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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사건

당쟁의 극단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사건 대표 이미지

뒤주

국립민속박물관

1 개요

사도세자(思悼世子) 사건은 1762년(영조 38) 부왕(父王)인 영조(英祖)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으로, 조선 시대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 사도세자의 일탈, 정신병 때문에 빚어진 영조와의 갈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수장과 차기 수장 간에 갈등으로 빚어진 참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 영조의 탕평 시도

사도세자는 1735년(영조 11) 정월에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1728년(영조 4)에 영조의 첫째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41살의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출생은 영조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어려움을 딛고 왕위에 오른 자신처럼 명석하고 강한 아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바람으로 사도세자는 태어난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 3월에 2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출생 이후 영조의 탕평 정국은 세자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보이고 있었다. 영조는 1737년(영조 13)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으로 발탁하여 그가 세자의 후견인이자 스승임을 천명하였는데, 이는 영조 즉위 이후 강성해진 노론을 제어하고 소론을 강화하여 탕평을 이루고자 했던 의지를 반영한 결과였다. 영조는 세자 탄생을 기화로 더욱 의욕적으로 탕평을 추진하고, 이를 세자에게 정치적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1738년(영조 14) 12월 경종을 시해하고자 하여 이른바 삼수역안(三手逆案)에 올라있던 서덕수(徐德修)가 신원되면서 노론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서덕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도 역모에 가담했음을 자백한 후 사형 당하여, 연잉군 역시 이른바 ‘임인옥안(壬寅獄案)’에 올라 있었으므로 서덕수의 신원은 사실상 영조 자신의 혐의를 깨끗이 씻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740년(영조 16) 정월에 신임사화(申壬士禍)와 관련된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의 복관이 성사됨으로써 신임사화 때 화를 입었던 노론의 4대신이 모두 복관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정국의 흐름은 점차 노론과 소론의 균형이 깨지고 노론의 우세로 굳어져갔다. 영조가 1743년(영조 19) 11월에 세자빈을 노론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책봉한 것도 노론의 득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노론의 우세가 강화됨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대리청정 전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영조는 세자를 아끼며 그를 성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세자가 탕평을 계승하여 ‘달효(達孝)’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자신의 서명[押]인 ‘통(通)’자와 맞추어 세자의 서명을 ‘달(達)’로 정했고, 탕평의 규모를 익히게 하기 위하여 숙종대 탕평을 건의한 바 있는 소론 박세채(朴世采)의 손자 박필부(朴弼傅), 남인의 영수로 부상하던 오광운(吳光運)을 특별히 불러 세자에게 소개하고, 직접 가르친다는 뜻에서 경연에 세자를 참석시키기도 하고, 수시로 세자를 훈육하기 위한 글을 직접 지어주기도 하였다. 세자는 5세가 되면서 서연(書筵)을 시작했는데 세자의 강학(講學)은 비교적 엄격하게 지속되었다.

3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노론의 우세가 진행되던 가운데 세자가 15세가 되던 1749년(영조 25) 정월, 세자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임금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평소의 마음을 이룰 수 있는 점, 군국(軍國)의 일이 정체되지 않은 점, 세자에게 정사를 익히도록 하는 점을 들고 있다. 사실상 대리청정으로 영조는 상왕(上王)이나 황제(皇帝)가 된 것 같이 이전보다 더 높은 지위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다음 해부터 영조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는데, 여기에는 영조의 높아진 위상과 탕평책을 지지하는 주요 인물이 큰 역할을 하였다. 영조는 이와 같이 일면 자신은 정무와 약간 거리를 두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왕권을 높이고, 또 세자에게도 정치실습을 통해 탕평의 원리를 익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영조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도세자를 꾸지람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특히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하느라 건강이 많이 상하였다. ‘우레 뇌(雷)’나 ‘벽 벽(霹)’이라는 글자를 보지 못하고 천둥을 두려워하는 이상 증세도 이때부터 나타났다.

이즈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흔히 ‘문녀(文女)’라 부르는 문소의(文昭儀)의 등장이었다. 영조가 총애하는 문녀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대비인 인원왕후가 문녀를 데려다 꾸짖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1752년(영조 28) 12월 영조는 문녀 문제로 선위(禪位) 파동을 일으켰다. 세자는 대죄(待罪)를 하며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찢어지고 이마에서 피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영조는 세자가 성군으로 성장해가도록 나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여전히 경연에 세자를 참석하도록 하고, 요순(堯舜)의 심법(心法)과 역대(歷代)의 치란(治亂)에 대해 직접 가르치거나, 수시로 세자의 학문적 성과에 만족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55년(영조 31) 2월에 일어난 나주괘서사건, 이른바 을해옥사는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거병하여 조정의 간신을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의 괘서가 나주 객사에 나붙는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가 일망타진 되었다. 을해옥사 이후 경색된 정국은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세자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4 세자의 관서행과 나경언 고변 사건

