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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박해[乙卯迫害]

조선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를 위해 순교하다

1795년(정조 19)

1 개요

을묘박해(乙卯迫害)는 1795년(정조19) 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입국하는 데 일조한 조선인 3인을 장형(杖刑)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1795년 이전까지 조선에는 정식 사제가 없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이 임시 성직자가 되어 여러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성직제도는 천주교 교리로 불법이었기 때문에 정식 사제를 입국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국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 당국에서는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붙잡기 위해 체포령을 발동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등 3인이 포도청에 붙잡혀 고문 끝에 사망하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주문모 신부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처형되기 전까지 조선에 천주교를 확산시킬 수 있었다.

2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보편교회로의 편입

조선 천주교는 정조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다른 나라와 달리 지식인들이 스스로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 공부하면서 그 교리를 깨우치며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이들은 천주교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종교적 차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1783년(정조7) 이승훈은 중국에 건너가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된 이승훈은 조선으로 귀국하여 이벽(李檗)과 정약용(丁若鏞), 권일신(權日身) 등에게도 차례로 세례를 내려주었다. 이승훈은 한양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고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최초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라는 사명감으로 성직자 역할을 했다.

천주교 교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성직자이다. 천주교 의식에서 중요한 미사나 성사, 세례 등은 성직자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유일한 신자인 이승훈이 성직자 역할을 대신하여 세례를 내려주고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자신 외에도 권일신과 최창현(崔昌顯), 유항검(柳恒儉), 이존창(李存昌) 등에게 성직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를 가성직제도라고 한다. 그러나 평신도가 성직자 역할을 하는 것은 천주교 교리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조선 천주교 모임에서도 성직자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조선의 사정 때문에 부득이하게 가성직제도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중국 천주교회에 문의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자였던 권일신은 북경에 사람을 보내 이 문제를 자문하기로 계획하였다. 북경에 보내기 위해 발탁된 사람은 윤유일(尹有一)이었다.

1789년(정조13) 윤유일은 조선 천주교회의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갔다. 윤유일은 이승훈에게 세례를 내려준 그라몽 신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라몽 신부는 이미 북경을 떠났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곳을 관리하던 로(Raux) 신부를 만나 조선의 밀서(密書)를 전했다. 이 밀서를 받은 로 신부는 매우 놀라워했다. 유교 사상에 심취해있는 조선에 천주교의 전파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중국 사제들에게 이들의 자발적 천주교 신봉은 매우 희망찬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로마 교황청에도 보고되었다.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조선인들의 자발적 천주교 신봉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장려할 만한 일이라고 했지만, 가성직제도는 매우 큰 문제가 있다고 답해 주었다. 윤유일은 북경 천주교회의 답서를 가지고 1790년(정조14)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고 즉각 성사와 세례를 중단하였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 위한 공식적인 외국인 사제의 영입을 결정하였다. 이번에도 윤유일이 중국에 파견되었다. 조선인들은 유럽인 사제를 원했으나, 선교사의 안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인 사제가 파견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처음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된 사제는 중국인 오요한 신부였는데, 이때는 입국이 좌절되었다.

중국인 사제를 기다리는 사이 조선에서는 17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고,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자행되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尹持忠)이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자 조정에서 사건을 조사해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에서 제사를 금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수의 양반층이 천주교를 떠나게 되었다. 조상 숭배나 제사 금지와 같은 문제는 양반층의 천주교 전파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초기 신자였던 이승훈과 정약용 등도 이 사건 이후 천주교회를 떠났다.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중인(中人)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천주교회는 중국에서 사제가 당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 사제가 입국하면 조선 천주교회의 위상이 고취될 것으로 믿었다.

천주교 사제의 입국을 주도한 것은 윤유일과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등 3인이었다. 1793년(정조 17) 윤유일은 중국에 사제 요청을 요구하는 서신을 작성하였고, 지황은 이 편지를 지니고 중국으로 잠입하였다. 최인길은 조선에 남아 선교사가 머물 집을 마련하고 이를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비용 마련은 홍필주(洪弼周)의 모친인 강완숙(姜完淑)이 전담하였다. 강완숙은 조선 천주교회 여회장으로, 신부의 입국 이후 그의 피신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1794년(정조 18) 2월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조선인과 외모가 비슷하여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전권을 가진 사목자(司牧者)로 임명되었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그는 20여 일 동안 도보로 압록강변에 도착하였으나, 감시의 삼엄함으로 입국하지 못했다. 입국 일자는 얼음이 어는 그 해 12월로 결정되었고 기다리는 동안 만주의 천주교회를 순회하였다.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는 지황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 입국할 수 있었다. 12월 3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밀입국하였으며 12월 14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최인길이 마련한 한양 계동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바로 주문모 신부의 첫 포교 거점이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에게 세례를 하였고 고해성사를 해주었으며, 부활절에는 조선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까지 집행하였다.

