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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미국 함대의 침략을 물리치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대표 이미지

조선군의 ‘수(帥)’자기 앞에 서 있는 미 해병 병사

국사편찬위원회

1 사건의 배경

조선 조정은 1866년(고종 3) 2월부터 수개월에 걸쳐 프랑스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그 해 6월 하순, 미국 국적의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한약재를 싣고 청국의 산동반도에 있는 즈푸(芝罘)항을 떠나 류쿠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 선암리에 표착하였다.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이 조선 측에 구원을 요청하자, 철산 부사 백낙연(白樂淵)은 이들을 북경으로 가도록 조치하였다. 이어 8월 6일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선적의 배를 타고 충청도 해미현 조금진 일대에 출현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해미 현감 김응집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이 가지고 온 토산물을 조선 국왕에게 진상할 것을 요구하였고 아울러 통상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를 조선 측에서 거절하자 오페르트는 다음번에는 영국 외의 서구 열강의 선박들을 대거 이끌고 와서 통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양선들과의 접촉은 조선의 재야에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고종 3) 8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진입하여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는 이른바 제너럴셔먼호 사건(─號事件)이 일어났다. 제너럴셔먼호는 미국인 프레스톤 소유의 유람선으로 선주의 요양을 위한 여행 도중 텐진항에 기항했던 것이다. 텐진항에 기항한 제너럴셔먼호는 선주인 프레스톤이 텐진 주재 영국 무역회사와 계약을 맺어 무역선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이들은 중무장을 갖추고 1866년(고종 3) 7월 29일 텐진항에서 조선으로 향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청국 상선의 안내를 받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동태를 탐지하고 그 행동을 예의 주시한 뒤 제너럴셔먼호 측에 회선을 요구하였다.

평안병사 이용강은 제너럴셔먼호와의 접촉하여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제너럴셔먼호측은 자신들이 평양성에 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해 왔음을 밝히고 자신들이 가져온 무기들을 조선인들 앞에서 과시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측의 회선 요청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대동강 상류로 올라갔고 박규수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제너럴셔먼호측은 8월 21일 오후 6시 경에 대동강 상류로 지출하여 어두워질 때까지 수심을 측정하는 등 탐사 작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 북안에 상륙하여 제너럴셔먼호를 구경하러 온 평양 주민들에게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셔먼호에 거듭 회선을 요구하였으나 이들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고집하였다. 급기야 27일 제너럴셔먼호는 순영 중군 이현익(李玄翼) 일행을 나포하고 억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제너럴셔먼호는 이현익 일행에 대한 석방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은·인삼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평양 사람들에게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강한 경각심과 적개감을 불러일으켰다. 평양 주민들은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제너럴셔먼호에 항의하였고 군민합동의 대규모 무력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후 조선 측과 제너럴셔먼호의 교전이 발생하였다.

제너럴셔먼호와의 교전 과정에서 조선 측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가 단단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아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박규수가 화공 작전을 주도하여 은밀하게 소형 선박을 제너럴셔먼호에 접근시켰다.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피하는 와중에 모래톱에 좌초되어 기동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평양 군민들이 제너럴셔먼호에 접근, 공격하여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은 강물로 뛰어드는 등 달아나려고 했으나 평양 군민들이 이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지금까지 바다에만 나타났던 이양선들이 처음으로 강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에 놀라움을 느끼고 이들을 어떻게 물리칠지 논의하였다. 국왕과 대신들은 한편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저들과 호응하는 자들이 있는 여부를 의심하였고 동시에 성리학을 바로 하여 저들에 대항하는 힘으로 삼자고 논의했다.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를 화공으로 격퇴시킨 상황을 보고하고 조선 조정은 과거 기자 조선의 전설이 전해지는 평양을 침략한 흉악한 서양 오랑캐들을 토벌한 박규수의 공을 치하하고 공로가 있는 백낙연, 신태정(申泰鼎) 등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의정부는 서양인들의 총격에 죽은 평양민들을 위무하는 차원에서 은전을 베풀기로 하였다.

또한 의정부에서 서양인들을 물리친 것을 청국에 알리기 위해 공문서를 작성하여 청국의 예부에 미리 통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청측에 대동강에서 이루어진 교전의 양상 등을 알렸다.

