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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진출

바다로 이어지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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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진출 대표 이미지

광동의 유럽 상관 전경 - William Daniell (1769–1837)

National Maritime Museum

1 개요

15세기 이베리아반도의 유럽인들은 동쪽으로 가는 항로를 찾아 나섰다. 목적은 향료와 같은 동방의 물품을 구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인도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다시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향하였다. 무력과 회유를 통하여 포르투갈인들은 중국 본토에 마카오라는 거점을 획득하였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서쪽으로 향하여 미지의 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스페인인들은 신대륙을 기반으로 다시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이르렀다. 스페인인들은 대중국 교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뒤늦게 항해에 나선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구축한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에 도전장을 던졌다.

2 이베리아 국토 회복 운동 : 대항해시대의 서막

15~16세기, 대서양 연안에 있던 유럽의 국가들은 해양탐험대를 파견하였다. 탐험대는 해외 무역을 통하여 희귀한 물품들을 유럽으로 운송해 와서 판매하였고, 이를 통해 높은 수익을 올렸다. 또한 이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원주민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자원을 획득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원주민들의 자원을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항해를 통하여 지리와 항해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대양 항해의 서막은 이베리아반도 가톨릭 국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반도를 차지하던 이슬람 세력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해양 지식을 조금씩 쌓아갔다. 8세기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661~750)가 처음으로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후,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남부 지역은 이슬람 왕조가 차지하고 있었다. 북부의 가톨릭 영주들은 ‘무어인’이라고 불린 이슬람인들로부터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고 가톨릭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국토 회복 전쟁을 일으켰다. 그 일환으로서 1229~1235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 하이메1세는 카탈루냐 앞바다에 위치한 발레아레스제도를 점령하였는데, 이와 같은 레콩키스타 과정 중에 발생한 일련의 해전들을 통하여 이베리아 국가들은 바다로 나아가는 경험을 획득하였다.

레콩키스타가 완수될 즈음에는 이베리아 국가들의 해상 진출이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은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국왕 주앙 1세의 셋째 아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 왕실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 서남단에 위치한 사그레스에 항해 학교를 설립하였고, 스페인에서 유대인 학자들을 초빙하였으며 이슬람의 과학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축적된 항해 지식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은 1415년 지중해 남안 북아프리카의 도시 세우타를 점령하였고, 엔히크 사망 이후에도 카사블랑카, 탕헤르 등 지중해 남안의 북아프리카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엔히크 시기의 해상 진출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우선 세우타 점령은 레콩키스타의 일환으로서 모로코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엔히크 본인도 완벽한 해양 지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으며 점성술을 신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히크의 노력은 대항해시대의 시초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포르투갈 해양 진출의 발단에 대한 원인으로서, 엔히크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포르투갈 사회 전체의 변화와 발전을 언급한다. 포르투갈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양측의 과학 기술 및 해양 지식을 융합시킬 수 있었던 이점이 있었다. 또한 15세기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의 힘이 강해지면서, 동지중해 일대에서의 무역으로 번성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의 자본과 인력이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하였던 점도 지적된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에 필요한 자원들이 공급될 수 있었다.

엔히크 사후 포르투갈 왕실의 항해 지원은 잠시 중단되었으나, 1480년대 이후부터 다시 지원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대양 항해는 재개되었고, 이러한 항해를 통해 항해사에 있어 중대한 발견들이 이뤄졌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에 희망봉을 발견하였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는 리스본을 출항하여 유럽인 최초로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안을 경유하여 인도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나 스페인으로 귀화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스페인 왕실의 지원 하에 태평양을 횡단, 최초의 세계 일주를 완수하였다.

포르투갈의 이웃 국가 스페인도 대양 항해를 지원하였다. 1479년 아라곤 왕자 페르난도 2세가 국왕에 즉위하였는데, 그는 카스티야 국왕 이사벨 1세의 남편이었고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군주였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동군 연합 왕국에서 탄생한 스페인 왕국의 후원 하에, 1492년 크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이라 칭하는 곳에 도착하였다.

