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양재역벽서사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

1547년(명종 2)

1 개요

양재역벽서사건은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1547년(명종 2) 9월 경기도 과천 양재역(良才驛)에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락하고 있다는 내용의 벽서가 발견되었다. 이기 등은 이러한 벽서를 붙인 것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잔당이 행한 짓이라며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결국 대윤(大尹)의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 등이 사형당하고, 권발(權撥), 이언적(李彥迪), 정자(鄭磁),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였다.

2 윤씨 집안의 피 터지는 싸움

중종은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한 뒤 반정을 주도했던 윤임(尹任)의 여동생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왕후가 원자(뒤의 인종)를 출산하고 산후병으로 죽자, 윤임은 인종을 보살펴 줄 계비를 자신의 가문 사람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바로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이다. 문정왕후는 결혼 20년 만에 첫아들인 경원대군(慶原大君,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전까지 인종을 키우며 보호막으로 삼았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삼기 위해 동생 윤원형의 도움을 받으며 같은 윤씨 집안의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정쟁을 하였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둘러싼 대윤(大尹)과 문정왕후의 윤원형을 둘러싼 소윤(小尹)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대윤과 소윤의 대립 속에 중종이 병으로 죽자, 인종이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로써 대윤인 윤임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사림파를 중용하며 정치에 열정을 보였지만 병약하여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인종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이복동생인 경원군(慶原君, 뒤의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어머니 문정왕후가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윤임에게 보복할 기회를 얻은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밀지(密旨)를 받고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대윤 일파가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하고 있다며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그 결과 대윤 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이휘(李輝), 이덕응(李德應) 등은 각기 성산(城山), 과천, 문의(文義), 군기시에서 참형을 당한 3일간 효수(梟首)되었으며, 이유(李瑠)의 아들 이시(李諟)·이형(李詗)·이후(李詡)와 유인숙의 아들 유희민(柳希閔), 윤임의 아들 윤흥례(尹興禮), 금이(金伊) 등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왕위를 확고히 한다는 명분을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소윤과 문정왕후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 나아가 훈구세력이 사림을 견제하고 정권을 잡는 기회가 되었다.

3 정언각(鄭彦慤)이 발견한 양재역의 벽서

정국이 사화로 불안한 가운데 1547년(명종 2) 부제학 정언각이 선전관 이노(李櫓)와 함께 익명서를 가져와 조정을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이 익명서를 발견하게 된 것은 딸이 전라도로 시집을 가게 돼서 전송을 하기 위해 양재역을 갔다가 우연히 벽에 쓰여 있는 붉은 글씨를 보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고가는 역에 붙여 있었던 데다 그 내용이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것이어서 이들은 급히 명종에게 익명서를 가지고 가서 고했다.

벽서에는 붉은 글씨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이라고 쓰여 있었다.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이기, 우의정 정순붕 등은 이를 을사사화와 위사공신(衛社功臣)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연장선으로 인식하였다.

문정왕후는 을사사화의 죄인을 처벌할 때 주동자만 처벌하고 추종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양재역 벽서사건의 원인이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에 윤인경, 이기, 정순붕 등은 을사사화에 화를 입은 죄인들에게 가형(加刑)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이완, 송인수(宋麟壽), 이약빙(李若氷)은 사형에 처했으며, 이언적(李彦迪), 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하고, 노수신(盧守愼), 정황(丁熿), 유희춘(柳希春), 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였다. 이외에 권응정(權應挺), 권응창(權應昌), 정유침(鄭惟沈), 이천계(李天啓), 심영(沈苓), 임형수(林亨秀)외 17명이 유배되었다.

대신들은 이 가운데 중종의 후궁 소생인 봉성군 이완을 양재역 벽서사건의 화근으로 지목하였다. 따라서 문정왕후는 명종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그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사사하였다. 윤임(尹任)의 심복인 임형수의 경우 그가 “윤원형(尹元衡)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했기 때문에 중죄에 처하였다. 또한 명종에게 ‘애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대왕대비에게 ‘고보살(孤菩薩,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보살이라는 뜻으로 과부를 흉하게 부르는 말)에게는 섭정(攝政)의 권한을 맡길 수 없다.’는 등 불손한 말을 한 심영(沈苓)에게 중죄를 청하였으나 그는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이후에도 을사사화의 공신세력은 사림파에게 계속 위해를 가하였다. 1548년(명종 3) 2월에는 을사사화와 공신 책록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의 편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신세력들이 을사년(1545년, 명종 즉위) 8월의 시정기를 가져가 살펴보는 일이 있었다. 이때 당시 사관(史官) 안명세(安名世) 등이 죄인들의 진술은 생략하여 기록하지 않았고, 역적이라고 쓰지도 않는 등 사실과 다르게 기록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윤인경, 이기, 정순붕 등은 안명세, 손홍적(孫弘積) 등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사림파의 피해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1549년(명종 4)에는 사인 정유길(鄭惟吉)과 교리 원호변(元虎變)이 함께 정원에 나아가 봉서(封書)를 올리고 고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내용은 을사사화로 유배 간 이약빙의 아들 이홍윤(李洪胤)이 명종을 연산군에 비유하며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고 비방하고 충주 사람들과 규합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고변으로 옥사가 이루어져 충주사람 중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간 자가 40∼50인에 이르러 충주가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소윤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은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사림은 정권의 핵심에서 벗어났지만 온건한 인물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공론(公論)을 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4 선조, 사화의 피해자들을 복관(復官)하다

선조는 즉위한 후 권신(權臣)들을 제거하는 조치와 함께 사화의 피해를 입은 사류(士類)들에 대한 석방과 복관 조치를 진행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 9월 좌의정 이명(李蓂)은 새 정치의 급선무로 원통한 것을 풀어 주고 침체된 것을 진작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사화로 화를 당한 사람들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10월에는 삼정승 이하 관료들이 죄를 받은 사람과 물러난 사람들을 분류하여 서계하였고, 영의정 이준경(李凌慶)이 주도하여 화를 당한 사람에 대한 석방과 복관을 추진하였다.

먼저 1549년(명종 4)에 이홍윤 옥사 때 화를 당해 유신현(惟新縣)으로 강등된 충주(忠州)의 명호를 복구하였다. 또한 송인수 등 5명을 제외하고 유배 중인 유희춘, 노수신, 김난상을 방면하고 직첩을 환급하였다. 그러면서 김난상과 유희춘을 직강(直講)으로 삼았다. 아울러 한주(韓澍), 이진(李震), 윤강원(尹剛元), 이염(李爓), 박민경(朴民敬), 이구수(李龜壽), 김여부(金汝孚), 이명(李銘), 김진(金鎭), 김규(金虬), 이원록(李元祿)·유감(柳堪) 등을 서용하였다.

이와 함께 10월 15일에 선조는 을사년 이후에 죄를 받고 적몰당한 사람들을 신원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을사년의 시정기가 문제가 되어 화를 당한 사관 안명세에게는 직첩을 환급하고 처와 자식들을 방송했으며, 적몰한 재물도 돌려주었다. 정유침과 윤충원도 직첩을 환급하고 서용하였다.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 이천계(李天啓), 김진종(金振宗), 조박(趙璞), 구수담(具壽聃), 이치증(李致曾), 손흥적(孫弘績) 등 사화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직첩도 환급해 주었다. 이날 신원에서 제외되었던 송인수, 임형수의 경우는 여러 신하들이 간곡한 청으로 10월 30일에 신원하였고, 적몰되었던 것들도 돌려주었다.

이처럼 명종대 정권을 장악했던 훈척세력의 파행을 경험한 선조는 이후 사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대폭 기용하여 사림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