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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과 양명학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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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과 이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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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리학과 양명학

근세 동아시아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친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이었다. 성리학은 송대 이학자인 주희(朱熹, 1130~1200)가 집대성하였으며, 후대 유학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추숭하며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이에 따라 성리학은 흔히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려 왔다. 성리학이란 어떤 학문인가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우주의 생성 원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 그리고 개인의 수양에 대한 강조가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제기되어 온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신화(神話)나 우화, 이후에는 주로 불교와 도교의 교리를 통해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고 비유적인 서사로 구성되었다. ‘공자(孔子)는 괴력난신에 대하여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子不語怪力亂神)’, ‘삶도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不知生, 焉知死)’라는 『논어(論語)』의 구절이 말하듯이, 고대 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불교와 도교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하면서, 이른 시기부터 중국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유학은 관학(官學)으로서의 위상은 굳건하였지만 그만한 매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송대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들의 교리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교 경전의 내용들을 기반으로 형이상학적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성(性)’에 주목하였다. ‘성’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천성적으로 내재된 특성이었다. 그리고 유학에서는 성을 파악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들은 ‘성이 곧 이치’라는 의미의 ‘성즉리(性卽理)’를 핵심적인 명제로 내세웠기에 이들의 학문을 ‘성리학’이라고 칭하였다. ‘성’의 근거로서 ‘하늘이 내린 명을 성이라 하고, 그러한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는 「중용(中庸)」의 구절이 근거로 제시되었고, ‘성’을 깨우치기 위한 방식은 「대학(大學)」에서 발견되었다. 주희는 『예기(禮記)』의 한 장(章)이었던 ‘중용’과 ‘대학’을 『논어』와 『맹자(孟子)』와 같은 반열에 올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四書)’ 체계를 수립하였다.

성리학은 탐구자의 ‘마음(心)’ 바깥에 ‘성’이 존재하기에 탐구자는 ‘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앎에 이르고서(格物致知) 뜻을 진실히 하고 마음을 바로 한다(誠意正心)’는 『대학(大學)』의 구절처럼, 성리학에서는 객관적인 탐구와 지식이 선결 조건이며 이를 통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의 경향은 지나치게 사변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따라 후대에는 새로운 학문 사조가 등장하였다. 흔히 ‘양명학(陽明學)’이라고 부르는 이 학문은 명(明) 중기 집대성되었으며, 마음이 곧 성이요 이치라는 의미의 ‘심즉리(心卽理)’의 명제를 제시하였기에 ‘심학(心學)’이라고도 지칭되었다. 양명학에서는 ‘나’의 마음에 이미 이치가 완비되어 있으니, 마음에 존재하는 그 이치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치를 깨닫기 위한 방식으로서 양명학에서는 진정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는 ‘치양지(致良知)’를 주장하였다. 맹자(孟子)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양능이라 하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을 양지라 한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고 주장하면서 사람은 각자 타고난 능력과 앎이 있으며 그것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양명학의 ‘치양지’는 바로 『맹자』의 구절에서 그 근거를 발견하였다. 양명학에서는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양지가 주어져 있으며 이를 통해 직관적으로 시비 판단을 내릴 수 있지만,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하여 그것이 흐려짐에 따라 양지를 실현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양명학에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여 양지에 이른다면 누구든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고 난 후에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성리학의 가르침과 달리, 양명학에서는 앎과 행동이 하나라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양명학에서는 우주의 이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 왕수인의 생애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은 명 중기 관료이자 사상가로, 흔히 호를 따라 ‘왕양명(王陽明)’이라고 불린다. ‘양명학’이라는 용어 역시 그의 호에서 유래한 것인 만큼, 양명학은 왕수인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고 평가된다. 왕수인 이전에도 그와 비슷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주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은 오늘날 장시성(江西省) 출신으로, 흔히 호를 따라 ‘육상산(陸象山)’으로 불린다. 육구연은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를 주장함으로써 동시대에 살았던 주희와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다. 왕수인은 이러한 육구연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양명학을 육구연과 왕수인의 성을 따서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왕수인은 1472년 오늘날 저장성(浙江省) 위야오(餘姚)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왕수인은 사고하고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왕수인의 타고난 학자 기질은 몇 가지 일화를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일화에 의하면 17세였던 당시 그는 부인 제씨(諸氏)와 결혼식을 올린 당일, 집을 나와 배회하다가 우연히 만난 도사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집안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집으로 왔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왕수인은 며칠 동안 대나무를 쳐다보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지를 깨닫고자 하였지만 실패하였다고 한다.

