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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

조선 전기 여진족 대책의 정점

미상

여진 정벌 대표 이미지

15세기 여진족의 주활동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조선 전기~중기에 걸쳐 이루어진 여진족에 대한 대규모 군사활동. 상국(上國)인 조선이 여진족들을 징계한다는 의미에서 정벌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2 여진 정벌의 배경

조선은 건국 이전부터 태조 이성계를 통해 여진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태조는 건국 이후 여진족들에게 벼슬을 주는 등 회유책을 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면에 군현을 설치하여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후의 국왕들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압록강·두만강 이내를 조선의 영토화하고, 변경을 안정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여진족에 대해 안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은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상국(上國)인 명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여진족들은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행동하였는데, 이는 조선과 명의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으로서는 여진족들이 명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여진족의 침입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조선은 여진족에게 관직과 물질적 대가를 제공하여 회유하였으며, 원하는 경우에는 조선 영토에 들어와 조선의 군사거점 아래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책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고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확고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변경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여진족들을 누를 군사적 실력이 있음을 여진족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를 위해 선택된 수단이 바로 정벌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여진 정벌은 단순히 여진족의 침공에 대한 응징일 뿐만 아니라, 여진족에 대한 지배 및 변경의 안정을 관철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3 태종대의 여진 정벌

최초의 여진 정벌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의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의 추장들을 위소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여진족들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명의 건주위도지휘사(都指揮使)로,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이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의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조선의 정벌에 대한 복수로 수 차례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종이 죽을 때까지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4 세종대의 제 1차·제 2차 파저강(婆猪江) 정벌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당시 명의 요동 지역은 몽골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1423년(세종 5) 요동 방면으로 이주했던 오도리의 수장 동맹가첩목아는 몽골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명과 조선의 허락을 받아 무리를 거느리고 옛 거주지인 두만강 유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회령(會寧)) 지역으로 돌아왔다. 또한 1424년(세종 6)에는 이만주(李滿住)가 이끄는 1천 호가 달단에 쫓겨 압록강 중류의 파저강(婆猪江)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조선은 두 집단 중에 명과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만주가 이끄는 집단을 이주 초기부터 경계하여 입조·교역 등의 접촉을 제한하였으며, 따라서 양측의 관계는 순탄치 않게 전개되었다. 또한 조선은 여진족이 부리던 노비가 도망해 오면 조선인은 원래 거주지로 보내고, 중국인은 요동으로 송환하였는데, 이것이 여진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1432년(세종 14) 12월, 여진족 수백여 명이 여연(閭延) 경내에 쳐들어 와서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이만주는 홀라온(忽剌溫) 올적합(兀狄哈)이 조선인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던 것을 자신이 빼앗아 보호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려 왔다. 그러나 세종은 여연 습격에 이만주가 관련되었다고 확신하고, 이만주 세력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1월 19일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사전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파저강 야인을 정벌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정벌을 감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벌을 단행토록 하였다.

최윤덕이 이끄는 1만 5천 명의 원정군은 4월 10일 강계에 모여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이순몽(李順蒙)에게 2,515명,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최해산(崔海山)에게 2,070명,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 이각(李恪)에게 1,770명,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에게 3,010명, 김효성(金孝誠)에게 1,888명, 홍사석(洪師錫)에게 1,110명, 최윤덕 스스로 2,599명의 병력을 통솔하여, 7로로 나누어 4월 19일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여진인 267명을 죽이고 238명을 생포하였으며, 우마 177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귀국하였다. 기습을 당한 파저강 여진족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만주의 처도 사망했고, 이만주 자신도 상처를 입고 도주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사망자 4명, 부상자 25명의 비교적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제1차 파저강 야인 정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정군의 철수 후 이만주 집단은 다시금 세력을 회복하였으며, 조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수차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한편 제 1차 파저강 정벌이 이루어진 1433년 10월 두만강 하류의 여진족 추장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자, 건주좌위의 잔여 세력은 올적합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만주가 있는 파저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합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조선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1437년(세종 19) 5월 올량합(兀良哈) 기병 300여 기가 다시 조명간구자를 습격해 오고, 비슷한 시기에 건주좌위에 명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 위해 이만주가 두만강 하류까지 직접 내려오자, 세종은 김종서(金宗瑞)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만주를 토벌하자고 제의하였다. 신료들이 명과의 관계 및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어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조정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측근 신료들과의 의논을 바탕으로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 등과 함께 가을을 목표로 실질적인 정벌 준비를 개시했다.

