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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국왕, 차라리 양반으로 태어났다면

미상

세도정치 대표 이미지

창덕궁 연경당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후기 정치사의 산물, 세도정치

세도정치는 붕당정치-환국-탕평정치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정치사의 산물이었다. 16세기 후반 선조 초년에 나타난 붕당정치는 17세기 중엽에는 서인과 남인이라는 두 붕당으로 고정되었고, 이들 사이에 견제와 균형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들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바탕 위에서 서로 비판하고 대립하였으며, 주된 쟁점은 예론과 같은 학문적, 이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숙종대 들어서면서 사회 경제적인 변화, 발전에 따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인 군사력, 경제력과 직결되는 문제가 붕당 간의 쟁점이 되었고, 이는 붕당 존립과 직결되면서 매우 치열해졌다. 그 결과 상대 붕당과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완전히 척결하고 어느 한 붕당에서 권력을 독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붕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국왕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국왕은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을 급격하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교체함으로써 국정 운영 질서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환국이었다.

그러나 환국 말기 경종, 영조로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붕당 간의 대립이 왕위 계승자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결국 왕권을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국왕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 탕평정치였다. 그러나 탕평정치는 권력의 기반을 확대하기 보다는 그것을 축소하는 방향이었다. 언론을 통한 비판 기능과 새로운 정치 집단의 진출 경로 역할을 맡았던 당하관의 정치적 의미가 퇴색한 것, 왕의 근시 기구적 성격을 갖는 규장각 설치를 통해 측근 인물들을 배출한 것, 정치적으로 비중 있는 인물들이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핵심적인 권력으로 참여하는 것 등이 권력 기반을 축소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조치였다. 탕평정치의 이러한 권력 집중은 당대 국왕인 영조와 정조의 왕권은 강화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정치 권력 전체의 기반은 약화시켰다. 이렇게 권력의 기반이 축소되면서 권력은 극도로 집중되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세도정치였다.

19세기 들어서면서 탕평정치기 권력 집중의 초점이었던 왕권의 위상은 낮아졌고 그 자리를 몇몇 가문이 차지하였다. 그 이전에 일반 관료 기구 사이에 권력이 배분되어 집행을 담당하는 관서와 비판과 감독 기능을 맡은 관서들이 서로 견제하던 모습은 없어지고 비변사에서 여러 관서의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대부분 흡수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특정한 유력 가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는 적은 수의 권력 집단이 비변사의 주요 당상관직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운영하였던 것이 바로 세도정치였다.

2 소수 가문의 국정 장악

세도정치기에는 국왕의 외척을 비롯한 소수 가문이 정계를 장악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여러 사회세력들을 중앙 정치로부터 크게 소외시킨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과거를 통해 고위 관료로 진출한 이들을 분석하면 잘 나타난다. 세도가문의 구성원들은 소과와 대과를 치러야 하는 식년시에 비해 한 차례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별시를 주로 활용했다. 별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세도가의 인물들은 특혜를 받아 상당수가 고관으로 승진했다. 승진은 대개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을 올린 후에 당상관으로 진출하는 경로를 거쳤다. 도당록은 홍문관의 모집단 명부를 말하는데, 홍문관 관리는 도당록에 이름이 오른 사람만을 대상으로 선발했다. 홍문관원은 경연관을 겸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우대를 받았고 고관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했다. 세도정치기에는 도당록 입록자의 75%가 서울 출신이었다.

고위 관직자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지역적으로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과 짝하여, 소수의 유력한 가문에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가문은 역시 안동 김씨였다. 이 가문은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 비가 된 것을 계기로 집권한 뒤 연이어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대를 물려가며 권력을 유지했다. 이외에도 반남 박씨, 풍양 조씨 등이 왕실과의 혼인 관계를 빌미로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였다. 이 외에 전주 이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대구 서씨 등도 권력의 한 축을 차지했다.

