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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복수설치(復讐雪恥)의 그날을 꿈꾸며

1649년(효종 1) ~ 1680년(숙종 6)

북벌론 대표 이미지

영릉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북벌은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孝宗)의 대중국(對中國) 노선이다. 인조[조선](仁祖)의 둘째아들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동생인 봉림대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을 겪은 후 청에 끌려가 8년간 인질생활을 거쳐 효종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대청 복수(對淸 復讐)’의 북벌론을 주창하였다. 당시 집권 서인들은 ‘대명 의리(對明 義理)’의 입장에서 북벌론을 이해, 이로써 북벌론은 ‘대청 복수’와 ‘대명 의리’의 양 측면을 보이게 되었다. 효종 사후 서인(西人)들이 북벌론을 파기하면서 남인(南人)의 당론으로 이어지다가 현종 말·숙종 초 이후 사라졌다.

2 광해군대 명·후금에 대한 ‘실리외교’와 인조반정 후 ‘명분외교’로의 선회

16세기 말 동아시아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세계대전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크게 와해되었다. 조선왕실을 비롯한 조선 지배층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에 사활을 걸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 재건의 이념이나 방식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 생겨났다.

우선 치열한 생존경쟁인 전쟁을 경험하면서 성리학의 핵심인 의리명분론 보다는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최우선에 두고 실리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탈성리학적 성향이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선상에서 광해군(光海君)과 대북정권이 성립하였다. 주지하듯이 선조대 성립된 북인세력은 학문적으로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의 학통에서 연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대북세력은 조식의 수제자인 산림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하였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공리주의적 성향은 당시 조선이 당면한 외교적 난제였던 명·후금 관계에서 자주적이고 실리를 우선하는 중립외교 정책에서 잘 드러났다.

임진왜란 후 동아시아사회는 명·청 교체라는 새로운 지각 변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중원의 패자였던 명이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게 되자 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하였고 급기야는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명·후금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명이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1618년(광해군 10)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명의 조선군을 거느리고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잘 처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 연합군이 심하전투(深河戰鬪)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후금은 이러한 조선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중시한 뛰어난 외교정책이었으나 명에 대한 사대와 임란시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사림들에게 큰 질타를 받았다.

이처럼 명·후금에 대한 실리외교로 대변되는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통치 방식은 조선사회의 입국이념이던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어서 사림세력의 이탈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대북정권에 의해 소외되었던 서인과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연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키게 된다. 광해군대 대북세력이 학문적으로 탈성리학적인 경향을 보였다면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및 남인 세력의 경우 서인은 성혼·이이의 학풍, 남인세력은 이황의 학풍에서 연원, 상대적으로 성리학이념에 충실한 경향이었다. 이러한 성향의 서·남인 연합 정권의 성립은 조선사회가 임란으로 인한 혼란과 동요의 시기를 지나 재차 건국이념이자 시대이념인 성리학이념으로 회귀, 다시 보수화하게 됨을 시사한다.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남인 연합 정권은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을 내세웠던 반정의 명분만큼이나 광해군대의 실리외교에서 벗어나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명분외교로 선회하였다. 조선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3 양차 호란 이후 ‘대청 사대’와 ‘대명 의리’의 공존

당시 후금은 명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같은 선상에서 조선의 태도에도 유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와중에 나온 조선의 친명배금책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였다. 후금은 양차에 걸친 조선 정벌을 통해 조선의 친명배금책에 쐐기를 박고자 하였고 결국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그 9년 뒤에 일어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정묘호란에서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으나 병자호란에서는 ‘군신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오랜 명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청과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렇게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공식적으로 ‘대청 사대’ 노선을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대명 의리’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양자를 병행하였다. 일차적으로는 명에 대한 사대와 임란시 명의 은혜를 강조하는 여론 때문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는 명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사정도 있었다. 조선은 청의 요구에 따라 명·청 전쟁에 조선군을 파병하면서도 명을 돕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등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4 명 멸망 이후 인조 말 ‘대청 사대’의 우세

이처럼 병자호란 이후 조선 조정은 공식적인 ‘대청 사대’ 노선과 함께 ‘대명 의리’ 노선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명·청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청이 승리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 조선의 입장은 달라지게 된다.