제 2차 파저강 정벌은 9월 7일 개시되었다. 총 8천여 명의 정벌군은 3로로 나뉘어, 도절제사 이천은 여연절제사 홍사석(洪師錫)과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772명을 거느리고 옹촌(甕村)·오자점(吾自岾)·오미부(吾彌府) 등지를 향해 강계에서 강을 건넜고, 상호군 이화(李樺)는 좌군 1,818명을 거느리고 올라산(兀剌山)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은 우군 1,203명을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아한(阿閒)으로 향하여 모두 이산(理山)에서 강을 건넜다. 정벌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불태운 뒤 16일에 돌아왔는데, 적군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조선군은 1명이 전사하였다.

제 2차 파저강 정벌은 여진족의 근거지에 타격을 주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제 1차 정벌보다 전과도 적었고, 이만주 포착에도 실패하였다. 이는 파저강 야인들이 정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정벌의 성과에 대한 평가 및 이천을 비롯한 정벌군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세종은 적을 징계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논란을 봉합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통해 조선은 압록강 건너의 여진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주본위의 지휘자 이만주를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주의 제거라는 목표는 결국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5 세조대의 모련위·건주위 정벌

세조는 즉위한 이후 이만주를 포함한 여진족 세력들의 내조를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여진족 정책을 폈고, 이만주 등도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에 따라 여진족과 조선 사이의 교류는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는 다시금 문제가 발생했다. 1459년(세조 5) 6월, 신숙주는 세조의 명을 받아 함길도에 내려가서 여진족 세력들 간의 화해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북쪽에서 유력한 세력을 이루던 낭발아한(浪孛兒罕)만이 병을 칭하고 오지 않았으며, 낭발아한의 족인(族人)들이 그를 부르러 파견된 통사를 쏘려고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낭발아한은 조선에서 장차 자신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하였고, 이를 여러 부족에 전하여 민심을 혼란시켰다. 이는 낭발아한이 함길도도절제사 양정(楊汀)과 사이가 나빴고, 조선 군사들이 자신들의 땅을 염탐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세조의 유화책과 더불어 낭발아한이 자신의 잘못을 해명함으로써 사건이 무마되는 듯했으나, 낭발아한의 아들인 낭이승가(浪伊升哥)가 몰래 중국에 가려고 했다는 고발이 들어오자, 세조는 태도를 바꾸어 낭발아한 부자 및 친족들을 참수하였다. 이로 인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 사회에는 동요가 발생했다. 또한 낭발아한이 참수된 이후 살아서 도망친 그의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군사를 모아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세조 즉위 이래 없었던 야인들의 침입이 재개되었다. 아비거는 1백여 기를 인솔하여 조선을 공격했지만 조선군에 요격되어 전사하는 등, 변경의 방어로 인해 여진족들은 조선에 큰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를 명분으로 하여 모련위를 정벌, 모련위의 유력 추장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460년(세조 6) 3월, 세조는 본격적으로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명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벌 계획을 진행시켰다. 8월 말 신숙주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정벌군은 두만강을 건너 여러 길로 나누어 여진족의 근거지를 초토화하고 돌아왔는데, 추장 90여 명을 회령에서 죽이고, 이외에도 잡아 죽인 숫자가 430여 명이었다. 또한 불태워 없앤 집이 9백여 채이며, 죽이거나 사로잡은 소와 말이 1천여 마리에 이르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보고를 받은 세조는 크게 기뻐하며 북방을 평정한 일을 종묘에 고하고, 근정전에 나아가 신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세조는 명에 간략히 정벌의 결과를 보고하는 한편, 10월 4일 평안도·황해도 일대로 순행을 실시함으로써 정벌로 얻은 정치적 성과를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모련위 정벌의 결과 조선은 여진족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변경 지역이었던 삼수·갑산의 방어를 강화하고 영토화를 진전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야인들의 국경 침입이 계속됨으로써, 정벌을 통해 변경을 안정시킨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재정벌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세조는 당장의 군사적 조치를 자제하면서 두만강 하류의 모련위와 압록강 중류의 건주위가 연합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획책하고, 때를 기다려 재정벌을 실시하려 했다.