이들 세도가문들은 의정부, 6조 등 정상적 통치기구를 배제하고 비변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비변사는 중앙과 지방의 주요 행정 군사 기구의 당상관 이상의 관직자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자동적으로 비변사 제조가 되는 관직들의 인사에 비변사가 관여하는 한편 비변사 운영의 중심인 전임당상들은 비변사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하였다. 따라서 당상관 가운데서도 제조를 맡을 수 있는 2품 이상의 중신들로 정치적 결정권이 집중되어 삼사와 이조 당하관의 정치적 역할은 약해졌고 결국 정치적 권한은 비변사로 집중되었다. 비변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당상들은 대개 서울 주요 가문의 인물들이 차지했고 그 가운데도 영향력이 큰 몇몇 인물들이 비변사를 장악했다.

그들은 비변사를 통해 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운영하였다. 그러나 국왕을 배제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의 정권 장악과 유지에 공식적으로 가장 큰 기반이 되었던 것은 여전히 국왕 또는 왕실의 권위였다. 때문에 그들은 선왕(先王)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1834년(헌종 즉위) 조만영(趙萬永)은 순조를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우에 빗대며 세실로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1859년(철종 10) 김문근(金汶根)은 헌종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공업을 이은 성군이기 때문에 세실에 모시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강화된 선왕의 권위에 의지하여 정치권력을 행사하였고 그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김조순의 위치와 권한은 상당한 부분이 선왕 정조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었으며, 스스로 자신에 대한 선왕의 대우를 강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안으로 삼았다. 이러한 현상은 정적을 축출하는 경우에도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1840년(헌종 6) 대왕대비가 이지연(李止淵)·이기연(李紀淵) 형제를 쫓아낼 때 그들이 헌종의 아버지 익종(효명세자)의 죄인이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 처벌을 합리화하였다.

그러므로 세도정치의 주축 가문들은 왕실과의 혼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관념상 왕실의 고유한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국왕, 왕자의 혼사가 신하들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순조의 결혼까지만 하여도 부단한 벽파 세력의 반대 공작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생전에 정했던 정혼자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국왕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혼인이 이루어졌다. 왕실 외척이 된 세도가문은 국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순조 연간 이후로는 임금이나 왕실의 고위 인물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였을 때 약원제조 등 외에 왕실의 가까운 인척들이 ‘별입직(別入直)’이라는 명목으로 궁궐에 들어가 대기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국왕에게 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권세가의 권력 독점에 힘이 되었던 것이다.

3 국왕의 왕권 강화 노력과 좌절

세도정치기 국왕의 권위는 관념적으로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선왕에 대한 것에 국한되었다. 재위 중인 국왕의 왕권 강화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정치세력으로서 실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력의 장악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때문에 국왕들은 친위 군대를 신설하려 시도하였다. 순조는 궁궐 호위를 담당하는 무예청의 군병을 늘리려 하였으나 김조순 가문 인물의 반대에 부딪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헌종도 비공식적으로 궁중 안에 부대를 설치하였는데, 그 구성원들은 정규부대 출신도 아닌 ‘민간의 의지할 곳 없는 자들’에 불과했다. 헌종은 이후 총융청을 총위영(摠衛營)으로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종이 즉위한 후 즉시 폐지되고 말았다. 철종 역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과 별기군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호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국정 전반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한편 친위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시도들도 있었다. 순조가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한편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게 한 것이 그 예이다. 대리청정을 하게 된 효명세자가 각종 응제와 제술, 강을 급격히 늘려 자신의 국정 운영을 도와줄 관료들을 새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국왕의 노력이 무위에 그친 것은 국왕을 뒷받침할 친위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계에 포진해 있던 관료의 상당수는 세도가 출신이거나 그들과 연결된 인물이었다. 때때로 국왕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들은 세도가문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국정을 주도하려는 국왕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처가나 외가 등 척신에 의지하는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4 세도정치의 국정 인식과 운영