흔히 아메리카 대륙은 주요 문명들이 탄생한 구대륙과 대비시켜 ‘신대륙’이라 칭해져 왔다. 기원전 11,000년경 구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한 이래 신대륙은 구대륙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한 이후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잇달아 신대륙으로 진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과 파괴 행위가 자행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격하여 황제 몬테수마를 생포하고 제국을 정복하였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하고 살해하였다. 침략자들의 우월한 무기, 이들이 가져온 바이러스, 그리고 토착 문명 간의 갈등과 내분으로, 이곳에 있었던 여러 문명들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양 진출이 점차 확대되어 가면서, 이들이 점거한 해양과 영토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양국 간 충돌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이들은 경계를 구획하고 각자 점할 수 있는 영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하였다. 1494년 6월 7일, 양국은 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인근에 위치한 경계선을 중심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영역으로 정한다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당 부분,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태평양 대부분을 점거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조약에서 양측은 각자의 해양에서 ‘무해통항(無害通航)’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다. 1529년 4월 22일,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Zaragoza)을 통해 한번 더 경계 구획에 관한 합의가 이뤄졌다.

3 포르투갈의 중국 진출

포르투갈은 동아시아 정착에 성공한 최초의 유럽 국가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경유하여 동남아시아에 이르렀다. 1511년 포르투갈은 말레이시아 반도 끝에 위치한 말라카(혹은 믈라카)를 침공하였는데, 말라카는 명 영락(永樂) 연간(1403~1424) 정화 원정대에 항구를 빌려준 이래, 명과 조공 관계를 맺고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원정대의 군사력을 빌어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말라카 침공 소식은 명 조정에도 전달되었다. 명은 강력한 화력을 이용하여 말라카를 침공한 포르투갈인들을 ‘불랑기(佛郞機)’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이들의 등장을 경계하였다.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에 도착하였다. 조르즈 알바르스를 위시한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광둥성(廣東省)의 ‘타망(Tamão)’이라는 섬에 도착하였다. 타망은 현재 홍콩(香港)의 튄문(屯門, 광둥어로 tyunmun) 일대로 추정된다. 1517년 토메 피르스 등 일단의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의 사신이자 통역관이었던 화자아삼(火者亞三)을 따라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도착하였다. 1520년 피르스를 포함한 30여 명의 포르투갈 사절단이 난징(南京)에서 정덕제와 잠시 만났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베이징(北京)까지 갔지만, 황제가 베이징으로 귀환한 직후에 사망하면서 재회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한편 광저우에 남아 있던 포르투갈 상인단은 광저우만 인근에서 약탈을 하였다. 이 사실이 명측 당국에 발각되면서 피르스 등은 광저우에 감금되었다. 피르스는 끝내 광저우의 감옥에서 사망하였으며, 남은 포르투갈인들은 명군과 전투 끝에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명은 ‘불랑기’와의 교섭을 일체 거절하였다.