모련위 정벌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세조는 건주위 정벌을 언급하며 이만주가 이끄는 건주위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이미 세종 때 두 차례 정벌의 대상이 되었던 이만주는 세조 즉위 이후 조선의 신뢰를 얻음으로써 다시 정벌의 대상이 되는 일을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은 꾸준히 이만주 세력을 안심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이는 그들의 대비를 늦추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만주 역시 명에 사신을 파견해 조선의 공격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등 조선의 재정벌에 대비하고 있었다.

조선이 방어태세를 강화하고 여진족에 대한 압박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명에서는 과도한 비용 문제 등을 이유로 여진족과의 교역량을 크게 줄였다. 이에 따라 여진족들은 조선보다 명에 대한 약탈 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467년(세조 13) 5월 올량합 천여 명이 의주(義州)를 공격하여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세조는 야인들이 이미 중국을 능멸하고 조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공격할 의사를 밝혔다. 당시 신숙주와 한명회(韓明澮) 등은 이에 동의하였고, 세조는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치관(具致寬)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1만 5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도록 지시하였다. 건주위를 세 번째로 정벌할 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명과 여진족 사이의 분쟁, 그리고 여진족의 대규모 변경 침입을 계기로 하여 시기를 보고 있던 대규모 정벌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벌군의 출동이 결정되었으나, 곧이어 이시애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정벌이 연기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러는 사이 명에서도 자신들의 변경을 약탈하는 건주위를 응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진족들에 대한 지배를 재확립하기 위해 건주위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에 건주위의 퇴로를 막아 이들을 함께 섬멸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명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낼 것을 결정하였고, 윤필상(尹弼商)을 평안도선위사로 임명하여 정벌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세조는 명군의 지휘를 따르는 형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군에 협력한다는 구실 하에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9월 26일, 정벌군의 주장(主將) 강순(康純)은 남이(南怡)·어유소(魚有沼)와 더불어 1만 명의 정벌군을 둘로 나눠서 건주위를 향해 쳐들어갔다. 강순·남이가 이끄는 부대는 이만주와 그의 아들 이고납합(李古納哈)·이두리(李豆里) 부자 등 24명을 베어 죽이고 그들의 처자와 부녀 24명을 사로잡았으며, 175명을 사살하고 가옥과 곡식을 불태웠다. 어유소가 이끄는 부대 역시 21명을 참하고 50명을 사살하였으며 주위를 초토화시켰다. 세조는 이에 크게 기뻐하였고, 정벌 성공을 기념하여 사유령(赦宥令)을 내림과 함께 명에 주문(奏文)을 올려 조선군의 승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세조대 건주위 정벌이 갖는 의미는 컸다. 건주위의 근거지에 대타격을 입혔음은 물론, 세종대부터의 숙원이던 이만주 포착 및 참살이라고 하는 중대한 전략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는 건주위의 주력군이 요동으로부터 진군해 오는 명군을 상대하기 위해 대다수가 나가 있었으므로, 그 빈틈을 조선이 원정군이 노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였다. 이를 통해 세조대에는 여진족에 대한 지배권을 그 어느 때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6 성종대의 여진 정벌과 그 한계

