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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의 문란

지방의 부세(賦稅) 행정을 해결하라

미상

삼정의 문란 대표 이미지

삼정이정절목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19세기의 역사적 상황

19세기 조선에서는 농민항쟁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농민들의 불만은 사회 전반에 걸쳐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부세문제 특히 삼정(三政)이라고 일컫는 전세, 군역, 환곡 문제는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백성들은 부세운영과 부세액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개선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지만 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도 해결하고자 변통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19세기 부세제는 중앙의 일률적인 통제가 아닌 지방 자체적으로 징세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개혁하더라도 즉각 성과가 나타날 수 없었다. 결국 1862년(철종 13) 경상도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삼정문제를 기점으로 폭발하였고, 민란은 경상도 일원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확대되었다. 봉기한 백성들과 이를 해결하려는 관리들 모두 삼정의 문란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할 정도로 19세기 당시 삼정은 중요한 문제였다.

2 17세기 이후의 변통

조선 시대의 세금제도는 신분제에 기초한 조용조(租庸調)체계가 기본원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세금제도도 변화하고 있었다. 우선 수세의 기준이 노동력에서 점차 토지로 변화해갔고, 토지를 기준으로 부세하려는 정책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세금 가운데 가장 부담이 과중했던 공물제도는 토지를 기준으로 하는 대동법(大同法)으로 전환되었다. 군역제도도 정군과 보인(保人)이라는 인신에 기반하였던 초기의 원칙이 인신적 구속이 약해져가는 방군수포(放軍收布)제로 변화되었다. 이는 다시 18세기에 균역법(均役法)으로 바뀌었다. 균역법은 받아들이는 군포의 양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그 보충분의 일부가 토지 등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충당되는 세제의 변화였다. 즉 조선 후기의 경제기반이 변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원칙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양상은 당시 변화상을 반영한 변통론으로 귀결되었는데 이전의 폐단을 어느 정도 바로잡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재정 차원의 큰 개혁론이라는 점이 한계였다. 대동법을 포함한 개혁정책은 실제 부세를 담당하는 지방부세 행정까지 세밀하게 규정하지 못한 채 중앙재정의 변통에 치우치고 말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 백성들은 전세, 군역, 환곡이 지방에서 징수되면서 지방의 부세관습과 폐단에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삼정이 지방별로 다양하게 변칙적으로 운영되면서 백성들의 불만도 지방별로 각각 달랐다. 하지만 점차 문제는 커져가고 있었다. 삼정을 운영하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이 더해지면서 백성들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관리들에게서 찾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철종(哲宗) 또한 1862년(철종 13) 일어난 민란의 원인을 탐관오리들이 정치를 잘못하고 간사한 이서배들이 중간에서 이득을 챙기다보니 백성들은 수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전의 개혁론에서 지방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삼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방을 중심으로 점점 큰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가에서는 세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해놓고 지방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부세방식을 운영하였다. 국가에서는 세금을 부과할 대상인 백성과 토지를 일일이 파악하지 않고 군현단위로 미리 정해진 수취총액을 공동부과 하도록 하였다. 국가에서는 매년 변하는 수세원에 대한 파악을 하지 않더라도 안정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제도였다. 하지만 매년 농사의 작황이 변하였고, 매년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는 백성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방에서 권력층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부세 수취 대상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은 점점 더 많은 세금을 내거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세금을 부담하기 위해 공동납 등으로 지방관청의 부세정책에 대응하고 있었다.