인조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병자호란시 청 태종에 굴욕적인 항복을 행한 처지였기에 청에 대한 적대감이 더할 수 없이 깊었을 것이나 병자호란 이후 청에 의해 조선국왕으로 임명되어 왕권을 보장받고 있는 처지였기에 현실적으로 청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인조는 점차 사림들의 반청 여론을 비현실적인 명분론으로 기피, 반청적 성향의 인물들을 차츰 멀리하고 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와 같은 공신세력들을 주로 활용하면서 극히 폐쇄적인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공신세력들 중에서도 특히 김자점은 병자호란시 도원수로서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인조의 부름을 받아 1640년(인조 18) 강화부윤·호위대장으로 복귀한 이래 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인조와 김자점 등의 공신세력은 ‘대청 사대’의 현실을 수용, 반청파들을 제어하고 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는데, 특히 1644년(인조 22) 명의 멸망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이때에 이르러 청은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 후 북경으로 천도, 명실상부한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명의 멸망 이후 인조말 조선 조정의 ‘대청 사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5 효종 즉위 후 효종의 ‘북벌론(대청 복수)’ 주창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조 말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인조와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대청 사대’ 노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둘째아들이자 세자였던 봉림대군의 생각은 부왕과 크게 달랐다.

병자호란 후 청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청으로 끌고가 인질로 억류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 심양에 체류하면서 청의 유력 인사과 친교를 맺고 조·청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더하여 서양의 새로운 문물도 접하여 폭넓은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이들은 청의 강요에 따라 명·청 전쟁에 참여해야 했는데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여러번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로써 형제간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지게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소현세자는 조선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서 조선 조정의 입장을 대변, 조·청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의 신뢰까지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하였는데 국내의 인조는 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현세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조선왕으로 책봉될 것을 매우 염려하였다.

명·청 전쟁에서 청이 승리하여 더 이상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억류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자 청은 이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1645년(인조 23) 2월 먼저 소현세자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34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예상대로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해 극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고 2개월여 후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당시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당연히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야 했지만 인조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한 인조는 세자로 책봉된 봉림대군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씨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이 살아남는 비극이 있었다.

봉림대군은 두 차례 호란의 치욕, 심양에서의 8년여의 인질생활,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과 그 일족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조심스럽게 견디어갔다. 드디어 1649년(인조 27) 인조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7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효종이다. 선왕 인조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극히 소극적이고 현실 안주적 성향으로 변화, 반청론자들을 멀리하고 측근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대청 사대에 안주하였지만 젊고 패기 넘친 효종은 부왕과 전혀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두 차례의 호란도 겪었지만 8년간의 인질 기간 동안 청에 이끌려 명·청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고 이 과정에서 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청이 승리하였으나 정권 교체 직후 청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효종으로서는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걱정하였다. 이에 효종은 모든 변수들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군비를 증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부왕인 인조가 친청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왕자나 세자 시절에는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다. 물론 이는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도 하나로 맞물려 있었다. 결국 효종은 군비 증강과 왕권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청 복수’를 목표로 하게 되었으니 이른 바 ‘북벌론’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 왕실은 ‘대청 사대’와 함께 ‘대명 의리’를 병행하였는데 이중에서 ‘대청 의리’가 왕실의 입장이었다면 ‘대명 의리’는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 일반, 그중에서도 사림들의 여론을 이끌고 있던 산림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효종의 ‘대청 복수(북벌론)’ 노선은 산림들의 ‘대명 의리’ 노선과 상통하였기에 북벌론의 구현을 위해 효종은 선왕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새롭게 산림세력과 연합해야 했다.

6 효종의 ‘북벌정책’ 경과

효종은 즉위 후 곧 ‘대명 의리’를 주장해오던 산림과 척화대신을 불러들이게 되니 서인 산림인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와 서인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 남인산림 권시(權諰) 등이 그들이다.