명과의 교섭에 실패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 연안에서 밀무역에 종사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들의 주요 근거지는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 앞바다에 있는 쌍서(雙嶼) 항구였다. 쌍서항은 포르투갈인, 왜구, 중국 상인들이 왕래하였고, 일본은과 포르투갈 금화 등 다양한 물품들이 집결하는 국제 항구였다. 1548년 저장성과 푸젠성(福建省) 연안 방어 총지휘관 주환(朱紈, 1494~1550)은 쌍서항을 토벌하여 해체시켰다. 이로써 포르투갈인들은 거점을 잃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뇌물과 무력 시위를 적절히 이용하여 광둥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1557년 포르투갈인들은 광저우만 하오징아오(濠鏡澳) 일대에 정주할 수 있는 땅을 획득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지역을 ‘마카오(Macao 혹은 Macau)’라고 불렀다. 명칭의 유래는 ‘아마(阿媽)’라고도 불리는 해신 마조(媽祖)와 관련이 있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무역 거점이기도 했지만,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잇는 무역 허브이기도 했다. 마카오는 해로를 통하여 동남아, 인도, 일본은 물론, 신대륙과 유럽까지 연결되었다. 마카오에서 동남아를 경유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는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광저우에서 비단, 도자기, 약재, 금속 등 다양한 물품을 구입하고 이 항로를 통하여 이런 물품들을 유럽으로 운송하였다. 이 무역에 종사하는 선박 1척당 수익률은 70~200%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동남아시아 일대에서도 항로를 통해 마카오로 각양각색의 물품들이 운송되었다. 마카오 정착 이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은 인도네시아 셀레베스 섬 마카사르에서 중국 비단과 인도 면직물을 판매하였고, 몰루카제도(혹은 말루쿠제도, 일명 향료제도)의 정향, 티모르의 백단유, 보르네오의 다이아몬드 등을 교환하여 수익을 거두었다. 마카오 정착 이후에도 포르투갈인들은 시암, 말레이 반도 동부 연안 파타니, 벵골만 등에서 교역을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시암에서 1630년경까지 안정적인 무역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마카오는 스페인령 필리핀을 경유하여 신대륙으로 향하는 항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580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도 계승하면서, 스페인-포르투갈 연합 왕국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결성은 국내는 물론 해외 식민지에서도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에게 일체감을 형성시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양국 국민들은 해로를 공유하였고 상호 교역을 계속 이어나갔다. 마카오와 필리핀 사이에는 직물, 식료품, 가축, 금속, 군수품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고, 1590년에는 전임 마카오 총독 주앙 다 가마가 갤리언선을 타고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항해를 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동아시아 해양에 등장하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마카오 포르투갈인과 필리핀 스페인인 사이에는 협력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양자는 무역 경쟁 상대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인들의 마카오 내 무역을 방해하였고, 스페인인들은 마닐라의 부를 유출시키는 포르투갈인들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1640년 이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재차 독립하면서 1644년에는 양국은 각각 마카오와 마닐라에서 상대국 사람들을 쫓아내고 교역을 일체 중단하기도 하였다.

4 일본의 남만무역

포르투갈인들의 중요한 무역 기항지 중 하나는 일본 나가사키였다. 1542년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처음 도착하였다. 규슈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인 안토니우 다 모타가 일본인에게 ‘철포’를 전달하였는데, 이는 ‘조총’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진 화승총이었다. 이때의 일은 승려 난포분시(南浦文之)의 『철포기(鉄砲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포르투갈인의 일본 무역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이 컸다. 1540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중심으로 결성된 예수회는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로욜라와 함께 공동으로 예수회를 창설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인도와 일본으로의 선교 활동에 나섰다. 1549년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교를 전파한 이후, 하비에르는 중국으로 향하였지만 도중에 광둥에서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에 관심이 없었던 포르투갈인들은 하비에르의 도일 이후 일본과의 교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특히 중일간 중개무역을 담당하였다. 히라도(平戸)를 비롯한 규슈 일대 다이묘들은 포르투갈인들과 교역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을 가리켜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으며, 이들과의 무역을 ‘남만무역(南蠻貿易)’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과의 교역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남만무역을 통해 일본에는 옥수수, 감자 등과 같은 신대륙 작물은 물론 카스테라, 빵, 안경 등 유럽의 물품들이 전파되었다. 노부나가는 철포를 활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처음에 히라도를 교역항으로 삼았으나, 이후 요코세(橫瀨)와 후쿠다(福田)로 이전하였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나가사키로 교역항이 이동하였고, 1570년경 이후에는 나가사키~마카오 정기 교역이 이뤄졌다. 이후 나가사키는 남만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1592년 히데요시는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澤廣高)를 나가사키를 관장하는 장관으로 임명하였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가사키부교(長崎奉行)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나가사키를 본격적으로 관리하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봄에 광저우 정기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여름에 남서계절풍을 타고 나가사키로 가서 교역한 후, 가을에 북동계절풍을 타고 마카오로 귀환하였다. 이들이 주로 거래한 물품은 비단, 도자기, 약재, 납, 초석(硝石) 등이었다. 일본인들 역시 마카오에 와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명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거래를 금지하였지만, 실제로는 여러 밀무역 경로를 통하여 양국 간의 교역은 이어졌다. 일본측에서는 민간 상인 선박에게 중국 무역을 공식적으로 인가해 주기도 하였다. 1592년 히데요시는 교토, 사카이(堺), 나가사키 상인에게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하고, 마카오와 동남아시아 일대로 가서 해외 무역을 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서 중국산 물품을 싣고 일본에 왔으며, 일본에서 은을 구입한 후 다시 중국으로 유통시켰다.

