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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박해[丙午迫害]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 김대건의 순교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 대표 이미지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병오박해(丙午迫害)는 1846년(헌종 12) 6월 5일부터 9월 20일까지 발생한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김대건 신부 등 9명이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사제로 서품된 인물이다. 1836년(헌종 2)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중국에서 학문을 수련하였고,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시켰다. 또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éol) 주교와 다블뤼(Daveluy; 안돈이(安敦伊))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6년 더 많은 서양인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황해도에서 해로를 탐색하던 중 체포되어 국가 반란죄로 군문에서 효수(梟首)당하였다.

2 김대건, 사제 수업을 받다

조선 천주교회는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 서양인 성직자 3명과 100여 명이 넘는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그들은 성직자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페레올 주교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성직자를 준비하고 있던 조선인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에게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 방법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김대건은 여러 차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1846년(헌종 12) 발생한 병오박해(丙午迫害)이다. 따라서 병오박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대건 신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김대건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천주교를 믿는 가문이었다. 그의 종조부(從祖父)인 김종현과 조부인 김택현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증조부인 김운조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할머니는 이존창(李存昌)의 딸이었다. 이존창은 초기 천주교 창설자의 한 명인 권일신(權日身)에게 교리를 배웠고 이승훈(李承薰)이 주도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아래에서 신부로 임명되어 사도 활동을 하였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순교하였다. 부친인 김제린도 천주교 신자였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이처럼, 김대건은 가까운 혈족 10여 명이 순교자가 될 만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은 1836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조선인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12월 중국을 거쳐 마카오에 입국한 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임시로 세워진 조선 신학교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837년 함께 교육받던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남게 되었다.

1842년 김대건은 프랑스 세실(Cecil) 함장이 이끄는 함대의 조선인 통역사가 되었다. 당시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끊겼던 조선과의 연락을 복구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해 정보를 공유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김대건이 맡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함대는 여러 문제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고 김대건은 다른 경로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해야 했다.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육로로 입국할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북쪽 변경의 감시가 강화되어 안전한 입국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시일을 기다려야 했다. 김대건은 의주의 국경과 동북지역의 두만강 국경, 그리고 서해의 해로를 통한 입국 등 다방면의 입국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서양인 성직자와 함께 육로로 입국하는 방법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오직 해로를 통한 방법 밖에 없었다. 페레올 주교는 해로 입국을 위해 김대건을 홀로 조선에 보내 배를 구입하도록 지시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조선의 안내자를 따라 의주를 거쳐 한양에 들어가 서양인 선교사들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였다. 그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선박도 구입하였다. 또한 중국과 조선의 해변을 그린 「조선전도(朝鮮全圖)」도 구했다. 이제 서양인 선교사를 조선에 입국시킬 모든 준비를 마쳤다.

1845년 4월 30일 김대건은 조선의 제물포를 떠나 중국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6월 2일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대건의 항로 개척은 페레올 주교를 감동시켰다.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司祭)로 서품되었다.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탄생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한양에서 타고 온 배를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9월 28일 한 달의 항해 끝에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하였고, 10월 12일에는 충청남도 강경에 닻을 내릴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의 공로로 1839년 이후 끊어졌던 서양인 성직자가 다시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3 김대건의 조선 입국과 체포

1845년 11월 김대건 신부는 서울과 용인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함께 입국한 페레올 주교 역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 천주교회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서양인 성직자를 조선에 안전하게 입국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을 본인이 경험한 해로에서 찾았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안전한 해로 입국 방법을 개척하라는 명을 내렸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마포를 출발하여 황해도의 백령도로 향했다. 김대건 신부는 한양에서 백령도까지의 길목을 지도로 정밀하게 그려 안전한 육로도 확보하였다. 백령도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과 선원을 매수하였다. 중국 어선은 고기를 잡기 위해 매년 3월 초순에 한양에 모였다가 5월 하순에 돌아갔다. 거의 백 척 가까운 배가 왕래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잘 이용하면 선교사의 입국은 물론 중국 천주교회와의 연락망도 구축할 수 있었다. 실제로 4월에 김대건 신부는 편지와 지도를 중국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5월에 중국 배를 징발하는 과정에서 김대건 신부측과 중국 선원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김대건 신부는 이에 연루되어 관아에 잡혀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김대건 신부가 부치려던 편지와 지도가 압수되었고, 김대건 신부는 투옥되었다. 아울러 그를 도와주었던 선주 임성룡과 임치백, 뱃사공 엄수 등 천주교인 10여명과 김대건을 도와 항로 개척을 위해 활동한 현석문, 한이형 등도 체포되었다.