조선 조정은 척사 사상을 강화하고 서양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한편 기존의 성리학 존숭과 천주교 금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 조정은 거듭된 이양선의 출몰을 접하면서 대내적인 이념통제의 강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조정은 교서를 통해 천주학을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과거 천주학이 전파된 유래와 이것이 끼치는 해악을 밝히고 공맹의 도를 존숭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2 미국의 접근과 조사

1866년(고종 3) 9월과 10월 초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시 이들과 동행했던 신부 리델이 조선인들로부터 서양 선박이 평양에 나타났고 이것이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불타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소식은 프랑스 측에 의해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전달되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전 조선에 표류한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제너럴셔먼호 승무원의 구성과 이들 중 미국인의 숫자, 이들의 생존 여부 등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해 12월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그 해 12월 15일부로 본국 정부에 정식으로 시말을 보고하였다. 동시에 청국의 총리아문에도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청 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에도 공동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버링게임 공사는 이 사건이 미국 단독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Bell) 제독에게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 조사 및 해결을 요청하였다. 벨 제독은 버링게임 공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와츄세츠(Wachusett) 호를 즈푸항에서 조선 해역에 급파하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슈펠트 함장은 제너럴셔먼호 외에 서프라이즈호도 표류했었으며 이들은 조선 측에 의해 청으로 돌려보내졌음을 파악하였다. 한편으로 조선과 접촉했을 경우 어떠한 방식으로 조선 정부에 접근할지 여부를 검토하였다.

와츠세츠호 함장 슈펠트(R. W. Shufeldt)는 벨 제독에게 조선으로 가기 전에 제너럴셔먼호가 어떠한 경로로 조선에 접근했고 대동강에서 어떠한 경위로 격침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보고는 워싱턴으로도 전달되었다

슈펠트 함장은 청국 상인 우문태 일행을 대동하고 1867년(고종 4) 1월 21일 즈푸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슈펠트는 조선인들을 만나 정보를 탐색하고 제너럴셔먼호의 일부 선원들이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한편으로 조선 조정은 제너럴셔먼호와 자신들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슈펠트 함장은 여러 정황상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침몰한 것이 확실하다고 보았다.

와츄세트 호가 즈푸로 돌아온 이후, 베이징의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 측에서는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생존자 가운데 자국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청국의 총리아문에 조선이 그들을 조속히 송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청 측은 조선이 청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하나 일체의 법령을 스스로 집행하고 있다고 그들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 측은 조선 측에 미국 측이 생존자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

미국 측에서는 1868년(고종 5) 4월 7일 셰난도어호를 파견하여 다시 조사를 시도하였다. 조선 쪽에서도 셰난도어호의 출현을 파악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미국 측에서 요구한 제너럴셔먼호의 생존자에 대해 관련자인 김자평을 심문한 결과 날조임이 드러났음을 밝히고 청 측에 이를 알렸다.

셰난도어 호의 페비거 함장은 자신의 조선조사 결과를 보고하였다. 자신의 항해 경로 및 조선 측과의 접촉 결과를 보고하였고 김자평과의 접촉 과정도 밝혔다. 최종적으로 그는 제너럴셔먼호의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미국 영사 시워드는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미국 측은 페비거 함장의 보고가 맞다고 판단했지만 조선인들이 미국 국기를 모욕한 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에 대해 군사적 조치를 동원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워드 영사는 자신의 숙부인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강력한 군사력의 과시를 통해 조선 측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해 재차 조사하고 동시에 조약을 체결하여 통상을 개시하고 미국인이 조난당할 시 안전을 보장받게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후로도 청과 조선의 상황에 대한 보고 및 조약 체결 건의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시워드의 후임으로 임명된 피셔 국무장관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피셔 장관은 최종적으로 청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전권을 청국 주재 로우 공사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870년(고종 7) 11월 조선에 파견될 미국 외교 사절단의 전권을 부여받은 로우 공사는 베이징에서 로저스 제독 및 시워드 총영사를 초청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

로우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미국에 보고하고 청의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이 독립국이어서 청이 문제 해결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의문을 표하였다.

