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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

1467년(세조 13)

1 개요

1467년(세조 13년) 세조[조선](世祖)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란

2 반란의 배경 및 원인

함길도(함경도(咸鏡道)의 당시 지명)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고향으로서, 조선 왕실의 발상지였다. 태조는 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하였으며,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힘을 키웠다. 세종대에는 4군 6진 개척을 통해 두만강까지 강역을 확충하였으며,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함길도를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나 항상 북방 여진족과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를 방어하는 데는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치루어야 했고, 이는 함길도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함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 방어하고 왕실의 발상지를 우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본토 출신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세조가 등극한 후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하여 북쪽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중앙에서 남쪽 출신의 수령을 파견하자, 함길도의 호족들은 이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축성 등의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함길도의 민심은 크게 반발하였다. 실제로 이시애의 난 당시 토벌군에 참여했던 유자광(柳子光)은 반란이 크게 번진 까닭을 함길도에 파견된 수령들이 모두 무인이라 백성들을 혹사시켰기 때문이라고 파악하였다.

세조는 전국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여 호패법을 실시해서 주민의 이동을 단속하고 인구를 철저히 파악하였으며, 보법(保法)을 통해 더 많은 백성이 군역을 지도록 하였다. 보법과 호패법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함길도 지역은 지방토호세력이 강성하였고, 토호들은 자기의 수하들을 모두 자신의 호(戶)로 편입해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戶)를 기준으로 세금과 군역을 물릴 경우, 호 내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호에 대한 세금과 군역만 부담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호 내의 군정의 수를 모두 파악하여 군으로 징발하는 보법과 백성들에게 모두 호패를 차게 하는 호패법이 시행되면 종래와 같이 호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고, 이에 따라 부세와 군역의 부담이 매우 늘어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함길도 토호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상당한 부담의 증가를 의미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였다.

반란의 주역이 된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대대로 함길도에서 세력을 가진 호족이었다. 그의 조부 이원경은 원래 평안도 출신으로 요동에서 원을 섬기고 있었으나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가 동녕부를 정벌할 때 항복하여 조선 건국 이후 삭방도 첨절제사, 검교문하부사를 역임하며 함길도에 터전을 닦았다. 그는 원래 “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계가 우라산성을 공격할 때 3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한 이후 이름을 원경으로 고쳤다.

그의 아들 이인화 역시 판영흥대도호부사, 함길도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즉 이시애는 태조 이성계처럼 변방 출신으로 성장한 집안의 후손이자, 3대째 함길도에 세력을 가진 토호였던 것이다. 그 자신도 경흥진병마절도사,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바 있었다. 이시애에 대해 조정에서는 조부 때부터 관직을 세습하고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양민을 많이 거느리고 친척들이 지방에 뿌리를 내려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시애는 그 자신이 북방의 토호로서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피해를 보는 입장이었던 데다가, 함길도의 호족과 일반 백성들이 모두 중앙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이들을 선동하여 함길도의 험한 지세와 강력한 병력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야심을 갖게 되었다.

3 반란의 전개와 진압

이시애는 동생 이시합, 사위 이명효 등과 함께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군병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으며, 충청도 군선이 함길도에 와서 야인(여진족)들과 힘을 합쳐 함길도 백성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고,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들도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함길도에 들어올 것이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어서 1467년(세조 13년) 5월 10일 지방을 순찰하기 위해 길주에 와 있던 함길도병마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밤중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길주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길주목사 설정신(薛丁新), 길주판관 박순달(朴順達), 부령부사 김익수 등을 살해하였으며, 단천, 북청, 홍원으로 진격하면서 각지의 토호들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아울러 조정에는 강효문이 함길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기에 자신이 먼저 그를 죽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으며, 또한 강효문이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 조정의 대신들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여 반란에 대한 대응을 늦추려고 시도했다.

