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병자호란

병자호란

청(淸) 기병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다

1636년(인조 14) ~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대표 이미지

서울 삼전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여진족 국가 후금(後金)이 명을 몰아내고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명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던 조선을 선제 정벌한 양차 전쟁 중의 두 번째 전쟁. 1차전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며 그 9년 만인 1636년(인조 14)에 2차전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현실적으로 ‘대청 사대(對淸 事大)’라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지만 이념적으로는 ‘대명 의리(對明 義理)’를 고수,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해내었다.

2 17세기초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후금 관계

16세기 말 동아시아 전체를 흔들어 놓은 세계대전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은 한·중·일 삼국에 한결같이 큰 파장을 가져왔다. 중원의 패자였던 명은 임진왜란 참전으로 인해 국운이 기울었고 이를 틈타 만주 일대에서는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건국하여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일본에서는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 타도되고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다. 임진왜란 당시 삼국간 세력 충돌의 중심에 놓였던 조선사회는 가장 큰 타격을 받았기에 왜란 후 조선왕실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은 전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조선후기 사회의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고 조선사회는 강한 자생력을 갖추어가게 된다.

전란 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 왕실의 생존이라는 지상 과제에 봉착한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유교성리학의 핵심인 의리명분론 보다는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실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탈성리학적 성향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광해군(光海君)과 대북정권은 당시 명·후금 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조선의 생존과 자립을 우선시하여 양국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외교 정책을 펼쳤다. 당시 명·후금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명이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명의 조선군을 거느리고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잘 처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 연합군이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후금은 이러한 조선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중시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으나 명에 대한 사대와 임진왜란 당시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림들에게 큰 질타를 받았다.

또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왕권 안정을 위해 광해군의 가장 큰 정적이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이자 광해군의 계모인 선조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는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계축옥사를 계기로 광해군과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은혜를 입은 명에 대해 거리를 두는 실리외교나 반인륜적 계축옥사로 상징되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통치 방식은 조선사회의 입국이념이던 유교명분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결국 사림세력의 이탈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대북정권에 의해 소외되었던 서인과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연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키게 된다. 광해군대 대북세력이 학문적으로 탈성리학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및 남인 세력은 상대적으로 성리학이념에 충실하였다. 이러한 성향의 서·남인 연합 정권의 성립은 조선사회가 임진왜란으로 인한 혼란과 동요의 시기를 지나 재차 건국이념이자 시대이념인 성리학이념으로 회귀, 다시 보수화하게 됨을 시사한다.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남인 연합 정권은 유교의 의리명분론을 내세웠던 반정의 명분만큼이나 광해군대의 실리외교에서 벗어나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명분외교로 선회하였다. 조선은 가도(椵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 모문룡(毛文龍)의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긴장 일변도의 명·후금·조선의 관계 하에서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이 가져올 현실적 파장에 대한 고려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3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후금 관계

이즈음 누르하치를 이어 즉위한 후금 태종은 본격적인 명 침공을 준비하면서 조선의 태도에도 유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나온 조선의 친명배금책은 태종을 크게 자극하였다. 1627년(인조 5)이 되자 태종은 3만 군사를 보내 조선을 침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후금의 침공 소식을 접한 인조는 강화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하였는데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 후금은 명과의 관계 때문에 군대를 조선에 오래 주둔시킬 수 없었는데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가 있자 강화를 제시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화·전 양론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3월 강화가 성립되었다. 강화 내용은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을 것, 강화 성립 후 곧 후금군을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피차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후금과 강화 후에도 조선은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조선은 후금군이 조선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조건을 활용하여 후금군을 바로 철수시켰고 또 조·명 관계에 대한 후금의 간섭을 배제하였다.

이후 후금은 군대 철수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를 받고 중강(中江)에서의 개시(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또한 후금은 조선 침략 다음해에 내몽고를 공격, 1632년(인조 10) 만주·내몽고 대부분을 차지한 후 명의 수도 북경 부근까지 공략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면서 후금의 태도는 더욱 강압적으로 바뀌었다. 수년 후인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상 조문을 위해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국서에서 청 태종을 황제로 부르며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강요했다.

논란이 일자 인조는 국서를 받지 않고 용골대 일행을 감시하도록 했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용골대 일행은 본국으로 도주하게 된다. 인조는 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해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평안감사에게 척화를 알리는 유서(諭書)를 내렸는데 이 문서가 도망하던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됨으로서 조선 측의 척화 태도가 청에 누설되었다.