17세기 중엽 이후, 마카오는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명말 발생한 위기로 인하여 명 조정은 포르투갈인과의 교역을 전면 금지시켰다. 비슷한 시기인 1641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말라카를 공격하여 마카오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해로가 단절되었다. 1637년 기독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으로 막부가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면서 일본과의 무역마저 단절되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마카오의 위상은 하락하였으며, 더불어 해양 제국으로서의 포르투갈의 권위마저 추락하게 되었다.

5 스페인의 필리핀 정착과 중국 진출 시도

스페인인들은 필리핀을 거점으로 삼아 동아시아에 진출하였다. 정복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1565년 세부 섬에 도착하였고, 1571년 루손섬의 마닐라 일대를 장악하고 식민정청을 수립하였다. 1575년 총독 기도 데 라베자레스는 중국 해적 임봉(林鳳)을 추격해 온 중국 군관 왕망고(王望高)의 소개로, 신부 마르틴 데 라다가 이끄는 사절단을 푸젠성 푸저우(福州)에 파견하였다. 이는 중국과 스페인 사이에 발생한 최초의 공식적 외교 교섭이었다. 후임 총독 프란시스코 산데는 중국을 정벌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스페인 병력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필리핀 현지의 자원도 부족하여 곧 중지되었다.

스페인인들은 명과의 교섭을 위하여 몇 차례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파견될 때마다 정주 항구 할양과 항구에서의 교역 및 선교 활동 보장을 명측에 요구하였다. 이는 포르투갈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마카오와 동급의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스페인인들은 마카오 인근의 엘피냘(El Piñal)이라는 섬을 광둥 당국으로부터 할양받기 위한 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에서는 외국과의 관계 결성은 조공 관계를 원칙으로 한다는 이유로 스페인측의 교섭 요구를 거절하였다.

루손섬에 거주하는 스페인인들은 적은 인구, 물자 부족, 생산성 저하라는 문제에 항상 직면해 있었다. 이들은 중국의 노동력과 물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신대륙에서 운반되어 온 은을 중국산 직물, 생필품, 식료품 등과 교역하는 방식으로 스페인인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스페인인들은 대다수 푸젠인으로 구성된 루손 체류 중국인들을 통하여 노동력을 충당해야 했다. 이들 체류 중국인의 수는 스페인인을 능가하였기에, 스페인인들은 이를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여겼다.