3 삼정의 운영과 폐단의 심화

삼정의 하나인 군정은 원래 3년에 한 번씩 작성되는 호적을 근거로 군역자를 산출해내고 이들에게 군역을 지우거나 군포를 대신 납부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군역을 지지 않으려는 피역자들이 늘어나면서 군정 운영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군대에 가는 인원을 기록한 ‘군안(軍案)’에서 빠지기 위해 지방의 유력자들은 관리들과 결탁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만이 군안에 남게 되었다. 평민들도 군역에 드는 것을 마치 죽는 것과 같다고 여길 정도로 그 부담은 컸다.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군역부담자들이 피역하면서 지방관들도 납부해야 할 군포를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중엽 『양역실총(良役實摠)』에서 규정한 군액이 50만 정도였는데 이후 군액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 임의로 창설하여 지방재정에 충당하는 ‘사모속(私募屬)’이 큰 문제로 대두하고 있었다. 군포를 거두는 과정에서도 액수를 부풀려 걷는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군액을 늘려 걷는 세금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각 지방마다 차이가 났지만 삼남 지방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군액이 커질수록 백성들의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삼정 가운데 환곡제에 대해 살펴보면, 환곡은 조선 후기부터 나타난 부담이지만 끼치는 폐단도 상당하여 삼정에서도 백성들의 원성을 가장 많이 사고 있던 제도였다. 환곡제도는 원래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호를 기준으로 곡식을 나눠주고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받는 일종의 구휼제도였다. 소농민이 안정적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국가차원에서 지원해주는 제도이다. 보통 환곡은 봄에 대여한 원래 곡식에 가을에 수납하는 과정에서 ‘모곡(耗穀)’이라는 명목으로 1/10을 더 거두어 원곡을 보전하였다. 이러한 제도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환곡이 확대되어나가면서 각 관서에서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환곡에 주목하였다. 1/10씩 거두는 곡식을 재정에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환곡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앙관서 뿐만 아니라 지방관청에서도 앞 다투어 새로운 환곡을 창설하고 새로운 명목을 붙여 복잡한 방식으로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창설한 환곡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는 등 지방 재정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명목마저 다양하여 백성들은 환곡을 통해 혜택을 입기보다 오히려 환곡 때문에 수탈당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환곡은 명분뿐만 아니라 변칙적으로 운영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원래 환곡은 구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반정도는 창고에 남겨두어야 했다. 하지만 1/10씩의 이자를 모곡이라는 형태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나누어 줄수록 관에서 거두는 비용은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관청에서 새롭게 창설한 환곡은 만약을 위해 반을 남기는 규식을 위반하여 모두 나누어주고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조대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정조는 폐단의 근원이 환곡을 모두 나누어 주는 ‘진분(盡分)’ 때문이라고 보고 절반의 곡식을 남기는 법을 지킬 때에만 백성들의 짐을 덜어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환곡이 필요 없는 풍년이라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환곡을 나눠주는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풍년이 들 경우 농민들은 환곡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곡물이 과다하게 많을수록 강제로 환곡을 나눠주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운영상 문제가 겹치면서 환곡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환곡을 부과하는 기준이 토지의 소유에 따라 변화하면서 분급 받는 과정에서도 세력이 있는 자들은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들만 환곡을 받게 되었다. 또한 환곡을 운영하는 향리들의 부정까지 겹쳐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환곡을 나눠주고 받는 것을 각 면리에 자율적으로 맡기는 방법이 나타나면서 서리들의 부정은 백성들에게 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향리들이 저지른 부정으로 생긴 환곡의 부족분인 ‘포흠(逋欠)’을 백성들에게 뒤집어 씌워 한꺼번에 거두는 폐단이 나타나게 되면서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군역과 환곡의 부담이 커져가고 있었지만 삼정문란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전세행정에 있다. 전세는 토지를 가진 자들이 부담하는 가장 기본적인 세금이었다. 고대부터 전세는 생산한 생산량의 1/10가량 납부하는 것을 이상적인 액수로 보았고, 토지 소유자가 지불하는 것이 정식이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를 파악하려는 양전(量田)사업 자체가 오랫동안 실시되지 않아 전세를 부과해야 할 토지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전세의 총량을 확보하기 위해 매년 내야 하는 전세액의 총액을 정하여 지방에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방에서는 세금을 납부하는 일정한 단위를 구성하여 전결세를 공동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영체제 아래에서 백성들은 일정한 크기의 토지를 구획하여 공동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국가에서는 전세를 부과하기 위해 양전사업을 실시하지 않아도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부세를 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호하는 제도였다. 토지의 크기는 사정에 따라 4결 혹은 8결 등 일정한 단위로 총계를 내어 해당토지의 세금을 공동으로 납부하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 해 동안 상납해야 할 조세의 총액을 확정하였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1결당 세액을 정하여 ‘계판(計版)’으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조세를 일정한 시기까지 납부를 전담하는 호수(戶首)들을 선정하여 담당 향리에게 바치도록 하였고 호수들은 대납과정에서 일정한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관에서는 호수라는 무리가 가로채는 이익도 배제하기 위해 관이 직접 세금을 화폐로 거둔 후에 이를 곡식 값이 싼 포구나 경강에서 현물로 바꾸고 이를 중앙에 상납하는 형태로 운영하였다. 관에서 가져가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도결(都結)’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호수들이 챙기던 운반비를 포함한 잡다한 이익을 관이 가져가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들어 각종 명목의 잡비들이 토지에 덧붙여져 1결 당 조세액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현물로 거두던 세금을 화폐로 거두면서 백성들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세금을 내는 시기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당시 조선에서 화폐의 양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주들에게 세금이 부과되지 않고 소작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전결세 때문에 겪는 고충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부세제도가 총액제로 운영되었고, 전세행정이 각 지역별로 통일된 원칙 없이 자의적으로 운영되다보니 수령과 이서배들에 따라 큰 편차를 나타내고 있었다. 결국 전세행정을 포함한 세 가지의 중요한 부세에 대해 백성들은 불만이 차오르게 되었다.