이해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고쳤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 나덕헌(羅德憲)·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의 예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이들 편에 국서를 보내 스스로를 ‘대청황제(大淸皇帝)’로 칭하면서 조선을 ‘너희나라(爾國)’으로 칭하였다.

4 병자호란의 경과

결국 청 태종은 이해 12월 1일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모아 조선 친정에 나섰다. 조선 침략의 표면적 이유는 물론 조선이 ‘군신지의’를 거부하였던 이유 때문이나 기실은 명을 치기에 앞서 명의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 공격, 조선·명 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이유가 컸다.

청군이 조선을 침공하고자 할 때 첫 번째 고려해야 할 변수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주둔하고 있던 평안도 의주 백마산성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공격을 대비하여 북변 방어를 강화하였는데 그 핵심 인물이었던 임경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평양 중군, 검산산성(劒山山城, 평안도 선천 소재) 방어사, 정주 목사, 청북 방어사, 안변부사,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지내면서 북변에 머물렀다.

청군은 조선이 설치한 북변의 주요 방어 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도성을 바로 공략하는 전략을 세웠다. 청군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고 선봉장 마부대는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서울로 육박해 들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12월 13일에서야 비로소 의주부윤 임경업,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를 통해 청의 침공 소식을 알게 되었다.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통과하였다는 장계가 도착하자 조선 조정은 그때서야 강화도 파천을 결정하게 된다. 인조는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강화도 방어의 총책임을 지닌 검찰사(檢察使),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책임자인 부사(副使),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강화도 해방(海防)의 책임자인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임명하여 강화 수비의 책임을 맡겼다. 또한 원임대신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와 원손(元孫),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孝宗),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했다.

또 도성의 방어를 위해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 남선(南銑)을 찬획사(贊劃使)로 삼은 후 인조와 세자도 그날 밤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청군 선봉장 마부대는 서울 북쪽 홍제원에 도착하여 곧바로 군사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끊어 버렸다. 길이 막힌 인조는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대책을 강구하였다.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이 홍제원에 주둔한 청군 진영에 나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 이유를 물으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에 인조와 세자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후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주장하였고 다음날 15일 새벽 인조 일행의 강화행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어 행군이 불가해지자 인조는 강화행을 포기하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수비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총융사 구굉(具宏),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성안의 군사는 1만 3천명 정도였으며 비축미는 1만 4천 여석 정도로 겨우 50여 일을 견딜 수 있는 양이었다. 인조는 각도 관찰사와 병사에게 군사지원을 명하고 명에도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청의 선봉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청의 주력군도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해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양군의 대치 과정에서 조선군이 잠시 성 밖으로 나가 청군 척후병을 수십 명 죽이는 소소한 전과가 있었으나 이렇다 할 큰 싸움 없이 40여일이 지나갔다. 남한산성내의 인조 일행과 피난민들은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각도 감사 및 병사가 이끌고 올라왔던 관군들은 남한산성에 이르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관군들이 패주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과 승병들이 봉기하였으나 역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명(明)도 국내 사정으로 원병을 보내오지 못하였고 다만 등주총병(登州總兵) 진홍범(陳弘範)이 수군을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이마저도 풍랑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남한산성 내에서는 애초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이조참판 정온(鄭蘊) 등 척화주전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점차 관군이 패주하고 남한산성이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자 최명길을 위시한 주화파가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1월 3일 인조는 청에 보내는 국서에서 ‘신(臣)’이라 칭하게 되었고 이를 두고 조신들 사이에서 큰 물의가 일었다.

1월 20일에는 청 태종이 항복을 종용하면서 인조로 하여금 성에서 나와 항복할 것과 척화론자 2~3명을 잡아 보낼 것 등을 요구했다.

이어 청은 강화도를 함락한 후 즉각적인 항복을 종용하게 된다. 청군은 1월 22일 강화도를 급습하였는데,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강화도 방어 책임자인 주사대장 장신, 검찰사 김경징, 부사 이민구가 전의를 상실하자 적이 밀려들어왔다. 성안에는 세자빈과 봉림대군·인평대군 등 왕족과 대신들만 남게 되었다. 사세가 급박해지자 내관들이 원손을 보호하여 강화도를 탈출, 당진으로 떠나갔다. 성이 함락되자 청군은 성안에 들어와 왕족들을 감금하고 도성 내 관가와 민가를 불지르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원임대신 김상용을 위시하여 많은 관인·사족들이 순절했고 민간의 부녀자들 또한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순절한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재빠르고 기민하게 대응하였던 반면 조선군은 미처 마음의 준비도 못한 사이에 급습을 당하면서 인력과 물력을 제대로 결집해 보지도 못하고 참패를 당하였다.

