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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박해[辛亥迫害]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부모의 신주(神主)를 불태우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대표 이미지

천주실의(天主實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정조 15) 발생한 최초의 천주교 탄압이다. 신해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해박해라고 하며, 전라도 진산군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진산사건은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조상 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모두 불태워 땅에 묻었으며 어머니의 상례를 전통적인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 발생하였다. 이 사건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윤지충과 그를 도운 권상연(權尙然)이 처형되었다. 조선에서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발생한 것이다.

2 조선의 천주교 도입과 금지

조선 천주교는 정조대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양반 지식인들이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신앙을 깨우치고, 또 공동체인 교회를 조직하며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 1783년(정조 7) 남인 학자였던 이승훈(李承薰)은 동료들과 서학(西學)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는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갔다가 북경(北京)에서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이벽(李檗), 권일신(權日身) 등과 함께 천주교의 교리를 전파하였는데, 이들은 대개 남인 계열 성호 이익(李瀷)의 제자들이었다.

천주교가 전파되며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반응이 나왔다. 조선은 오래부터 성리학을 신봉하는 국가였는데, 천주교는 성리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상이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를 학문으로 인정할 수는 있어도 실천적인 종교로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1785년(정조9)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발생했다. 이것은 한양에서 추조(秋曹: 형조) 관원이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천주학을 강의하던 이승훈을 적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천주학(天主學)이 사악한 학문[邪學]으로 규정되었다. 이어 1787년(정조11)에는 ‘반회사건(泮會事件)’이 발생했다. 이승훈과 정약용(丁若鏞)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가 유생들에게 발각되어 폭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고,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엄격히 금지하게 되었다.

3 성리학의 나라에서 제사를 부정하는 사건이 발생하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에서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선 상상도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진산군에는 매우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성리학에 심취하여 군주에 대한 충성과 조상에 대한 효심을 강조하던 나라에서, 감히 부모와 조상에 효를 다하지 않는 불효 망측한 양반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의 대상은 진산에 사는 천주교도 윤지충이란 사람이었다. 윤지충은 천주교에 심하게 빠져서 제사도 일절 지내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는데 어머니 신주도 불에 태워버리고 그 재를 뒤뜰에 묻었으며, 문상객들도 모두 쫓아내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소문이 너무나도 불경스럽고 망측해서 손가락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더욱이 이 모든 일을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 두 사람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사실 윤지충은 소문과는 달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장례를 극진히 치렀다. 다만 당시 조선에서 행해지던 상례 방식을 따르지 않았을 뿐, 문상객에게도 예의를 다했다. 또한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절하는 의식을 생략했다. 물론 이러한 행위 자체도 당대에는 용납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소문은 윤지충이 패륜적인 행위를 했다고 퍼졌으며, 이는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과 전라감사 정민시(鄭民始)에게 윤지충을 조사하라고 명을 내렸다. 신사원은 소문대로 윤지충의 집에 신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도망간 윤지충을 수배하였다. 우선 윤지충의 삼촌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친족의 고초가 알려지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윤지충이 천주교에 빠지게 된 내력이 조사되었다. 윤지충은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한양에 머무는 동안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를 보았고, 이 책을 베껴 써서 고향에 돌아가 여러 사람과 돌려가며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윤지충은 또한 “천주(天主, 하나님)를 모시는 이상 신주(神主, 조상)를 모실 수 없다. 천주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았기에 신주를 땅에 묻었다.”고 고백하였다. 권상연 역시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어머니의 상례는 극진히 치렀다고 강변하면서 끝내 천주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바로 진산사건이고,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탄압을 받은 것이었기에 신해박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보았던 이 사건은 이후 노론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에 의해 확장된 측면도 있었다.

