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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이성계, 권력을 장악하다

1388년(우왕 14년)

1 개요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년)에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2 위화도회군의 대내적·대외적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동아시아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이후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의 무리들을 쫓아냈다. 또한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이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이 외교관계를 맺었다.

명과 고려의 관계는 처음에는 유화적이었으나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친명적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공민왕 사후 집권한 이인임(李仁任) 정권은 명과 사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원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고, 이는 명의 의심을 샀다. 또한 공민왕은 세 차례 군대를 보내어 북원이 지배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하였다. 아울러 요동 지방에 사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뻗어가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원말에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홍건적의 일파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며, 왜구는 고려의 연해지방을 거의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또한 권세가들은 남의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만들었고,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근(權近)은 당시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자연재해,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성장했다. 잦은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최영(崔瑩)이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였던 환조[이자춘](桓祖)의 아들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원으로부터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장군으로서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로서, 떠오르는 신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최영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등 명성이 드높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종신토록 지킬 만큼 청렴 강직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으로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고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개혁할 주체로서는 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대체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많았고, 새로운 사상으로서 원에서 건너온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우왕 대에 이인임 정권이 북원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파는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결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정도전(鄭道傳)은 이성계의 군영에 직접 찾아가 그를 만났으며, 이성계의 군대가 질서정연함을 보고 자신의 기대를 시로써 표명하기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년)에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최영이 재상인 문하시중, 이성계가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우왕은 사치에 빠져 있었고,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는 향후 정국의 방향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다. 최영은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시켰으나, 이성계는 주모자 이외에는 처형을 피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도전, 조준(趙浚)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연결된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신진사대부들의 등용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이인임 정권과 연결되어 있던 사대부들의 처우에 대한 이견을 낳았다. 또한 최영은 정권의 최고책임자였던 이인임에 대해서는 귀양을 보내는 비교적 약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정직한 최영이 사사로운 정을 두었다고 비판하였다.

요약하자면 고려는 요동 문제를 놓고 명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전란과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해 피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세력을 대표하는 최영과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는 향후의 국정방향을 놓고 미묘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3 요동정벌의 전개와 위화도회군

1388년(우왕 14년)에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철령위 설치 소식은 명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2월에 고려에 전해졌는데, 명은 이 칙서에서 고압적인 태도로 고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철령위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명에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위 설치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성을 수리하고 장수들을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등 명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정벌을 모의하였다. 3월에 명에서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우왕은 요동을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전국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스스로 서해도로 나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성계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반대론이 대체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밀어붙여 12일에는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鄭地), 상원수 지용기(池湧奇), 부원수 황보림(皇甫林),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지란(李之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傔軍)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5월 7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탈영병이 속출한데다가 장마로 인해 병장비가 손상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압록강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장마 등 현실적인 문제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고려군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위화도에 있던 원정군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5월 22일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달려와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고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전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로 건너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이다. 이성계는 회군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와 백성의 안위를 천명하고 무리한 원정을 시도함으로써 상황을 그르친 최영의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부터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애초부터 무모한 원정에 반대하여 몇 차례나 군대를 철수시켜 줄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더 이상의 원정이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든 결단을 내리도록 이성계를 몰아가고 있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도 회군을 재촉했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기회로 권력을 장악하자고 권하였다. 실제로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은 회군을 건의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기까지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성주(成州)에 있던 우왕은 원정군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서 사태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이성계를 막을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우왕을 따르는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영이 백관에게 무기를 들고 호위하도록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반면 이성계 측에는 요동 정벌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여진족들까지 참여하여 기세가 더욱 드높았다.

6월 1일에 개경에 도착한 원정군은 최영의 군사와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이때 최영의 군대는 분전하여 원정군의 선봉을 격파하였으나, 이성계의 본대가 공격해 오자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승리한 원정군은 최영을 사로잡아 고봉군으로 귀양 보내고, 이후 처형하였다. 또한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원정군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회군에 성공한 이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와 조민수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겨났다. 이성계 일파는 폐위한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그를 대신하여 종실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왕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윤소종, 조인옥 등 일부 신진사대부들 역시 이성계에게 왕씨를 다시 세우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반면 조민수는 이색(李穡)과 의논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의 뜻대로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 조민수, 이색 등의 구세력은 회군 이후에도 최영을 제거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주장하여 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를 유배시켜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다시금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세력이 구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위화도회군의 뒷수습이 끝나게 된다.

4 위화도회군의 결과

위화도회군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명과의 전쟁이 회피되었고, 이후 명에 대한 사대를 기반으로 하여 양국관계가 점차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전제개혁을 실시하여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 사회적 질서를 세워 나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즉 위화도회군은 조선 건국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신진사대부들이 여러 가지 개혁을 수행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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