효종의 개혁정치 표방에 고무된 이들 사림세력은 인조 대 핵심 구신인 김자점의 비리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변화에 위협을 느낀 김자점은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에 효종이 선왕대의 구신을 몰아내고 북벌을 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인조 릉〔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제시하였다. 청이 곧 사신을 보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김자점의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은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을 제거하고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崇善君)을 추대, 역모를 일으켰는데 이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자점 일당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종래 중앙 군영의 병권은 대체로 국왕의 훈척신들이 장악해왔는데 효종은 이러한 관행을 깨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박경지(朴敬祉) 등 무과 출신의 참신하고 실력있는 무장들을 중용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에 이어 훈련대장에 올라 효종대 북벌 정책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의 핵심 군영으로 인조대 군비증강을 위해서 설치된 어영청에 주목하였다. 어영청의 군사는 애초 7천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해 재정 문제를 극복, 3배수인 2만 1천명으로 증액되었다. 어영군은 1천명씩 21개조로 나뉘어 관리되었는데 도성에 항상 1천명의 어영군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어영청은 핵심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에 필적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禁軍)을 기병화(騎兵化)했으며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액을 6백명에서 1천명으로 증액하였다. 또한 최강의 중앙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기 위해 군액을 1만명으로 증원하고자 했으나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의 증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어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을 강화하였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대포 3백문을 설치하였으며 강화도에는 행궁을 수축했다. 또 능마아청(能亇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병법을 교육하였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을 제작하고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화포 제작 등의 무기도 개량하였다. 한편 인조대 설치 이후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여 있던 영장제(營將制)를 실시,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군비증강 결과 조선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는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 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나선정벌(羅禪征伐)시 조선군의 활약상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 조선군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의 결과라는데 이견이 없다. 또한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가 아직 깊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고 더하여 자연재해가 잦아 군비증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효종은 재원의 확보를 위해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효종 3) 충청도, 1653년(효종 4)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효종 8)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전세(田稅)가 1결(結)당 4두(斗)로 고정되어 백성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에서 알 수 있듯이 북벌은 효종 대의 시대정신이자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정책을 관통해 흐르는 일대 강령이었다.

7 서인 산림의 ‘북벌론’ : ‘대청 복수’가 아닌 ‘대명 의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효종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북벌 정책에 일로매진하였다. 반면 효종이 북벌을 위한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한 산림세력, 그중에서도 특히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산림들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649년(인조 27) 효종 즉위 후 척화파와 산림들이 대거 기용될 때 송시열은 효종의 왕자시절 사부였던 이유도 있어 서인 산림 중에서도 가장 우대되었다.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은 직후 밀봉된 기축봉사(己丑封事) 16조항을 올렸는데 이중에서도 특히 ‘정사를 바르게 하여 이적을 물리칠 것(修政事以攘夷狄)’ 조항은 송시열, 더 나아가서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서인 산림세력이 생각하는 북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오늘날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경솔히 강로(强虜)를 끊다가 원수를 갚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선왕께서 수치를 참고 몸을 굽혀 종사를 연장시킨 본의가 아니다. 마음에 굳게 정하시어 원한을 축적하고 원통을 참고 견디며 말을 공손하게 하는 가운데 분노를 더욱 새기고 금폐(金幣)를 바치는 가운데 와신상담하여 5~7년 또는 10~20년까지도 마음을 늦추지 말고 우리 힘의 강약을 보고 저들 형세를 관찰하라. 그러면 비록 중원을 쓸어 명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관문(關門)을 닫고 우리 의리의 온편함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정벌론이라기 보다는 자강론에 가까운 성격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이 일은 국왕의 한 마음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니 국왕은 반드시 자신을 극복하여 마음을 바르게 가져 집안을 다스려 충직하게 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재용을 절약하고 사치를 혁파하여 민력을 펴 기세가 충만해진 다음에야 말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북벌은) 한갓 헛된 말이 될 뿐이다’고 하여 북벌의 핵심은 군주가 마음을 바로잡아 정사를 바르게 하는데서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는 송시열이 북벌론에 앞서 효종의 성학(聖學)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축봉사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자강론의 차원이며 더하여 군주 성학을 우선하는 준비론의 차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하였으므로 효종은 송시열에게 계속 관직을 내려 북벌 정책의 실질적인 우군이 되어줄 것을 기대하였지만 송시열은 이를 계속 거부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이 생각하는 실제적인 군비증강 정책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주로 향리에 머물면서 효종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훈수를 두는 역할을 하였다.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 및 이와 맞물려 진행된 왕권강화 정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서·남인 집권세력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었다. 축성이나 군사훈련 등에 내몰린 백성들의 원성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서·남인 집권세력의 비판은 효종의 북벌정책에 대한 적신호였다. 특히 효종 치세 후반기인 1656년(효종 7) 서인 이조정랑 김수항(金壽恒)은 ‘성을 쌓고 조련시키는 일과 무기와 화약을 만드는 역사가 일시에 모두 거행되어 여러 도가 모두 그러한 상황이다. …… 영장(營將) 설치의 경우 폐단이 수없이 많아 군사를 불러 모아 쉬지 않고 연습시키니 백성들은 농사를 폐하게 되고 관문(官門)에 오래 대기하여 굶주리고 고달프기 그지없다. …… 나라의 근본은 한번 흔들리면 다시 견고해질 수 없고 민심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모을 수 없는데, 비록 훌륭하고 튼튼한 성지(城池)와 견고하고 날카로운 갑병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는가? …… 보장(保障)의 기반은 인심을 얻는 것으로 우선해야 한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였다.