4 노론, 진산사건을 이용해 남인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다

신해박해는 직접적으로 윤지충의 불효한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여기에는 오랜 기간 누적된 정조대의 노론과 남인 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확대된 측면도 있었다. 사실 진산에서 처음 윤지충과 권상연의 불효 행위가 있었을 때, 이 사건은 지방 관찰사가 알아서 처결할 문제로 여겨졌다. 보고를 받은 국왕 정조도 중앙에서 처리할 문제로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여러 노론 신료들과 남인 계열이었던 홍낙안(洪樂安) 등은 사건의 중대함을 들어 적극적으로 윤지충을 비방하면서 중앙 조정에서 천주교 문제를 논의하게 만들었다.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적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행위를 한 사건이었고, 처벌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천주교는 이전부터 이단이었고 윤지충이 행한 행위 역시 규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처벌 범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의 문제였다. 노론 계열은 조정의 남인 계열을 윤지충 일파로 엮어서 함께 처벌하고자 하였다. 반면, 남인 계열에서는 이를 윤지충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명하여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게 하였고, 결국 이 두 사람은 불효, 불충, 악덕하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또한 천주교 교주(敎主)로 지목받았던 권일신(權日身)도 연루되어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진산군(珍山郡)은 5년 동안 현(縣)으로 강등되는 조치가 내려졌다. 진산군수였던 신사원 역시 천주교인들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한 이유로 유배되었다. 홍문관에 소장된 서양 서적들과 권일신의 집에 있던 서적도 불사르도록 하였다. 이 외에 조사 과정에서 천주교 일파로 지목된 최필공(崔必恭), 이존창(李存昌), 최인길(崔仁吉) 등도 천주교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여 회개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조선에서 첫 번째로 발생한 천주교 박해는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 이외에는 관련된 자들이 다수 방면되거나 주의 조치만 받는 등 큰 처벌은 받지 않았다. 즉, 사건이 유교적 강상을 어지럽힌 중대한 문제로 지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이 강력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노론 계열에서는 처벌의 부당함을 강하게 상소하였다. 노론 계열에서는 이들에 대한 처벌 수준을 강화할 것을 꾸준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오히려 강경한 노론 계열을 파직시키면서 사건을 온정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정조가 이 사건을 온건하게 처리한 것은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비화되어 자신이 신뢰한 남인 계열의 정치인들이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진산사건의 주범인 윤지충은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윤선도(尹善道)의 7대손이고, 윤두서(尹斗緖)의 증손이었다. 즉, 당대 명문 남인 가문의 혈족이었다. 더욱이 윤지충은 정약용과 고종사촌 관계였고, 정약용의 매형이 이승훈이었다. 이들은 모두 남인이었다. 당시 정조는 노론 계열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재상이었던 체제공(蔡濟恭)을 누구보다도 신뢰하며 비호하고 있었다.

정조는 누구보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고, 효심이 매우 깊은 사람으로서 윤지충 등이 행한 불효한 행위를 두고 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조는 애당초 이 사건의 파장은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체제공 등 남인 계열을 공격하기 위한 노론 계열의 획책이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직접적 관련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였지만, 이 사건을 남인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켜서 남인에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신해박해는 이렇게 사건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 두 명이 사형되고, 연루자 몇 명이 유배된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5 남인, 천주교 문제로 갈등이 일어나 분열되다

신해박해가 종결되고, 이후 이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대 정치인들의 행보가 나뉘게 되었다. 남인 내부에서조차 천주교 신봉을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를 탄압하는 공서파(攻西派)로 갈라졌다. 신서파에는 당시 재상인 체제공)이 포함되어 있었고, 공서파에는 홍의호(洪義浩)와 홍낙안(洪樂安)이 속해있었다.

진산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남인인 체제공이 중심이 되어 정조를 보필하며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조의 신임이 있긴 했지만 진산사건으로 체제공은 정치적인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체제공은 정국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던 지위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정조는 체제공을 계속 신임했으나, 노론과 남인 공서파는 신서파와 지속적으로 대립하였다. 약 10년간의 정치적 대립의 결과,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다. 이때 신서파와 남인 계열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고, 이후 정국은 노론 계열의 주도로 천주교 탄압이 심화되었다. 이처럼, 신해박해는 이후의 정치 체제 개편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신해박해가 정치적인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최초로 천주교가 지닌 문제점을 직면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신해박해 이후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천주교는 100년에 가깝게 탄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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