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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교체와 명의 수립

한족 왕조의 재건

미상

원명교체와 명의 수립 대표 이미지

지원(至元) 연간 발행된 교초(交鈔)인 지원통행보초(至元通行寶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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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란스러운 황실

13세기를 거치면서 몽골인들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의 국가를 세웠다. 이 거대한 ‘몽골제국’은 여러 ‘울루스(Ulus)’의 연합체로 이뤄졌다. 몽골제국의 역사는 칭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으로부터 시작된다. 칭기즈칸은 몽골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후 1234년, 몽골군은 중국 북부에 여진(女眞)이 세운 금(金, 1115~1234)을 멸망시켰고,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몽골제국 5대 카안(Qa’an) 쿠빌라이(Khubilai, 1215~1294, 재위 1260~1294)는 원(元, 1271~1368)의 초대 황제에 올라 1279년 중국 남부에 있었던 남송(南宋)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원은 이민족 왕조 중 하나이지만, 몽골의 역사에서 원은 몽골제국의 울루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원의 치세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였다. 14세기 중반, 원 황실에서는 황위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력(天曆)의 변’은 이러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권신 엘 테무르(El Temür, 1285~1335)는 무종(武宗) 카이샨(Qayšan, 1281~1311, 재위 1307~1311)의 아들 툭 테무르(Tuγ Temür, 1304~1332, 재위 1328~1329)와 함께 어린 황제 천순제(天順帝) 아라기박(Ragibaγ, 1320~1328, 재위 1328)을 대상으로 정변을 일으켜 성공하였다. 천순제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엘 테무르는 툭 테무르를 추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신 툭 테무르의 형 코실라(Qošila, 1300~1329, 재위 1329)가 황위에 올랐으니 이가 바로 명종(明宗)이다. 그러나 명종은 재위 1년이 되지 못하여 엘 테무르에게 독살당하였고, 툭 테무르가 다시 황위에 올랐으니 이가 문종(文宗)이다. 문종 역시 즉위한 지 얼마 후 병사하면서, 황위는 다시 명종의 어린 아들 영종(寧宗) 린친발(Rinčinbal, 1326~1332, 재위 1332)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린친발 역시 7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이복형 토곤 테무르(Toγon Temür)가 황위에 올랐으니 바로 혜종(惠宗, 1320~1370, 재위 1333~1370)이었다. 혜종은 어렸을 적에 엘 테무르의 사저에서 양육되었다.

혜종은 고려(高麗) 무신 기자오(奇子敖, 1266~1328)의 딸 기씨(奇氏, 1315~1369)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기씨는 원래 공녀로 입궁하여 토곤 테무르와 결혼하였고 이후에는 황후의 지위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훗날 기황후는 혜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Ayushiridara, 1339~1378, 재위 1370~1378)를 낳았고, 1353년 아유르시리다르가 황태자에 임명되면서 원 황실에서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에 힘입어 기황후의 친정인 기씨 가문도 고려의 정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68년 창강 하구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된 명(明)의 군대가 원의 수도 대도(大都, 오늘날 베이징)를 함락하면서 원의 황실은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정권을 유지하였으니, 이 왕조를 ‘북원(北元, 1368~1635)’이라 한다. 1370년 아유르시리다르는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

2 각종 재난과 경제 위기

각종 자연재해는 원말의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원말 중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대표적인 자연재해는 전염병이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중국에서 발생하여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당시 중국에서만 수천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흑사병으로 대량의 인구가 희생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농촌 사회는 황폐해졌으며, 이에 따라 중국의 경제 역시 붕괴되었다. 나아가 흑사병은 유럽에도 전파되어 중세 유럽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통화량의 팽창은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송(宋)에서 처음 발행된 ‘교자(交子)’는 세계 최초의 지폐로 평가되고 있다. 교자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는 화폐라기보다는 어음에 가까워, 정해진 기한 내에 통용되고 있었던 동전이나 철전(鐵錢)으로 교환해야 했다. 그러나 교자는 가볍고 유통이 쉽다는 장점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용 빈도가 높아졌다. 금(金)에서는 교자를 모방한 교초(交鈔)가 발행되어 이러한 어음류가 하나의 통화(通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초의 유통과 사용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교초의 발행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교초는 금속화폐에 비하여 제조가 매우 쉽고 거액의 화폐 가치도 보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남발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로 인해 금(金) 말기에 이르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때문에 교초의 남발이 금의 멸망을 앞당겼다고도 언급된다.

이러한 폐단이 있었음에도 원은 금의 교초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원은 교초를 화폐로 지정하고 금속화폐를 통용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또한 여러 종류의 교초를 새롭게 발행하여 교초의 남발과 남용을 막고 경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 후기로 갈수록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초를 빈번히 발행하였고, 그 결과 원말에 이르면 금(金) 말기와 같이 교초의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지폐 유통의 위험성으로 인하여 명 초기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 원대 이후 중국 왕조에서 지폐 사용은 금지되었다.