이후 로우는 조선 원정군은 상하이 또는 즈푸에서 출발할 예정이며 출항은 다음해 5월 1일에서 15일 사이에 이루어질 예정이며 북경에 출입 중인 조선 사신을 통해 접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 미국 측은 청을 통하여 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시하였고 이에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조선은 외국 측과 굳이 통상할 뜻이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무렵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등은 기함 콜로라도 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나가사키 항에서 집결하였다.

5월 12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 로우 공사는 미국 정부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상황과 입장을 밝혔다. 그는 출항 시기 및 조선 도착 예정 시기를 전달하고 조선에 관한 정보가 매우 부족함을 토로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3 신미양요의 발발

1871년(고종 8) 5월 16일 나가사키 항을 떠난 미국 아시아 함대는 3일 후인 19일에 조선 해역으로 진입하여 충청도 해미현 앞바다에 이르렀다. 북상을 계속한 미국 함대는 71년 5월 21일 남양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23일에는 아산만의 입파도 근해로 이동하면서 작전 대상 해역이 될 강화해협에 이르기까지의 해로를 탐사대를 보내어 탐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측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본국에 보고하고 지속적으로 북상하였다.

한편 조선 측에서도 미군의 침략을 대비하여 강화도와 인천에 훈련도감과 수어청의 군대를 파견하고 화약과 탄환 등 군사 물자를 보급하여 수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지속적으로 관원을 보내어 미국 측과 접촉을 시도하면서 탐사를 중단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 함대는 6월 1일 강화해협의 측량을 강행하였고 이를 위해 강화부의 관문인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 앞으로 들어섰고 강화수병이 포격을 퍼부어 양자 간에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손돌목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은 즉각 본국에 보고되었다. 로우 공사는 미국 측은 조선 측이 외부의 어떠한 종류의 개방 요구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강력한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이 미국을 얕잡아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돌목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거치면서 양자 간의 군사적 긴장은 크게 고조되었다. 미군 측에서는 10일 이내에 조선 측이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고, 조선 측은 이를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여 양자의 입장은 팽팽한 평행선을 그었다.

로우 공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활용하여 강화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고 6월 10일 대규모 함포 사격을 초지진(草芝鎭)에 집중시켰다. 미국 측의 화력은 조선 측을 압도하였으며 조선 측은 일단 진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부터 미국군은 해군과 해병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3개 경로로 초지진에 접근하여 함락시켰다.

덕진진(德津鎭)은 초지진 북쪽에 위치한 군진으로, 병인양요 당시 순무 천총 양헌수(梁憲洙)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진입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상륙했던 곳이다.

이 진이 창설될 당시에는 병마첨절제사가 배치되었으나 이후 강화 유수의 건의에 따라 병마첨절제사가 통진에 주재하게 되고, 그 대신에 이곳에는 별장이 배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북상하여 6월 11일 새벽부터 덕진진을 공격하였다. 조선군 수비부대는 많은 피해를 입고 대모산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미군은 덕진진에 무혈 입성하였고 이후 광성보(廣城堡)를 향해 북상하였다.

광성보에서는 진무영(鎭撫營) 중군에 임명된 어재연(魚在淵)이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군을 이끌고 도착하여 전력을 강화한 상태였다. 어재연이 광성보에 도착하자 미국은 광성보를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집중 포격하였다. 조선군은 현저한 화력의 열세로 인하여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광성돈대로 밀려들어가게 되었다.

조선의 병사들은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하였다. 어재연 등 350여 명의 장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후 양군은 율도 백사장에 꽂아둔 장대 끝에 서신을 매달아서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로우 공사는 부평부사 이기조에게 조선 국왕에게 서신을 올려 양국간의 선린관계를 저해할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에 필요한 사항을 협의할 수 있도록 국왕 본인의 서신, 혹은 자신과 대등한 지위의 고위 관원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조선 측은 이를 묵살하였다.

조선 측이 미국 측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에 교섭을 진행해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7월 2일부로 조선 측에 유감을 표명한 뒤 조선 해역에서 물러났다.

조선 조정은 서양인들에 대한 배척 의지를 단호하게 밝히고 척화비의 건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선 조정은 금수와 같은 서양인들과는 교류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어재연은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기타 전몰한 장병들에게도 벼슬을 추증하는 한편 남은 처자들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조선인들은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로 이어졌다. 또한 군사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져 삼군부(三軍府)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군사비의 확충과 중앙군·지방군의 전력 강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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