지금까지 사제가 없던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에서 1794년 12월을 기점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제도교회로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북경의 천주교회와 유럽 바티칸의 교황에게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동안 자생적인 학문으로 신앙을 해석하였다가 드디어 북경 주교로부터 권한을 받은 주문모 신부에 의해 보편교회의 방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3 한영익의 배신과 윤유일, 최인길, 지황 3인의 순교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국가의 공식적인 초빙에 의한 내방이 아니었다. 조선은 외국인 밀입국에 대해 매우 강경하게 대처하는 국가였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명백히 밀입국이었다. 조선은 천주교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천주교 사상이 유교의 충효 이념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사학(邪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 등의 도움으로 입국할 수는 있었으나, 언제나 조선 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조심해야 했다. 천주교인이라 하여도 주문모 신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입국한 이후 6개월은 무탈하게 지내면서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도 한영익(韓永益)의 배신으로 문제가 생겼다. 한영익의 배신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그는 평소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이석(李晳)과 정약용에게 조선에 밀입국한 주문모 신부의 존재와 거처를 알렸다. 이석은 재상이었던 체제공(蔡濟恭)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체제공은 곧바로 국왕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정조는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을 급히 파견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와 체제공이 천주교 세력을 급하게 체포한 것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남인이던 체제공과 국왕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남인 세력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것은 체제공과 정조에게 정치적 부담이었다. 특히, 1791년 발생한 신해박해 이후 노론 계열은 남인 정치세력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천주교를 앞세우곤 하였다. 따라서 정조는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알자마자 또다시 남인 세력의 탄압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급히 주문모 신부의 신병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포도대장이 포졸을 앞세워 최인길의 집을 급습하였으나 주문모 신부를 잡을 수는 없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의 집이 아니라 충청도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포도대장은 집에 있던 최인길을 주문모 신부로 오인하고 그를 압송해갔다. 역관 출신인 최인길이 능숙한 중국어를 사용하며 중국인 신부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다. 같은 시각에 윤유일과 지황도 포졸에게 붙잡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갔다. 이들은 조선에 있는 유일한 사제인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체포된 것이라고 한다.

포도청에 압송된 당일 세 사람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최인길을 주문모 신부로 오인했던 포도대장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주문모 신부의 위치를 알아내고자 했다. 고신의 강도는 점차 강해졌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완강하게 버텼고, 결국 주문모 신부의 위치를 실토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진 고문과 장형(杖刑) 끝에 이튿날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을묘박해(乙卯迫害)였다.

4 박해로 장살(杖殺)된 3인의 희생자

을묘박해로 희생된 3인의 인물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윤유일은 경기도 인근에 거주하던 양반 출신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제자이기도 하다. 권일신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배운 이후 매우 열성적으로 봉사하였다. 윤유일을 비롯한 그 집안사람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부친 윤장(尹鏘)과 숙부 윤현(尹鉉), 사촌 윤점혜 아가타, 윤운혜 루치아 등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당시에 순교한 독실한 신자였다. 윤유일은 여러 차례 중국을 오가며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최인길은 한양 역관 집안 출신으로 이벽과 친분 있던 인물이다. 그는 김범우 집에서 열린 신앙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1785년 형조 관원에게 천주교 모임이 적발되어 10여 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특히, 친족인 최창현은 조선 천주교회 총회장이었다.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를 대신하여 희생당했는데, 이후 주문모 신부가 6년 이상 조선에 머물며 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지황은 중인 역관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가 사람인 곽진우를 통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곽진우는 이승훈 집안의 청지기였다. 지황은 천주교를 열성적으로 믿고 따랐다. 윤유일이 북경에 신부를 초청한 편지를 배달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5 을묘박해의 결과와 영향

1795년(정조 19) 발생한 을묘박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선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조선 천주교회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편으로는 국내 정치세력의 개편에 영향을 미쳤다.

을묘박해는 천주교회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을 비롯한 3인의 희생으로 결국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한양과 전국 지방을 왕래하며 세례와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결과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이전까지 주문모 신부의 포교 활동은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조선에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생겨났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은 조선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노론과 남인의 정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을묘박해는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이 종결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후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권유가 상소문을 올리며 갑자기 정치적 공론의 쟁점이 되었다. 노론으로 대표되는 권유는 정조가 남인인 이가환(李家煥)과 체제공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된 수사도 없이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노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자 천주교도 사건을 이용해 남인 세력을 공격한 것이었다. 노론의 주장에 따라 천주교와 관련이 있었던 남인 세력인 이가환과 정약용, 이승훈 등이 처벌되었다. 이가환과 정약용은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이승훈은 천주교를 확산시킨 당사자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남인에 우호적이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소환되었다. 1801년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인 신유박해의 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은 그 죄의 근원을 1795년 을묘박해까지 소급해서 처벌되었다. 결국 순조 즉위 이후 천주교와 연결된 남인이 대거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 이후 노론 주도의 정국으로 변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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