5 항복 과정 및 난후 수습 경과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세자빈과 두 대군 이하 2백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어 왔다. 청군은 봉림대군의 수서(手書)와 윤방·한흥일 등의 장계를 인조에게 보여주며 항복을 종용하였다. 척화주전론자들의 결사적인 반대가 있었으나 강화도의 함락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결국 항복하기로 결심한다.

홍서봉(洪瑞鳳)·최명길(崔鳴吉)·김신국(金藎國) 등이 적진에 들어가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였고 또 용골대·마부대 등도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조건을 상호 조율한 끝에 항복 조약이 이루어졌다. 항복 조약의 구체적 내용은 조선은 청에 대해 군신의 예를 행할 것,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버리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청에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원군을 파견할 것, 청이 명군이 주둔하고 있는 가도를 공격할 때 병선을 보낼 것, 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명에 대한 구례(舊例)에 준할 것, 청군이 잡아가는 포로 중의 도망자를 다시 잡아 보낼 것, 청의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을 것, 향후 성곽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내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合人)을 쇄환할 것, 일본사신을 청에 인도해 보내고 청에 세폐를 제공할 것 등이었다. 정묘호란 때의 강화 조건에 비해 더할 수 없이 굴욕적인 조건이었다.

항복 조약이 성사되자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을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성하(城下)의 맹(盟)’ 의례를 행하였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곧 여진족이 천자를 알현할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했다. 의례가 끝난 후 인조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창경궁으로 환궁하였다.

삼전도에는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리는 내용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세워졌고, 조선의 공식 문서에서는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명의 ‘숭정(崇禎)’이란 연호 대신 청의 ‘숭덕(崇德)’ 연호가 사용되었다.

청군은 항복 조약대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및 그 가족을 인질로 삼고 척화주전론의 핵심 인물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을 위시하여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들 중에서도 오달제·윤집·홍익한은 청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한결같이 척화를 주장하다 죽임을 당하였는데 후대에 이르러 이들은 삼학사(三學士)로 추중되어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선비의 전형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宋時烈)이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은 이래 이들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현창되었다.

병자호란은 단기간에 끝난 짧은 전쟁이었지만 전란의 상처는 더없이 깊었다. 강화도 함락이 인조의 남한산성 출성의 제일차적인 요인이 되었으므로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물어 주사대장 장신과 검찰사 김경징이 복주되고 부사 이민구가 북변에 위리안치되었다.

도원수 김자점 또한 토산에서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는 등 패전에 대한 처리로 조정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반면 강화부성 함락 시에 순절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려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을 내렸으며 단을 설치해 치제하였다.

전란 수습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의 속환(贖還)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청이 잡아간 포로들은 종실·사대부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는데 청은 이들을 되돌려주는 대가로 속가, 곧 몸값을 요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가족을 되찾기 위하여 1637년(인조 15)부터 심양을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조선 측에서는 효과적 속환을 위해 속환사를 두었으며 한정 없이 치솟는 속가를 고정시키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속가를 마련하지 못하여 속환을 못하거나 비싼 속가를 마련하느라 파산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속환된 사대부가 여성에 대해서는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을 유교윤리에 저촉되는 것으로 문제 삼아 이혼하거나 사회적 비난을 가하는 현상이 생겨나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6 병자호란후 ‘대청 사대’ 및 ‘대명 의리’의 공존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후 청 태종은 계획대로 본격적인 명(明) 공략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항복한 조선군과 조선의 군비를 활용하였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병하는 도중인 1637년(인조 15) 4월 명군이 주둔하고 있던 가도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하였다. 이때 청 태종은 한강변 용산에서 병선을 제작하게 하였으며 조선군의 참전을 명하여 황해도 지역의 병선이 동원되었고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대장, 의주부윤 임경업이 부장이 되어 청군을 도왔다.