4 병오박해의 전개 과정

김대건 신부는 체포된 이후 등산진과 옹진을 거쳐 해주감영까지 끌려갔다. 해주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가한 끝에 그가 천주교 신부임을 확인한 해주감사는 한양으로 그를 압송해 올려 보냈다. 한양에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역모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심한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 조정에서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숙한 김대건 신부를 활용하여 세계지도를 번역하게 했고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해 자문하기도 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천주교는 사학(邪學)이 아니니 천주교인을 탄압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세계의 정세 흐름을 알려주며 조선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일부 조정 대신은 김대건 신부를 대외 업무에 활용하려는 의사를 비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46년 8월에 프랑스의 동양함대를 지휘하는 세실(Cecil)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 앞바다에 나타났다. 세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학살당한 프랑스인 신부의 문제를 거론하며, 당시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프랑스와의 통교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강요는 조선 사람들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선 정부에서는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김대건 신부가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고,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강행하였다.

1846년 9월 6일, 김대건 신부는 국가에 대한 반역죄와 더불어 사교(邪敎)의 교주라는 죄목으로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함께 잡혀 왔던 교인들도 배교한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형되었다. 이때 함께 처형된 인원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현석문(玄錫文), 남경문, 한이형, 우술임, 임치백, 김임이, 이간난, 정철염 등이었다.

특히, 현석문은 지도자급 교인이라 하여 김대건과 함께 군문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현석문은 중인 집안 출신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의 부친 현계흠(玄啓欽)은 1810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하였고, 그의 아내와 누이, 아들은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순교자 집안이었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의 영입을 위해 중국에 내왕하기도 했고,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를 도와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천주교의 지도자로 알려지고 효수형을 당한 것이다.

5 병오박해의 결과와 영향

병오박해는 앞서 발생한 기해박해에 비해서 희생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기해박해 당시에 100명이 넘는 사람이 순교한 것과 비교하면 9명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적었다. 이는 이미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아오며 대응력이 생긴 신자들의 대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정에서도 더 강력한 압박을 해오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대목구의 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등 서양인 성직자들도 입국해 있었다. 그럼에도 사건이 더 확장되지 않고 마무리 되었던 것은 김대건 신부의 희생이 컸다. 김대건 신부는 압수당한 프랑스어로 된 편지를 모두 자신이 쓴 것으로 자백하였다. 따라서 서양인 성직자들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지역 사회에 몸을 숨기고 여러 교우촌을 순방하며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가 병오박해 직전에 개척해놓은 서해 항로는 이후 선교사들의 주요한 조선 입국로로 활용될 수 있었다. 이 해로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와 중국 천주교회의 연락이 전달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서양인 선교사들은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항로를 통해 입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개척한 항로를 보완하였고, 1852년 이후 입국한 베르뇌 주교나 프티니콜라, 페롱, 랑드르, 칼레 신부 등이 대부분 이 루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개척한 항로는 이후 천주교 전파를 위한 통로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사람들은 페레올 주교가 철저히 조사하여 『병오일기(丙午日記)』에 기록하였다. 이 자료는 기해박해 순교자의 행적인 『기해일기(己亥日記)』와 함께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이들의 기록으로 조선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명예를 추복할 수 있었다. 이들 9인의 순교자는 1925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했을 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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