4 진주민란의 폭발과 정부의 대응

삼정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1862년(철종 13) 단성을 시작으로 백성들이 봉기하였다. 단성지역의 봉기는 진주로 확대되고 삼남지방 전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삼남지방으로 확대된 농민봉기가 식지 않고 확대되어 나가자 왕조는 심각성을 깨닫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였다. 농민들의 봉기를 관에서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철종은 삼정문란을 개혁하려는 의도로 6월 12일부터 약 75일간 무려 수백 명의 관리, 유생들의 상소문을 받아들였다. 여론을 듣고 삼정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당시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중앙에 있는 관료로부터 지방의 이름 없는 유생들까지 다양한 계층들이었다. 그만큼 당시 삼정문제는 모든 백성들이 느끼는 문제였고, 민생과 국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사안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정부에서는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반포하여 삼정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

절목에서 종합한 삼정이정책의 대표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토지세금문제에 대한 근본 원인을 양전(量田)사업에 두고 있다. 양전을 통해 수세원인 토지 파악이 되지 않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전이 증가하여 백성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었다고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양전을 실시하여 세금을 다시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양전에 드는 시간과 돈이 과도하여 일단 토지에 붙은 각종 부당한 세금을 정리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또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세금을 내지 않던 토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세원을 확보하는 일 외에 이미 부과되는 세금을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서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다. 당시 세금에 대한 규정을 재확인하고 규정 외에 거두는 세금을 금지하도록 천명하기도 했다. 토지에 붙는 잡다한 명목은 대부분 중앙 관청에서 부과한 원래 세금이 아니라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부과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토지세금에 대한 정리 작업은 당시로서 세금제도의 기반을 개혁하는 의미 있는 대책이었다.

다음으로 군역문제에 대해서도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당시 군역은 이미 균역법으로 바쳐야 하는 군포를 반으로 줄였다. 하지만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지배층과 부유층이 늘어나면서 군액이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이에 관에서는 군제를 개편하는 대대적인 작업보다는 군포를 거두는 기존의 방식을 개선함으로써 백성들의 현실적인 불만을 잠재우는데 노력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던 것은 환곡이었다. 환곡이 새로운 재원으로 확대되면서 중앙의 관서나 지방에서 앞 다투어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분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백성보다 나누어 주어야 할 곡식양이 더 많은 지역이 속출할 정도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당대에 운영하고 있던 환곡제를 3년을 기한으로 150만 석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애는 방안을 개혁안으로 제시했다. 환곡의 재정적 기능은 분리시키고 진휼과 비축 기능만을 남기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개혁안은 지방관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고 말았다. 환곡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은 백성들에게는 큰 이득이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환곡에 의지하고 있던 지방관청에서는 상경하여 시위를 벌이는 사태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삼정책의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환곡 개혁안은 철회되고 말았다.

삼정체제는 조선의 부세제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체제는 미봉책으로 삼정을 유지하고자 했고 19세기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부세제에 대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뒷날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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