효종의 고집으로 버텨가던 북벌정책에 기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1657년(효종 8) 송시열은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다시 한번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제왕학을 우선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의 위급한 형세를 말하기 전에 당장 제왕학에 뜻을 기울여 당장 공부에 착수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러한 송시열의 거조에 호응하여 송준길 또한 ‘병사(兵事)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은 병행해야 하다. 지금 사세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한데도 본말이 도치되어 있으니 시골 노인들까지도 이 문제를 이야기 한다.’고 했다.

이처럼 서인 집권세력의 영수 송시열·송준길이 나서서 효종의 북벌론을 근원에서부터 흔들어 놓으니 효종은 우선 이 두 사람을 통해 서인세력을 달래게 된다. 1658년(효종 9) 효종은 찬선 송시열·송준길을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송시열은 효종에게 ‘10년간 간절히 정신을 가다듬어 선치를 이루려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으니 이유를 모르겠다.’며 효종의 북벌정책을 과감하게 비판했다. 효종은 ‘내가 정신을 가다듬었다면 다스린 결과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나는 의당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나, 반드시 인재를 얻어야만 할 수 있다.’며 속내를 숨기고 송시열을 위로하고 그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근래 경연 석상에서 왕께서 “오늘날 씻기 어려운 수치가 있는데 신하들은 이런 것은 생각지 않고 언제나 나에게 몸을 닦으라고만 한다. 이 수치를 씻지 못하고 있는데 몸을 닦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하니 이는 학문이 미진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마치 아이처럼 효종을 나무란 후 ‘몸을 닦는 것이 정사의 근본이 됨’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 사건 이후 효종은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임용하였고 예물로 초모(담비가죽 모자)와 초구(담비가죽 옷)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효종은 제동이 걸린 북벌정책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송시열을 정국으로 끌어들어야 했던 것이다. 효종이 자세를 낮추어 급박하게 요청해 오자 송시열은 이를 기꺼이 수용하고 출사하였으나 효종의 소망대로 북벌 정책을 후원하거나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 산림의 북벌론은 애초부터 자강론이나 준비론의 차원이었으며 효종의 북벌 의지에 호응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이 주도하던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적 질서를 강화, 서인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하였다. 요컨대 서인 산림의 북벌론이란 ‘대청 복수’가 아닌 ‘대명 의리’의 차원이었다.

이처럼 서인 산림의 북벌론은 ‘대명 의리’라는 명분외교론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것으로 당시 서인 산림들이 주력하던 예치론(禮治論)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주지하듯이 16세기 이래 발달해온 조선예학은 17세기 양란 이후 조선이 택한 명분론적인 사상·정치적 방향과 맞아 떨어짐으로써 최선의 발전 토양을 제공받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현종~숙종대 조선사회를 뒤흔든 양차의 예송, 곧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성리학의 의리명분론이 사회윤리론으로 나타난 것이 예학이고 또 국가적 차원의 통치윤리로 나타난 것이 예치론이라면 ‘대명 의리’라는 명분외교론은 예치론의 일환으로 바라보게 된다.