이후 왕수인은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도전하였으며, 1499년 28세의 나이에 진사(進士)에 올라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1502년 병을 얻게 되어 귀향하였고, 고향에서 양명동(陽明洞)을 세워 도교와 불교의 교리를 탐구하기도 하였다. 1504년, 관직에 복귀한 후에는 관료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면서도 유교 경전을 강학하였다. 1506년 왕수인은 인생에 있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해는 정덕제(正德帝, 1491~1521, 재위 1505~1521)의 즉위 원년이었다. 당시 조정에는 유근(劉瑾, ?~1510)이라는 환관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남경급사중(南京給事中) 대선(戴銑)과 남경감찰어사(南京監察御史) 박언휘(薄彦徽)가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투옥되었다. 병부주사(兵部主事)를 역임하고 있던 왕수인은 두 사람의 석방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장형(杖刑) 30대의 벌을 받고 구이저우성(貴州省) 용장역(龍場驛)이라는 역참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1508년 왕수인은 용장에 도착하였고 이후 3년 동안 그곳에서 머물렀다. 사실상의 유배 생활과 다를 바 없었지만, 왕수인은 이때 오히려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는 석관(石棺)을 만들어 눕고 약초를 캐먹는 등 도교의 양생술을 따라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도 자유롭게 탐구와 사색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왕수인은 문득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의 도리를 깨달았다. 용장에서 왕수인이 경험한 이 사건을 흔히 ‘용장오도(龍場悟道)’라고 한다.

용장에서의 큰 깨달음 이후, 관료로서 왕수인의 삶은 탄탄대로를 걷는다. 1510년 환관 유근이 처형되면서 왕수인은 지방으로 전임되고 조금씩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특히 병법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왕수인은 장시와 푸젠(福建) 일대 도적들을 토벌하면서 적잖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 1476~1521)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그가 세운 공적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주신호는 장시성 난창(南昌) 일대에 봉해진 황족이었으나, 처우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1519년 자신의 봉토를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였다. 주신호는 한때 명의 남쪽 수도 남경(南京)을 공격하였고 황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제독남공정장군무도어사(提督南贛汀漳軍務都御史)로서 장시성 남부 지역의 군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왕수인에 의해 곧바로 진압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왕수인은 푸젠의 친구를 통해 ‘불랑기총(佛郞機銃)’이라는 유럽에서 수입된 화포를 도입하기도 했지만, 화포가 군영에 도착하였기 직전에 반란이 평정되는 바람에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1521년 가정제(嘉靖帝, 1507~1567, 재위 1521~1567)가 즉위하면서 왕수인은 비로소 황제의 부름을 받아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때 왕수인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 직함을 받았다. 1527년 광시(廣西)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에 따라 왕수인은 제독양광군무(提督兩廣軍務)로서 광둥(廣東)과 광시 두 성의 군무를 담당하였으나, 1년 후인 1528년 임지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사상은 어록과 서간집의 형태를 띤 『전습록(傳習錄)』이라는 책으로 편찬되었다.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실무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올렸던 그의 삶은 ‘지행합일’의 모습 그대로였다.