이러한 긴장 상황은 1603년 스페인인들이 2만 여명의 체류 중국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루손과 명과의 교역은 계속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 재정 부족에 시달리던 명측은 보복을 할 여력이 없었던 데다 스페인인들과의 교역을 통하여 은 등의 물자를 조달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 역시 명과의 교역을 통해 생필품을 조달받아야 했으며, 자신들로부터 독립하려는 네덜란드인들의 사략선이 루손에 자주 출몰하여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에, 명 당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명과 루손 양 당국은 학살 사건을 묵과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6 네덜란드의 동아시아 해양 진출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초에 중국 해안에 등장하였다.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후발주자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종주국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80년간 독립전쟁(1566~1648)을 벌이고 있었다. 신흥 국가로서 국부를 확보하기 위하여 네덜란드는 바다로 눈을 돌렸다. 법학자 휘호 그로티우스(Hugo Grotius, 혹은 하위흐 더 흐로트Huig de Groot)는 어떤 국가도 바다에 대한 배타적인 관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구축한 해상 교역 독점을 타파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1600년 영국이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고 동방 무역을 개척하려 하자, 네덜란드 역시 이에 대항하여 암스테르담에 네덜란드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설립하였다. 1603년 12월 네덜란드 상선이 동남아로 출항, 말루쿠제도와 반다제도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1609년 인도네시아 자바(Java) 섬 반탐(Bantam)에 최초의 교역 거점을 구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남아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을 점차 몰아내었고 일본에서도 조금씩 영향력을 확장해 갔다. 1619년 네덜란드인들은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바 섬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동방 무역의 최대 기지로 삼았는데, 네덜란드인들은 후발주자로서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으며 이들이 구축한 교역망을 잠식해 들어가는 전략을 취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에도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당시 중국인들은 붉은 털을 가진 네덜란드인들의 모습에 따라 이들을 ‘홍모인(紅毛人)’ 혹은 ‘홍이(紅夷)’라고 칭하였으며, ‘홀란드(Holland)’를 음차한 ‘하란국(荷蘭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601년 네덜란드인들은 광저우에서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1604년 바타비아에서 동인도회사 소속 비브란트 반 바르비이크 등이 중국 상인 반수(潘秀) 등의 중개로 푸젠성 앞바다에 위치한 펑후(澎湖) 섬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고채(高寀)라는 환관에게 뇌물을 공여함으로써 펑후에 상륙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 만력제는 부족해진 황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전 성(省)에 심복 환관을 파견하여 별도로 징세하게 하였다. 당시 문헌에서는 이러한 환관들을 ‘세감(稅監)’ 등으로 지칭하였다. 세감들은 황제의 후광을 입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무분별한 징세 혹은 착취를 하였고, 이 때문에 지역 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채와 반수 등은 네덜란드인들을 복건과 가까운 펑후에 배치하고, 이들과 교역하여 은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당시 푸젠의 연안 지역 사회는 대부분 루손을 비롯한 여러 해외 국가들에 가서 교역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펑후에 주둔한 네덜란드인과 이들과 결탁한 일부 상인들의 등장은 지역 사회 경제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푸젠 당국은 군관 심유용(沈有容)을 파견하여 바르비이크 등과 교섭 끝에 결국 네덜란드인들을 펑후에서 철수시켰다. 1622년 네덜란드인들은 마카오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한번 펑후를 점령하였지만, 1624년 명군은 다시 이들을 쫓아내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인들은 동방에서의 거점 마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1624년 펑후에서 쫓겨난 이해에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에 거점을 마련하였으며, 1641년에는 말라카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성공(鄭成功)의 공격으로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에서 쫓겨났지만, 1641년에 마련한 일본 내의 거점인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무역에 전념하였다. 네덜란드는 후발주자였음에도 동아시아 해양 무역 네트워크를 점진적으로 장악해 가는 저력을 보였다. 17세기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설치한 상관이 20여 개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포르투갈인들이 장악하였던 중국 자기 교역권도 탈취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은 300만여 점의 중국 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의 성공은 유연성에 있었다. 16~18세기 동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사절단은 중국 황제나 지방 당국 행정장관을 접견할 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의례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러한 의례는 조공국 사절단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선교사들의 현지 선교 및 개종 사업을 보장해 줄 것을 통상 교섭의 한 조건으로 자주 제시하였다. 반면 네덜란드인들은 청 황제에게 조공국 사절단이 행하는 의례를 그대로 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으며, 일본에서도 선교 활동을 배제시킨 채 무역에만 전념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은 대포나 렌즈 등 첨단 기술이나 물품을 전달하여 교역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8세기부터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의학과 과학기술 등에 관한 실용 학문을 ‘난학(蘭學)’이라 칭하였고, 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다.

