시 보자 좋아하지 않았다.
4. 세자를 제외한 다른 왕자들을 없애서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고 했다.
5. 선위 철회 후 고의로 외방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곳이 지금의 자원(自願)한 거처와 같아 의심스럽다.
6. 1402년(태종 2)에 간원 이지직(李之直), 문인 전가식(田可植)을 사주하여 태종이 음악·여색·매·개[聲色鷹犬]를 좋아하고 의복과 음식을 사치스럽게 한다고 무함하였다.
7. 민무질이 병권을 내놓은 이유를 ‘주상이 신 등을 이저(李佇)처럼 의심한다’고 말하였다.
8. 민씨 형제가 양인 수백 인을 억압하여 사노비로 만들었다.
9. 태종이 세자 시절 입던 관대(冠帶)를 제 마음대로 착용하는 등 교만방자하게 굴었다.
10. 아버지의 첩을 궁중에 출입시켜 궁중의 일을 거짓 퍼뜨리고 공신·재상을 이간시켰다.

민무구 형제의 죄목은 교만 방자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종실에 해를 끼칠 여지가 있으며, 태종의 선위를 원했다는 혐의들이 핵심이었는데, 이때 태종의 교서에서는 전보다 더 많은 의혹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국왕이 직접 민무구 형제의 죄목을 공표하자 대간·형조 등의 처벌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런 가운데 민무질 옥사에 관련된 사람들은 점차 증가했다. 1408년(태종 8)에 민제와 교유하였던 조호(趙瑚), 김첨(金瞻), 허응(許應), 박돈지(朴惇之) 등이 탄핵되었고, 1409년(태종 9)에는 세자에게 ‘민무구·민무질이 죄가 없는데 쫓겨났다.’고 발언한 이지성(李之誠)이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지성을 천거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무질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이무(李茂)의 처벌이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옥사의 규모는 매우 커졌다. 이빈(李彬), 윤목(尹穆), 조희민(趙希閔), 강사덕(姜思德) 등이 민무구의 무죄를 거론했다는 죄목으로 연루되었다. 결국 이무는 처형되었고, 민무구 형제는 제주로 이배되었다.

1410년(태종 10)에는 조희민의 아버지 조호가 이무에 대해 왕이 될 만한 재목으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터져 나오면서 이미 유배되었던 조호를 잡아와 다시 국문이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무구·민무질도 자진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써 옥사는 마무리되는 듯했다.

4 민무휼·민무회에게 확대된 옥사

1415년(태종 15)에는 민무휼·민무회까지 불충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단 민무회가 염치용(廉致庸)의 노비 소송에 관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송 노비가 내섬시(內贍寺)에 속하게 되어 불만이었던 염치용이 “큰 부자인 종[奴]이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洪氏)와 영의정 하륜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써” 내려진 결정이라고 민무회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민무회는 이 내용을 충녕대군에게 이야기했고,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알렸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옹주와 대신의 사사로운 말에 넘어가 공무를 처리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태종은 노비 소송이 형조·사헌부 등에서 결정한 내용이라는 점을 밝히며, 민무회·염치용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이들을 성토하는 탄핵이 이어지는 가운데 민무회의 불충한 언사까지 논란이 되었다. 중궁의 병을 위문하던 중에 세자 양녕대군이 민씨 가문의 죄를 언급하였고, 이에 대해 민무회가 세자 역시 민씨 가문에서 성장하지 않았냐며 반문하였던 것이다. 이후 민무휼·민무회 형제의 불충에 대한 논란이 몇 달 동안 행해졌다. 태종은 그들과의 사정(私情)을 배제할 수 없다며 처벌을 미루는 듯했지만, 민무휼 형제는 국문을 받은 끝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유배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민무휼·민무회 역시 자진하였다.

5 태종의 외척 제거

태종 재위 18년 가운데에 민무구 형제를 둘러싼 탄핵의 기간은 상당했고, 그들의 당여로 지목되어 처벌된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태종이 민씨 형제들을 제거한 이유로 원경왕후의 불화, 외척의 권력 남용 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민무구 형제와의 처남 매부 관계를 군신 관계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불만족스러운 요소들이 있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집권한 태종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신하의 불충을 매우 경계하였고, 외척의 경우는 불충의 여지가 조금만 보여도 바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무구 형제에 대한 태종의 처벌은 이러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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