세도정치 집권자들의 국정 인식은 전체적인 사회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과거의 관례에 얽매이고 있었다. 당시 국정의 일차적인 문제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위에서 격화된 계층 간의 문제, 계급 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국정의 주도자들은 대체로 낡은 관념에 머물러 자기들만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다. 집권자인데도 국정 운영을 잘 알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국정을 전국적인 시각을 가지고 파악하려는 노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당시의 권력집단은 전국에 대한 균형 잡힌 배려보다는 서울 중심의 정책을 고수하였다. 예를 들어 1809년(순조 9) 기근이 닥쳤을 때 국왕 순조와 같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서울의 기근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특히 전라도의 수령들이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서울의 곡식을 내려보내 달라고 연명으로 호소한 데 대하여 대책을 강구해 보라는 순조의 명령이 내려졌으나 정승에 의하여 간단히 기각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국정 전체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당시의 권력집단이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주로 서울에 두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국정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미흡한 상태에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대개 현실의 논리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더라도 진단과 대책에서 효과를 나타내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예로 민생과 재정의 파탄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사치 풍조로 파악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취한 조치라고는 실효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조정 관료들의 복식을 변통하는 절목을 제정한 것이 유일했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함께 개혁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국정 전반에 걸쳐 일대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조정 내에서 여러 번 제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대개 정쟁의 일부로 나타난 것들로서 사회경제적, 혹은 관료 체제에 대한 정책을 둘러싸고 구체적으로 주장된 적은 거의 없었다. 민생 파탄의 책임을 수령에게 전가하면서도 수령의 부정을 근절할 대책은 세우지 않았던 것이 좋은 예이다. 전체적으로 민폐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대개 이전 시기에 정해진 규정을 충실히 따르거나 그것을 강화하려 했을 뿐이며 새로운 원칙을 결정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1831년(순조 31) 선박을 이용한 상업적 이권 행위를 바로잡는 조치가 정조대에 이루어진 『대전통편(大典通編)』의 규정을 재삼 강조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그 예이다.

5 세도정치의 성격과 한계

세도정치는 정치권력의 기반이 극도로 축소된 바탕 위에서 권력이 집중된 것이었다. 정치세력의 측면에서는 권력 집단의 구성원이 특정 가문 출신의 인물로 집중되었고, 정치구조 상으로는 비변사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특정한 유력가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는 적은 수의 권력집단이 비변사의 중요 당상관직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 집단을 구성하는 몇몇 유력가문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들은 권력에 접근할 수 없어 권력 집단과 사회 세력이 괴리되었고, 비변사 이외의 관료 기구는 그 이전에 갖고 있던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비변사와 전체 정치 기구가 괴리되었다. 다시 말해 세도정치의 권력 집중은 권력 기반을 축소시키면서 이루어진 것이요, 여러 면에서 권력 집단을 괴리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세도정치의 정치 집단은 그 대표적인 성격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는 수구성, 다른 세력이 정치권력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성, 당시 제기되는 시대적 과제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직성 등을 띠게 되었다.

세도정치는 당시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은폐하거나 회피하려고 했다. 따라서 그러한 모순으로 피해를 입은 측에서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기존의 정치세력에 도태된 층, 사회 경제적 변화 발전을 배경으로 상승하는 층과 그러한 변화 과정에서 소외되어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된 층 등 다양한 사회 세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저항 방식 역시 비교적 온건한 방식의 와언(訛言)이나 괘서(掛書) 에서부터 명화적 등 도적 집단을 이루거나 심지어 역모 차원의 변란을 일으키는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아직 기존 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항쟁은 왕과 왕조체제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특정한 수령이나 권력자 개인에 대한 국지적이고 낮은 수준의 불만 표출이 대부분이었다. 1811년(순조 11) 평안도 농민전쟁과 같은 왕과 조정에 대한 대규모의 반란이라 하더라도 중세 왕조 체제를 벗어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추진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중세 왕조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의 항쟁은 19세기 후반,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862년(철종 13)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농민항쟁, 곧 임술농민항쟁 이후에 가서야 본격화되었다.

세도정치와 그 저항 세력 사이의 갈등과 그 조정 과정의 산물이 바로 대원군 집권이었다. 이후 조선 사회는 이들 세력 사이의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 제국주의라는 힘이 새롭게 개입하면서 민족 내부의 모순과 함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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