7 영국의 동아시아 등장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재위 1558~1603) 시기에 해양 진출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였다. 1600년에는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해상 진출을 시도하였다. 1613년 영국 상선은 도쿠가와 막부에 교역 허가를 요청하였고, 막부는 이들의 일본 내 정박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1623년 영국은 일본 히라도와 바타비아의 상관을 폐쇄하였고, 이후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 주력하였다.

청은 타이완의 정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1661년부터 1683년까지 천계령(遷界令)을 선포하였다. 천계령은 해안으로부터 일정 거리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하고, 연안 일대 지역을 완전히 비워버리는 극단적인 해금령이었다. 강희제는 천계령을 해제하면서 동시에 해관(海關)을 설치하여 민간 무역을 허용하였다.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손혜(孫蕙)는 해상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를 통한 징세를 건의하였고 강희제는 이를 인가하였다. 또한 장쑤성(江蘇省) 상하이(上海)에 강해관(江海關), 저장성 닝보에 절해관(浙海關), 푸젠성 샤먼(廈門)에 민해관(閩海關), 광둥성 광저우에 월해관(粤海關)을 설치하고 해외 무역선으로부터 관세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무역 체제를 ‘사구통상(四口通商)’이라 칭한다.

사구통상 체제 하에서, 광저우 월해관에서는 국내 교역과 해외 교역에 대한 징수를 분리시켰다. 이중 해외 교역을 담당하는 상회인 ‘양행(洋行)’은 1686년에 처음 설립되었다. 13개의 양행으로 구성된 집단을 일컬어 ‘광둥13행(廣東十三行)’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반드시 13개였던 것은 아니었다. 1720년 13행의 상인들은 ‘공행(公行)’을 설립하고, 가격 협상과 사업의 배분을 공행이 관장하는 한편 공행 이외의 중국 상인과 거래할 경우에는 공행에 일정 금액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외국 상인과의 무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려 하였다. 그러나 공행은 청의 승인을 받지 못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반발도 있었기에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1745년 청은 모든 행상(行商)에 보상(保商) 제도를 실시하여 공행의 행상이 폐업할 경우 행상 부채는 공행이 책임지게 하는 한편, 외국 상인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하면 보상이 함께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외국 상선들은 광저우 내륙에 가까운 황푸(黃埔)에 정박할 수 있었지만 하선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 동인도회사는 베이징에 보다 가깝고 중국 최대 비단 생산지였던 강남(江南) 일대로 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제임스 플린트(James Flint)라는 인물을 활용하였다. 플린트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동인도회사의 통역사로 고용된 인물이었다. 플린트는 중국식 이름을 ‘홍임휘(洪任輝)’라고 하였다. 동인도회사는 1755년부터 플린트를 매년 닝보에 파견하여 청으로부터 교역 항구를 얻어내려 하였다. 1756년 건륭제는 절해관의 관세를 월해관보다 비싸게 징수하도록 지시하여 영국인들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효과는 미미하였다. 청의 입장에서 양쯔강(揚子江) 하구 강남 일대는 베이징과 가깝고 중국의 경제 중심지인데 반하여 수비하기 어려운 곳이었기에, 외국 상인과 선박의 주둔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1757년 건륭제는 광저우의 월해관을 제외한 나머지 항구와 해관을 폐쇄함으로써 ‘일구통상(一口通商)’ 체제로 전환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러한 무역 체제를 ‘캔턴 시스템(Canton System)’ 혹은 ‘광둥체제’라고 부른다. 이후 1759년 플린트 일행이 톈진(天津)까지 북상하였다가 곧바로 체포되어 광저우로 돌려보내졌던 ‘홍임휘사건’이 발생하면서, 외국 선박에 대한 청의 경계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광저우에서는 서양인의 활동과 체류 기간을 일방적으로 제한하는 등 보다 경직되고 강경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설에는 건륭제가 천주교의 확산을 차단하고자 유럽인의 활동을 마카오와 광저우 일대로 제한하려 하였다고도 전한다.