세조대의 정벌로 건주위의 힘이 일시적으로 크게 약해지기는 했으나, 건주위 여진족들은 이후에도 간간이 명과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당시 명의 최고 권력자였던 왕직(汪直)은 여진족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건주위에 대한 정벌을 직접 주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명은 조선에 원군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1479년(성종 10) 10월, 본격적으로 명이 건주위를 정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파병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성종은 평안도의 흉년, 건주위의 험한 지형, 여진족들의 조선에 대한 경계 등의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사대의 명분상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중히 여겨 정창손(鄭昌孫), 한명회 등의 의견에 따라 우찬성(右贊成) 어유소를 대장으로 하는 1만 명의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승문원참교 정효종(鄭孝終)이 이번 토벌은 명과 건주위의 싸움이므로 조선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상소를 올리고, 이에 따라 찬성론자들도 동요하는 등, 반대 의견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명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 출병을 결정했다. 대신 출병 시기를 최대한 늦추면서 명과 건주위의 싸움이 전개되는 형세를 파악하고, 정벌할 때도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지 말고 형세를 파악하여 병력을 보존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을 지시하였다.

정벌군은 10월 말에 출발하려 했으나, 압록강이 얼지 않아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널 수가 없었으며, 얼음과 눈 때문에 적유령(狄踰嶺)을 넘을 수 없어 원정을 중지하고 파진(罷陣)하였다. 이에 대해 성종은 형세의 불가피함을 인정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정승들이 명에서 의심할 가능성을 제기하여 일부 병력만 동원한 재출병을 주장하였다. 성종은 일단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은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재출병을 결정하였다. 12월 9일 좌의정 윤필상이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 13일부터 실전에 돌입하여 950명의 병력으로 15명을 참수하고 1명을 사살하였으며, 중국인 7명을 구출하고 부녀 및 아이를 15명 생포함과 함께 가옥을 불지르고 가축을 쏘아 죽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없었다. 비록 명군이 이미 정벌하고 돌아간 뒤이고, 또한 전과 자체도 소규모였으나, 큰 손해 없이 명군에 협조했다는 명분은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여진족의 조선 변경 침입이 간간이 일어났는데, 특히 거듭된 정벌로 인해 조선과 앙금이 남아 있던 건주위 야인들이 조선의 변경 침입에 적극적이었다. 1491년(성종 22) 1월에는 올적합 1천여 명이 영안도(永安道)의 조산보(造山堡)를 포위하고 성까지 넘어 공격해 들어와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상황이 발생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 2천여 명에 달하는 야인이 평안도의 창주진(昌洲鎭)을 포위하였다가 조선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동북쪽과 서북쪽에서 대규모의 침입이 동시에 있었던 셈이다.

성종은 영안도 지역에 대한 올적합의 침입을 더욱 중시하여, 이에 대해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동북방의 여진족 중 가장 강력하고 약탈을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니마차(尼麻車) 올적합이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은 2만 명의 군사를 징집하도록 하여, 조선 전기 최대 규모의 정벌군 편성을 명하였다. 그러나 실상 영안도 방면보다는 평안도 방면의 여진족 침입이 더욱 자주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정벌의 중지를 청하는 여론이 조정에서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침략의 횟수보다는 성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였다는 침략의 심각성을 더욱 중시하고, 평안도 방면의 건주위 정벌은 명과의 마찰을 부를 수 있다는 이유로 동북방의 니마차 올적합을 정벌하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성종은 압도적인 반대를 무시하고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로 임명하여 5월 15일에 내려보냄으로써 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허종이 이끄는 정벌군은 10월 15일 두만강을 건넜고, 소규모 교전을 하면서 23일에 여진족의 본거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진족들은 대군이 접근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본거지를 비우고 숨어버렸기 때문에 적군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하였고, 어쩔 수 없이 집들을 불태우고 후퇴해야만 했다. 돌아오는 길에 여진족 2백여 기의 습격이 있었으나 격퇴한 것이 마지막 교전이었다. 이번 정벌을 통해 참획한 적은 9명에 불과하였다.