8 효종의 죽음과 서인의 북벌 파기

이처럼 효종은 치세말 북벌정책이 난관에 부딪히자 송시열을 통해 북벌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효종은 근시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행하였는데,

이때에도 효종은 ‘신하들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천시와 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니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기회를 봐서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 저들은 무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 천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변함없는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2개월여 만에 효종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을 오로지 북벌에만 매달리다가 41세 한창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효종은 귀밑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침을 맞고 급서하였는데,

이즈음 효종과 서인세력의 갈등이 극히 고조된 상태에서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던 점, 또 효종의 죽음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산림세력이 효종의 유지였던 북벌을 미련 없이 중지하였던 점에서 효종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효종에게 ‘북벌론’은 단순한 이념적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라 양란 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는 젊고 열정적인 국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반면 집권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의한 예치국가 조선을 꿈꾸었으니 이러한 동상이몽은 오래갈 수 없었다. 결국 효종의 죽음과 함께 서인들은 예정된 북벌 파기의 수순을 밟아갔다.

9 현종 말·숙종 초 남인 산림의 북벌론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이후 북벌론은 윤휴(尹鑴)·허적(許積) 등 남인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졌다. 효종대 남인들중 가장 강경한 북벌론자였던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파기된 북벌론을 계속 고수하였고 현종말·숙종초에는 북벌론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상을 계기로 갑인예송이 일어났는데 앞서 기해예송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윤휴와 허목의 예설을 앞세운 남인의 예설이 승리하여 남인 위주의 정국이 구성되었다. 이렇게 남인이 우세한 정국 하에서 윤휴는 남인 예설의 주창자로서 현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평소의 지론인 북벌론을 거리낌 없이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청이 삼번(三蕃)의 난과 정금(鄭錦)의 난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점도 북벌론 제기의 유력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 윤휴는 현종에게 비밀상소를 올려 효종의 유업 계승을 주청하였다.

이때 급작스럽게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윤휴는 신왕에게 다시 한 번 북벌을 주장한다. 곧 1675년(숙종 원년) 성균관 사업 윤휴는 ‘우리나라에는 10만 정병이 있고 식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으므로 열흘이 못 되어 심양을 차지할 수 있고 심양을 빼앗고 나면 관내(關內)가 진동할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윤휴의 북벌론에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그는 특히 북벌을 위한 병거(兵車)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북벌을 주관할 군영으로서 도체찰사부의 설치, 산성 수축, 무과 합격자의 증원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북벌론은 현종이나 숙종은 물론 남인들조차도 어려워하였다. 청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크게 보면 청조는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북벌론은 비현실적이고 극히 위험천만한 주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윤휴를 지지하던 허적 조차도 ‘신은 윤휴와 견해가 다르니 윤휴는 바로 중원으로 쳐들어가려고 하고 신은 비밀히 준비하여 때를 기다리고자 한다. 누가 명을 위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시세로 보아 불가하다’며 북벌 반대론으로 돌아섰고 숙종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10 북벌론의 최후 : ‘대의’에서 ‘당론’으로

이즈음 종실인 영평정(寧平正) 이사(李泗)가 윤휴의 북벌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숙종초 숙종을 위시한 조선왕실이 북벌론을 바라보는 입장을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는 ‘국가가 앞에는 양송(兩宋 : 송시열·송준길)에 의해 잘못되었고 뒤에는 허·윤(허목과 윤휴)에서 잘못되었다’고 전제한 후 복수설치론이 나라의 화가 되는 문제, 병거의 문제, 축성으로 인한 민원 등을 지적하였다. 숙종이 이사에게 허·윤을 비난하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효종조에 양송이 크게 임용되고 예우를 입었음에도 힘쓰는 바가 오직 당론뿐이었는데 지금 허목·윤휴도 마찬가지다’고 답하였다.

상기 구문은 오랜 당론 대립의 경험 속에서 조선왕실이 서·남인의 주장에 대해 그 당위성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당론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점을 잘 보여 준다. 애초 북벌론은 패기 가득한 젊은 신왕 효종의 ‘대청 복수’와 서인들의 ‘대명 의리’가 결합, ‘대의’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후 남인들에 의해 계승되는 과정에서 북벌론은 남인의 ‘당론’으로 화하게 되었다.

‘대의’에서 ‘당론’으로 격이 떨어진 북벌론은 곧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곧 숙종은 남인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점차 경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 일명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정국을 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윤휴는 죽음을 맞게 되는데 윤휴의 죽음과 함께 북벌론 또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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