3 이탁오의 등장과 양명학

왕수인 사후 그의 학술은 여러 학파를 통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흔히 ‘양명좌파(陽明左派)’라고 불린 이들은 인욕(人慾)을 강하게 긍정하는 급진적인 주장을 내세우면서 명말 지식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지(李贄, 1527~1602)는 급진적인 사상과 기행으로 이름을 드날린 대표적인 양명좌파 학자였다. 이지는 푸젠성 취안저우부(泉州府) 진장현(晉江縣)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후에 이지로 개명하였다. 자(字)는 탁오(卓吾)이기에 흔히 ‘이탁오(李卓吾)’로 통칭된다. 그의 고향 취안저우는 원(元)대에 이슬람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번성한 항구 도시였다. 이탁오의 조상 중에도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색목인(色目人)과 결혼하면서 페르시아 지역과 교역한 이가 있었다. 이탁오의 집안 내력은 그의 독특한 학풍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탁오는 40대에 관직에 올랐지만 유학을 강력하게 거부하였고, 양명학과 불교에 심취하였다. 관료 사회와는 맞지 않았던 이탁오는 54세에 요안부지부(姚安府知府)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접었으며, 이후에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탐구와 강학에 힘쓰고 여러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탁오 사상의 핵심은 인욕에 대한 강력한 긍정에 있었다. ‘사사로움(私)은 사람의 마음(心)이요, 사람이 사사로움을 갖춘 후에야 그 마음이 비로소 드러난다(私者, 人之心也, 人必有私, 而後其心乃見)’고 주장할 정도로 그는 인욕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이나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유교 경전의 가식적인 어구를 버리고 ‘동심(童心)’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등 기존의 사회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또한 이탁오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도 하였고 여성들도 자신의 강학에 참여시키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는 지배층의 부패와 태만을 고발하고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별을 타파하는데 앞장섰기에, 일반 민중은 물론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지배층은 이런 주장을 하는 그를 체제를 부정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으로 몰았다. 결국 1602년 이탁오는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감옥에서 이탁오는 죄인들의 머리를 깎던 사람의 칼을 빼앗아 목을 그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4 조선의 양명학 전래

만주족이 세운 청(淸)은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여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이민족 왕조에 반발하는 학자들을 탄압하였다. 정부로부터 억압받은 학자들은 고대의 경전이나 문헌을 고증하는 작업에 매진하였고, 청 조정은 이러한 학자들의 학풍을 장려함으로써 지식인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었다. 이처럼 청대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양명학의 입지는 이전보다 약해졌다. 그럼에도 양명학은 명맥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에서는 청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학자들에 의해 양명학이 활발히 연구되었다.

1521년 박상(朴祥, 1474~1530), 김세필(金世弼, 1473~1533),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전습록』을 논하였다는 것이 조선 양명학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이때는 왕수인이 생존해 있었던 때였던 만큼, 조선에도 양명학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크게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16세기에 이르면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로 대표되는 학자들을 통하여 성리학의 연구가 진일보하면서, 조선 사회에서는 성리학을 체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학자들은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또한 양명학은 불교와 같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중국에서는 1530년과 1548년에 각각 육구연과 왕수인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1600년에서 1601년에 걸쳐 조선 조정에서도 육구연과 왕수인의 문묘 배향 논의가 있었지만, 논의는 철회되었다. 이로써 조선에서 양명학은 ‘정도(正道)’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양명학의 논리가 성리학을 공부한 전문 유학자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여 통치해야 한다는 당시 조선 사회의 논리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서 양명학이 완전히 배척된 것도 아니었다. ‘주변부’에서는 양명학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는 기존의 이념에 대한 반발로서 양명학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허균(許筠, 1569~1618)은 양명학, 그중에서도 급진적인 성향의 양명학자인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허균 그 자신도 이탁오처럼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인욕에 따른 삶을 긍정하기도 했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역모죄로 몰려 처형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이후 조선의 양명학은 정제두(鄭齊斗, 1649~1739)를 통하여 체계를 갖추고 발전할 수 있었다. 정제두는 소론(少論) 박세채(朴世采, 1631~1695)와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인이었지만 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주희를 비판하고 양명학을 변호하였다. 훗날 노론(老論)에 의해 소론이 정계로부터 밀려나면서, 정제두 역시 강화도 하곡(霞谷, 오늘날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강학 활동을 펼치면서 ‘하곡’은 정제두를 대표하는 호(號)가 되었다. 그의 학풍은 후대로 이어져 ‘강화학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의 학문은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이긍익(李肯翊, 1736~1806) 등 소론계 인사들을 통해 주로 계승되었으며, 근현대에 이르면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이건승(李建昇, 1858~1924), 이건방(李建芳, 1861~1939) 등을 거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2~?)로 이어졌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인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도 양명학에 관심을 보였고 이들의 문집을 접하였다. 이들에 의해 수용된 양명학은 조선 후기 실학을 비롯하여 사상계와 문학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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