니마차 올적합 정벌은 패배는 아니었으나, 2만 명이라는 조선 전기 사상 최대의 군대를 동원하여 단행한 원정으로서는 초라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정벌을 강행했던 성종 역시 대첩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로써 실망을 드러낼 수준이었다. 대규모 정벌을 강행하였다가 실패함으로써, 국왕의 권위가 손상되었던 것이다.

7 명종·선조대의 여진 정벌과 그 종말

성종대의 니마차 올적합 원정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규모 여진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영향력이 성종대를 기점으로 하락한 데 큰 원인이 있다. 여진족의 주요 세력들은 16세기에 접어들어 조선보다는 명과의 접촉을 우선시하였고, 대규모 정벌을 섣불리 단행하기 어려워진 조선으로서도 정벌이라는 수단을 통해 여진족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조선은 먼 지역에 사는 대규모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고, 두만강 안팎 조선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거주하는 번호(藩胡)들에 대한 지배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후 단행된 여진 정벌은 이전에 비해 규모가 작아졌고, 정벌이 계획되었다가 취소되는 사례가 잦아졌으며, 목적도 침략에 대한 직접적인 응징으로 변화해 갔다.

연산군 대에는 1498년(연산군 5) 여진족 50여 명이 삼수에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우의정 성준(成俊)을 지휘관으로 한 정벌이 계획되었으나, 조정에서의 강한 반발로 중지되었다. 중종대에도 1518년(중종 13) 속고내(束古乃)가 갑산에 침입한 사건에 대해 이를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28년(중종 23) 여진족의 침입으로 만포첨사 심사손(沈思遜)이 살해되자 본격적 정벌 준비가 이루어졌으나 대간과 홍문관의 반대로 중지되었다.

명종대에는 1554년(명종 9) 북병사(北兵使) 이사증(李思曾)에 의해 두만강 건너 초관(草串)에 살면서 서수라(西水羅) 지역에 침입하여 조선인을 생포하는 등 문제를 일으킨 여진족 부락에 대한 공격이 단행되어 59명을 참획한 일이 있었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선조 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경원부(慶源府)의 이탕개(尼湯介) 등이 1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鹿屯島)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북병사 이일(李鎰)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를 정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올리자, 선조는 사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윤허하였다. 그 결과 1600년(선조 33)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3천 명의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누르하치 및 그와 적대하는 홀라온 양쪽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를 끝으로 조선의 여진 정벌은 막을 내렸다.

이후 1607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제 조선은 공세적으로 여진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강성해진 여진족의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8 여진 정벌의 역사적 의의

조선은 여진족과의 역사적 연고를 토대로 여진족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추구하였다. 이는 회유책으로 달성되기도 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약탈을 응징하고 여진족들을 강제로 조선의 영향권에 편입시킬 물리적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여진 정벌을 감행하는 것은 국왕의 권위를 드높여주는 효과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국왕이 주도하는 대규모의 여진 정벌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종 대 대규모로 이루어진 여진 정벌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후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여진 정벌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명종·선조대에 다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으나, 이때는 조선의 영향권 하에 있는 번호의 이탈 및 침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여진 정벌의 목적이 달라져 있었고, 그 규모 역시 이전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이윽고 여진족 내부의 통일이 진전되자, 여진 정벌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조선은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게 되었다.

여진 정벌은 이만주를 체포·참살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큰 비용이 든 데 비해 전과는 크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벌에 반대하는 여론이 상시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여진 정벌은 여진족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여진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억제하는 데 여진 정벌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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