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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무옥[辛巳誣獄]

기묘사화 2년 후, 안처겸 옥사가 발생하다

1521년(중종 16)

1 개요

신사무옥(辛巳誣獄)은 ‘무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신사년(1521, 중종 16)에 발생한 무고 사건이다. 1521년 안처겸(安處謙)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던 심정(沈貞)·남곤(南袞)을 제거하고 경명군(景明君)을 추대할 것이라는 고변이 있었다. 이 내용을 아뢴 사람은 안처겸의 고종사촌인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 송사련(宋祀連)과 송사련의 처남인 평민 정상(鄭瑺)이었다. 송사련의 고변 이후 추국이 이루어졌고, 결국 안처겸 등을 비롯하여 백여 명이 연루되었다. 안처겸과 그의 아버지 안당(安瑭), 동생 안처근(安處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약 1백 명이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안처겸 옥사(獄事)’라고도 불린다.

2 안처겸은 누구인가

안처겸(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은 중종대 좌의정 안당의 큰아들이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관직 생활은 매우 짧았고, 36세에 신사무옥으로 죽임을 당했다.

안처겸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백허(伯虛), 호는 겸재(謙齋)·근재(謹齋)·허재(虛齋)이다. 그는 1513년(중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장의(掌議)를 맡았다. 1517년(중종 12)에는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의 문묘 종사를 주장하기도 했다. 1519년(중종 14) 34세로 동생 안처함(安處諴)·안처근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다. 현량과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여 대책(對策)만으로 시험을 보도록 한 제도인데, 안당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현량과에 추천하여 급제시켰다는 이유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안처겸은 곧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삼년상을 치렀다. 1521년(중종 16)에는 탈상하여 처가에 있으면서 이웃에 사는 이정숙(李正叔), 권전(權磌) 등과 함께 담론을 하다가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정세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판적인 말을 하였다. 이때 송사련도 같이 있었다. 송사련은 안처겸의 말을 빌미로 하여 그를 역모 주동자로 만들었다.

3 신사무옥의 배경이 되었던 기묘사화

송사련은 안처겸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과 남곤을 제거하려 했다고 고변하였다. 2년 전에 발생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이들을 지목한 것이었다. 이로써 기묘사화의 비극은 2년 뒤 신사무옥으로 이어졌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에 남곤, 심정 등의 훈구세력에 의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 등에게 쓰인 죄명은 ‘붕당(朋黨)’이었다. 이들이 붕당을 형성해 자신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과격하게 일을 추진함으로 국정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묘사화는 사실상 조광조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였던 중종이 이끌어갔다. 『중종실록』을 편찬한 사신(史臣)은 중종이 홍경주(洪景舟)에게 내린 밀지를 기록해 놓았다. 그 내용은 “간당(奸黨)이 이미 형성되었고, 임금이 고립되어 제재하기가 어렵다. 함께 제거하는 것을 도모하여 종사를 안정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1월 14일 새벽에 남곤 등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조광조 등의 제거가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안당 등은 강하게 항의하였고, 성균관 유생들은 궁궐에 난입하여 통곡하였다. 조광조는 유배되었지만, 중종이나 남곤 등은 그의 세력을 확실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우호적인 인사들은 하나둘씩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광필이 영의정에서 물러났고, 안당도 파직당했다가 영중추부사로 옮겼지만 지속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결국 조광조는 사사당했고,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 윤자임(尹自任) 등도 유배되었다.

반면, 남곤과 심정은 정승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남곤은 세상을 떠난 이후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 1558년(명종 13)에 삭탈관직 당했고, 심정은 김안로(金安老)와 정치적 갈등을 겪다가 1531년(중종 26)에 사사되었다.

4 신사무옥의 전개과정

기묘사화 이후 중종과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행해졌던 개혁들을 모두 폐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당성은 부족했고, 조정에는 조광조를 지지했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21년(중종 16) 10월 11일에 송사련과 정상의 고변이 올라왔다.

송사련의 고변 내용은 안처겸이 이정숙, 권전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남곤, 심정 등의 공신 세력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안처겸의 어머니 장례식의 조객록(弔客錄)과 발인(發靷) 때의 역군부(役軍簿) 등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결과적으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의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광조가 제거된 이후 정국은 긴장 국면이 계속되었고, 송사련의 고변이 올라오자마자 정국은 역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추국을 맡은 대사헌과 대사간은 “그들이 종사에 관계되는 어떤 계책이 있을 것인데도 형장을 견디며 자복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고, 추국은 연일 계속되었다. 22차례의 형장과 심문 끝에 이정숙은 중종의 폐립을 고려했었다고 자복하였다. 권전이 형장을 맞다가 죽고, 안처겸도 결국 중종 폐립을 시인하고 말았다. 거기에 경명군(景明君)을 추대하려고 했다는 말까지 추국 과정 중에 나왔다.

중종은 안처겸 옥사와 관련하여 1백 명 이상을 처벌하였다. 안처겸, 이정숙, 안처근, 안형(安珩), 신석(申晳) 등이 처형되었고, 일부는 형장을 받다가 죽거나 유배되었다. 더불어 기묘사화 때 목숨을 부지한 김정, 기준(奇遵)도 결국 죽임을 당했고, 한충(韓忠)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5 기묘사화, 신사무옥 연루자들의 신원

안처겸 옥사의 연루자들에 대한 신원(伸寃)은 사건 이후 3개월이 지났을 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했다. 유배된 자들의 가족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국왕에게 선처를 바라는 사례가 이어졌고, 일부는 유배에서 풀려나기도 했다. 1529년(중종 24)에 정광필은 혐의가 뚜렷하게 없는 자들을 풀어주자고 건의하였고, 1533년(중종 28)에는 구수담(具壽聃)과 이준경(李浚慶) 등의 건의로 안처겸 옥사 연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 조치가 내려졌다.

한편, 1544년(중종 39)부터는 삼사에서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대한 신원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중종은 임종 직전에 조광조의 신원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명종 즉위 직후인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면서 신원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윤원형(尹元衡) 처형 이후인 1565년(명종 20) 조광조 신원에 대한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 선조 가 조광조의 복관과 추증을 명하였다.

6 무고자 송사련은 어떻게 되었나

송사련(1496~1575)은 안처겸의 고종사촌이었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으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그가 왜 사촌을 역모로 내몰았는지는 다음의 이유가 거론된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송사련이 남곤과 심정의 사주를 받았다고 서술하였고, 『대동야승』에서는 남곤과 심정에게 아부하여 상을 받아내려는 의도였다고 기술했다.

한편, 송사련은 안처겸의 역모를 고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중종부터 선조 까지 네 임금을 섬기며 관직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아들 송익필(宋翼弼), 송한필(宋翰弼)은 학문적으로 명망이 높았다. 이이(李珥)가 함께 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으로 이들 형제를 꼽을 정도였고, 성혼(成渾)도 아끼고 존경하는 벗[외우(畏友)]으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들은 아버지의 무고로 인해 관작이 삭탈되어 반노(叛奴, 상전을 배반한 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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