2년 뒤인 1639년(인조 17) 말 청은 명의 근거지인 요동 금주(錦州) 지방을 공격하면서 다시 조선에 병력과 군량을 요구했고 조선은 1640년(인조 18) 4월 주사상장(舟師上將) 임경업의 지휘 하에 전선과 수군, 군량미를 지원하였다. 임경업은 전투시 명군에게 발포하지 않고 발포하더라도 다치지 않게 하는 등 싸움을 회피하였다. 임경업의 태도를 알게 된 청 태종은 심양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소현세자에게 강력히 항의하였고 이에 조선 조정은 임경업의 귀국을 지시하게 된다.

1641년(인조 19) 청 태종은 다시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하여 유림(柳琳)을 지휘관으로 포수·기병·마부 등이 파견되었다. 조선군은 심양에 도착해 청 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 청군과 함께 금주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때도 조선군 이사룡(李士龍)이라는 인물이 명군에게 공포를 쏘다가 참형된 일이 있었다.

청은 다시 유림의 교체와 포수의 증액을 요구하였고 유정익(柳廷益)이 이끄는 포수가 금주로 파견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청의 강요에 의해 수차례 군대를 파병하였으나 이들은 극히 소극적이고 형식적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의 입장에 다름 아니었으니 조선 조정은 일차적으로 명과의 오랜 구의와 임진왜란 당시에 입은 은혜 때문에, 또 현실적으로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는 명의 존재로 인해 이러한 양면책을 구사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은 청의 조선군 파병 요청을 수용하면서도 명을 돕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명·청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청이 승리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 조선의 입장은 달라진다.

인조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에 굴욕적인 항복을 행한 처지였기에 청에 대한 적대감이 더할 수 없이 깊었을 것이나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의해 조선국왕으로 임명되어 왕권을 보장받고 있는 처지였기에 현실적으로 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인조는 점차 사림들의 반청 여론을 비현실적인 명분론으로 기피, 반청적 성향의 인물들을 차츰 멀리하고 김자점·김류와 같은 공신세력들을 주로 활용하면서 극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인조와 김자점 등의 공신세력은 ‘대청 사대’의 현실을 수용, 반청파들을 제어하고 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는데, 특히 1644년(인조 22) 명의 멸망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청은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 후 북경으로 천도, 명실상부한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명의 멸망 이후 인조말 조선 조정의 ‘대청 사대(對淸 事大)’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 하에서 명·청 양면 외교의 상징적 인물인 임경업이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경업은 조선군을 이끌고 청군에 참여하면서도 은밀하게 명을 돕다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청 태종의 요청으로 임경업은 재차 청으로 압송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심기원·김자점의 도움으로 탈출, 명에 망명하였다. 명군 편에 서서 명·청 전쟁에 참가하던 임경업은 1644년(인조 22) 명이 멸망하면서 청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 좌의정 심기원의 모반에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에 1646년(인조 24) 인조는 청에 임경업의 송환을 요청하였고 결국 임경업은 인조의 친국을 받다가 장살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명이 망하기 이전까지 조선은 명·청 관계에서 양면책을 취하였고 이러한 조선의 양면책을 대변하는 존재가 곧 임경업이었다. 그러나 사세가 변하여 명이 멸망하자 조선 조정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명·청 교체라는 거대한 국제 질서의 변화 속에서 조선은 ‘대청 사대’를 취함으로써 살아남아야 했고 그 중심에 있던 인조는 구시대의 인물인 임경업과 갈라서게 되었다. 임경업은 구래의 ‘대명(對明) 사대’ 질서 속에서 자신이 믿고 있던 대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신념의 인물이었으나 새로운 시대 변화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처럼 명의 멸망 이후 임경업의 죽음에서 상징되듯이 조선 조정은 ‘대청 사대’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으로 완전히 편입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숭명반청 여론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인조의 죽음과 효종의 즉위 이후 숭명반청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곧 효종의 즉위와 함께 숭명반청 여론은 ‘대청 복수’와 ‘대명 의리’를 양축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으로 갱신, 효종 재위 10여 년간 조선의 가장 중요한 국가 시책이 되었다. 숙종초 북벌론이 폐기됨으로써 ‘대청 복수’ 노선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대명 의리’ 노선은 여전히 살아남아 조선후기를 이끌어가는 핵심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처럼 병자호란 이후 조선사회는 현실적으로는 ‘대청 사대’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용하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대명 의리’를 고수하는 양면성을 보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로 가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경업 또한 송시열에 의해 ‘대명 의리’의 표본으로 재조명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