3 홍건군의 봉기

원말 각종 재난으로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유랑하였고, 중국 사회의 기층이 붕괴하기에 이르렀다. 몽골 지배층 사회도 황위 쟁탈과 정치적 혼란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원 조정의 지배력은 중국 곳곳에 미치지 못하였고, 지방에서는 원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무장 세력들이 독립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때 조직된 대표적인 무장 세력으로 홍건군(紅巾軍)이 있었다. 홍건군은 원래 백련교(白蓮敎)를 중심으로 조직된 종교 집단이었다. 백련교는 미륵불(彌勒佛)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는 교리가 핵심인 구세적인 종교였다. 이들 조직의 병사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에 ‘홍적(紅賊)’, ‘홍건군(紅巾軍)’, ‘홍건적(紅巾賊)’, ‘홍두적(紅頭賊)’ 등으로 지칭되었다.

1351년, 홍건군은 수장 한산동(韓山童, ?~1351)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산동은 허베이(河北)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백련교 수장이었다. 1351년, 원이 황허(黃河) 치수 공사에 요역 동원령을 내리자, 한산동은 이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한산동은 곧바로 체포되었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한산동의 부하였던 유복통(劉福通, 1321~1363)은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 1340~1366)를 황제로 옹립하여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림아는 소명왕(小明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송(宋)으로 정하였으며, 박(亳, 오늘날 안후이성安徽省 보저우亳州)을 수도로 삼았다.

홍건군은 옛 송(宋)의 수도였던 카이펑(開封)을 함락하였고 원의 상도(上都) 일대도 점령하는 등 한때는 중국 북부에서 세력을 떨치기도 했으나, 원의 토벌 작전으로 인하여 세력이 위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랴오둥(遼東) 일대로 밀려난 홍건군 세력은 물자 확보를 위하여 고려(高麗)를 침공하였다. 홍건군은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들은 한때 수도 개경(開京)을 함락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고려군에 의하여 격퇴되었다. 훗날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당시 고려의 무장으로서 홍건군 격퇴에 큰 활약을 펼쳤다. 고려는 홍건군의 격퇴에 성공하였지만 동시에 상당한 피해를 당하였다. 결과적으로 홍건군의 침공은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이후에는 한족 군벌들의 진압으로 홍건군 세력은 소멸하게 된다. 특히 1360년대에는 유복통과 한림아가 사망하면서 홍건군의 세력이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 유복통과 한림아의 사망에 관하여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1366년, 두 사람이 강을 건너다 풍랑을 만나 익사하였다는 설, 1363년, 군벌 장사성(張士誠, 1321~1367)이 여진(呂珍)을 안풍(安豐, 오늘날 안후이성 서우현壽縣)으로 파견하여 유복통을 살해하였고 주원장(朱元璋)이 여진의 군대를 격파하여 한림아를 데리고 진링(金陵, 오늘날의 난징)으로 데려갔다는 설 등이 있다. 후에 한림아는 추저우(滁州)에 안치되었다가 1366년 사고로 인해 물에 빠져 사망하였는데, 일각에서는 주원장의 계략에 의해 익사하였다고 전한다.

4 주원장의 등장과 명의 건국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안후이성 펑양현(鳳陽縣)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전염병과 기근 등으로 가족을 잃고 유랑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안후이성 일대에 거점을 마련한 홍건군의 장수 곽자흥(郭子興, ?~1355)의 수하가 되어 군공을 세우고 그의 양녀 마씨(馬氏)와 결혼함으로써, 주원장은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곽자흥 사후 그 세력을 이어받은 주원장은 창장강(長江) 유역 군벌 세력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원장은 저장(浙江) 등지에서 명망 높은 한인 학자들을 등용하였고, 이들로부터 유학과 제왕학을 접함으로써 서서히 제왕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당시 주원장 세력의 주변에는 장사성, 방국진(方國珍, 1319~1374), 진우량(陳友諒, 1316~1363) 등의 쟁쟁한 군벌들이 있었다. 주원장은 이들 세력과 경합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마침내 1368년, 주원장은 응천부(應天府, 오늘날 난징)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국호를 ‘명(明)’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해 주원장은 원의 수도인 대도로 진격하여 원 황실을 북쪽으로 쫓아냈다. 이로써 만리장성 이남 지역에는 다시 한족 왕조가 들어섰다.

몽골제국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확보하면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복잡한 육로와 해로 교통망을 구축하였고, 이를 통해 활발한 교류를 장려하였다. 그 구성원이었던 원의 정책 역시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경향을 띠었다고 평가된다. 반면 명의 지배층은 폐쇄적이고 한족 중심적인 정책을 수립하였다고 본다. 이는 전 왕조의 정책을 부정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새 왕조의 일반적인 특성이지만, 한편으로는 원말 혼란스러운 사회를 몸소 겪었던 주원장과 한인 지배층의 성향이 정책으로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원장은 유교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농업을 경제 생산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농본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민간의 상업 활동을 국가가 통제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주원장은 민간의 해외 교역을 억제하고,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 이외에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중국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허가받지 못한 선박들은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해금(海禁)이 실시되었다.

통상적으로 명의 국가 운영 방향은 원의 그것과는 정반대 성향을 보였다고 언급되지만, 일각에서는 원과 명의 동일한 속성에 주목하려는 시도도 있다. 기후상 원과 명 두 시기는 대체로 소빙하기에 속하였다는 점, 사회·문화·제도 등 여러 측면에서 원이 구축한 유산이 명으로 계승되었다는 점, 원대에 활발한 해외 교역과 이를 통해 축적된 부(富)가 명대에도 이어졌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이처럼 단절과 연속 두 가지 속성을 통해 원에서 명으로의 이행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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