1760년에는 청이 9개 행상의 공행 설립을 인가함으로써 공행이 외국 상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하였다. 공행에 소속된 행상들은 1~3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총괄하게 하였으며, 무역은 물론 외교 업무도 위임받았다. 이들은 선박 및 시장의 폐쇄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한 경우 외국인을 구속할 수도 있었다. 외국 상인들은 이들을 통해서만 청 당국과 소통하거나 요구 사항을 제시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동아시아 무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얻는 한편, 광저우 행상의 무역 독점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조지 맥카트니(George McCartney) 사절단을 청에 파견하였다. 건륭제와 사절단의 만남이 있기 전부터,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의례를 행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맥카트니 일행은 영국에게 무역 거점을 제공해 주고 무역 조건을 개선하며 상주 사절단을 교환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건륭제는 모두 거절하였다. 이후 1816년에도 영국은 다시 청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이때는 황제 알현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양국간 무역 구조가 영국에게 불리한 측면도 있었지만, 영국산 물품이 중국에 인기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18세기 전후 영국에서는 중국산 차(茶)와 도자기가 유행하면서 차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모직물을 중국에 팔고 차, 도자기, 비단 등을 구입하는 교역을 수행하였지만, 영국산 모직물에 대한 중국인의 수요가 저조하였기에 충분한 양의 중국산 물품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동인도회사측은 어쩔 수 없이 은을 더 지불하여 중국산 물품을 구입하는 손해를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형국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판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18세기부터 인도산 아편이 포르투갈인을 통하여 중국으로 유입되고 있었다. 옹정제(雍正帝)는 아편 흡입 금령을 발포하기도 하였고, 이후에도 아편 밀수 단속이 있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1757년 영국이 플라시전투 승리 후 벵골 일대 지배권이 확립되면서, 동인도회사가 벵골산 아편을 전매하였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는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19세기에 이르면 중국 내 은이 대량으로 유출되면서 청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도광제(道光帝)는 엄격한 아편 금령을 주장한 임칙서(林則徐)를 광둥성에 파견하여 아편 단속을 강화하였다. 1839년 임칙서는 영국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하였고 이들에게 아편 교역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영국인들은 이를 거절하였다. 양측의 대립은 그해 겨울 전투로 이어졌고, 이듬해인 1840년 영국 하원 의회는 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제1차 아편전쟁(혹은 중영전쟁)이 발발하였다. 영국 함대는 베이징의 외항인 톈진까지 진격하여 베이징을 위협하였고, 도광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임칙서를 해임하고 영국과 협상을 진행하였다. 1842년 난징에서는 청과 영국 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청은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의 5개 항구를 개항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며, 몰수한 아편에 대한 변상과 함께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난징조약은 청이 외국과 동등한 격식으로 체결한 조약이었다. 이후 1844년에 체결된 미국과 프랑스와의 조약도 난징조약에 준하는 내용이었다.

1856년 애로호 사건을 통하여 청과 영국은 재차 전쟁에 돌입하였다. 청 당국이 주강에 있던 영국 선박 애로(Arrow) 호의 국기를 내리고 선원을 연행하자, 영국 정부는 개전을 결정하였다. 1857년 12월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광저우를 점령하였고, 이후 미국과 러시아도 가담하였다. 연합군은 톈진까지 진격하여 베이징을 압박하였고, 1858년 톈진에서 청과 이들 4개국 사이에 조약이 조율되었지만, 청은 불평등 조약에 대한 비준을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였고, 결국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 국가들의 사절단은 베이징에 주재하게 되었고, 톈진은 개항되었으며, 연해주 지방은 러시아에 편입되었고, 홍콩섬 건너편에 위치한 주룽(九龍) 반도는 영국에 할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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