을해옥사 이후 영조는 세자 보호의 책임을 김상로(金尙魯)에게 맡겼는데 김상로는 세자에게 접근한 뒤 동태를 영조에게 알리면서 세자를 모함하였다. 1758년(영조 34) 8월 명릉(明陵)에 가는 영조를 수행하던 세자가 비를 맞아 건강이 좋지 않자 도중에 돌아오면서 잠시 경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것을 가지고 세자가 영조에게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키려 한 것으로 모함하여 세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마침내 영조는 같은 달 세자 폐위 전교를 밤에 승정원에 내렸는데, 도승지 채제공이 여러 승지와 사관을 거느리고 와 국왕을 설득하여 이를 철회하였다. 영조는 대리청정 이후 오랫동안 폐지하였던 경연을 이해 봄 다시 열었는데, 여기에서도 경연관의 직임을 띤 관료들이 세자가 영조에 반기를 들고 변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논의를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세자의 병세가 이상 행동으로 발전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중록(閑中錄)』에 따르면 1757년(영조 33) 세자가 옷을 두려워하는 의대증(衣帶症)이 나타나고 화증으로 인해 내관을 매질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해주던 중전과 대비의 죽음에 따른 불안감과, 궁중 세력들의 견제가 안겨주는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1760년(영조 36) 영조와 정순왕후가 경희궁으로 이어하고, 세자는 창경궁에 머무르면서 부자 사이에 참소가 더욱 쉽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1761년(영조 37) 4월 세자는 관서로 미행(微行)을 단행하고, 이후 세자의 관서행(關西行)이 정국의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세자의 관서행은 유람설(遊覽說)과 거병준비설(擧兵準備說)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영조는 세자의 관서행을 일단 최소한의 사건으로 축소함으로써 세자가 몇몇 측근 환관을 데리고 미행(微行)한 과실로 처리되었다. 관서행은 미봉되었지만 세자를 둘러싼 암투는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 5월에 나경언 고변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세자를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았다. 나경언 고변사건은 5월 22일 액정서별감 나상언의 형인 나경언이 세자가 역모를 모의를 한다고 고변한 일인데, 고변의 내용에는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인 일, 여승을 궁으로 끌어들인 일, 관서로 행역한 일, 북한산성을 유람한 일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거론되었다.

나경언은 노론 강경세력의 영수였던 윤급(尹汲)의 노복(奴僕)이었다는 점과 죽기 전에 노론 반(反)세자 핵심세력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한 『대천록(待闡錄)』의 기록, 영조가 배후자 색출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나경언을 살리고자 한 점, 나경언이 가산을 탕진하고 세자를 모해할 계책을 내었다고 한 점은 나경언이 매수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대궐 일을 보는 액정서별감 나상언의 형이면서 자신도 대궐 하인으로 있었던 것 역시 나경언 사건이 세자의 비행을 공론화 할 목적으로 처음부터 조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어느 정도 공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결국 나경언 사건은 영조와 홍봉한의 방조 하에 노론 강경세력에 의해 일어났던 것으로, 그 계기는 세자의 관서행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임오화변의 전개와 결과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되었던 이른바 임오화변은 나경언 사건이 일어난 지 20일 정도 지난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에 일어났다. 영조는 이날 창덕궁에 행차하여 선원전을 참배하고 궁성을 호위한 후 길 위에 진을 치고 나서 정성왕후의 신위가 봉안된 휘녕전에서 행례를 마친 다음 세자를 휘녕전 뜰에 세워놓고 자진을 강요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라는 처분을 내리고, 전교를 내려 이를 중외(中外)에 널리 알렸다.

세자를 처분할 때 영조가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은, 세자의 병이 아니라 세자의 생모 영빈의 고변이었다. 영빈은 세자가 나인, 중관(中官) 등을 살해한 것이 근 100명에 이르고, 기생․여승과 음란한 행동을 하였으며, 근래에 궁궐 후원에 무덤을 조성하여 영조를 시해하여 묻고자 하니 그 위험이 눈앞에 닥쳤다는 것이다.

영빈의 고변과 처분 당일의 영조의 문초에서 세자가 변란을 기도한 증거로 거론된 무덤은 세자가 이 해 5월에 후원에 조성한 지하 3칸의 굴실(窟室)을 가리키는데, 처분 당일 내관은 이 굴실이 유희를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또 굴실에 두었던 효복(孝服)과 지팡이 때문에 세자가 복(服)을 입고 곡을 하며 임금을 저주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또한 정성왕후의 상(喪)에 사용하던 것인데 추모의 마음이 그치지 않아 버리지 못하다가 발각될까 두려워 굴실에 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생모 영빈이 세자를 고변했다는 것 역시 당시에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영빈의 고변은 나경언 사건으로 세자 폐위의 명분을 축적하고 있던 영조가 세자의 변란 기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세자와 가장 가까운 세자의 생모를 끌어들여 처분의 정당성을 보강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빈은 사사로운 은혜를 끊고 임금을 위해 고변하여 대의(大義)를 실천하였고, 영조는 사적인 애통을 뒤로 하고 세손과 왕실․국가를 위해 ‘의(義)로써 은혜를 절제하는’ 공적인 대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혜경궁과 세손은 오히려 세자의 변란을 사전에 막음으로써 연좌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영조의 결단을 칭송했다는 임오화변을 바라보는 입장이 공식화되었다. 이것이 당시의 이른바 임오의리(壬午義理)였다.

영조는 세자 처분 직후, 신만(申晩) 등 삼정승이 이를 하례(賀禮)하기를 청하니 기꺼이 수락하였고, 대궐문에 나아가 호위한 군사들을 위로하고 상을 내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조정 신하들이 부당(父黨)․자당(子黨)으로 나뉘었다고 격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의 처분이 세자의 비행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이 얽혀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9일이 지나서 세상을 떠났다. 세자 사후 세손을 동궁으로 정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으면서 사도세자의 추숭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 당시의 자신의 결정은 존망의 기로에서 종사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하고 있다.

6 사도세자의 추숭과 기억

영조의 죽음으로 세손이 정조로 즉위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 영조의 빈전(殯殿) 문 밖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첫 번째 윤음에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후 조심스럽게 사도세자를 추숭해갔다. 사도세자의 묘소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하고,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여 고쳤고, 이후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현륭원 부근 수원에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사도세자는 지금까지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영조는 조선 후기를 중흥으로 이끈 군주로 평가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 사건은 단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왕조시대 국가의 지도자와 차기 지도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개인적인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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