다른 한편으로 함길도민들에게는 자신의 반란이 세조의 뜻에 따라 강효문 등을 처단한 의거라고 선전하여 세력을 모았다. 초기 함길도민들은 이시애가 퍼뜨린 유언비어와 그의 설득에 넘어가 이시애가 충신이며, 그를 토벌하러 온 군대가 오히려 역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등이 반란과 관련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우선 이들을 구금하고, 구치관(具致寬) 등과 함께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즉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당시 27세였던 구성군 이준(龜城君 李浚)을 함길·강원·평안·황해의 4도병마도총사에,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부총사에 임명하고, 허종(許琮)을 함길도절제사로 삼았으며,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주어 함흥으로 출발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또한 함길도 각지에 효유문을 보내어 백성들이 반란에 가담하지 못하게 설득하는 동시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조정에서 보낸 효유문을 보면 반란 토벌에 공을 세우면 죄 있는 자는 죄를 용서해 주고, 천인은 양인으로 만들어 주며, 억지로 따른 자는 불문에 붙일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효유문에서는 이시애가 퍼뜨린 유언비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조목조목 비판하여 속아서 반란에 동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시애는 단천, 북청, 홍원에서 다시 남하하여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고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하여 순식간에 함흥 이북을 장악하였으며, 함길도관찰사 신면(申㴐)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당시 이시애의 반란에 함길도의 민심이 크게 호응하여, 이시애가 함흥 유향소에 문서를 보내 신면이 난을 일으킨 신하 신숙주의 아들이므로 죽여야 한다고 하자 토호와 백성들이 모두 일어나 신면을 죽였다.

이시애는 신면이 반란에 연루된 신숙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였다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함길도 출신으로 수령을 뽑아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반군의 기세가 매우 강하여, 초기에 구성군이 이끄는 토벌군은 철령을 넘어 진격하지 못하고 회양에 머물러 있을 정도였다.

구성군이 이끄는 관군은 회양에서 증원을 받아 준비를 완료하고 철령을 넘어 함길도로 진입, 안변을 거쳐 6월 10일에 함흥에 입성하였다. 이후 관군은 강순을 선봉으로 하고 어유소, 허종, 남이, 김교(金嶠), 이숙기(李叔琦) 등이 장수가 되어 길주를 향해 북상하여 선봉군이 북청에 주둔하였다. 반면 이시애는 관군이 북상하자 일단 후퇴하여 6진의 병력 및 야인들을 모아 군세를 재정비했다가 1만 6천의 군대를 이끌고 6월 24일 밤에 북청에 있는 토벌군의 선봉대를 기습하였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이시애의 반란군은 강순이 이끄는 관군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였고, 급습을 당해 계속 진격하기 어려워진 관군 역시 다시 홍원, 함흥으로 물러났다. 관군이 물러난 후 이시애의 반란군은 다시 북청을 점거하였다.

토벌군이 후퇴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세조는 친정을 고려하는 한편, 원군과 군수품을 보내어 토벌군을 증강하였다. 홍원, 함흥까지 물러난 관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보급을 받은 뒤 강순, 박중선(朴仲善) 및 남이가 이끄는 제1진, 허종·어유소 등이 이끄는 제2진, 도총사 구성군 이준이 직접 이끄는 제3진으로 나뉘어 북청을 향해 북진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이시애 역시 군세를 보강하여 자신은 6진의 군사를 이끌고 대문령을 넘고, 동생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군사를 통솔하여 마어령을 넘으며, 사위 이명효는 북청·갑산·삼수 등지의 군대를 이끌고 탕구령을 넘어서 관군을 포위하려고 했다.

7월 25일 토벌군의 제1진과 제2진은 각각 산개령·종개령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5천여 명을 이끌고 북청에서 북쪽으로 이성으로 통하는 험준한 만령에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렸다. 8월 4일, 관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만령을 4면에서 포위하여 만령의 주봉을 점령하고 이시애가 있는 중봉으로 육박하였다. 이시애는 중봉에서 2천여 명의 정예병으로 결사적으로 버텼으나, 어유소가 몰래 반란군의 뒤쪽으로 돌아가 이시애의 군대를 앞뒤에서 공격함으로써 반란군의 방어를 무너뜨렸다. 결국 이시애는 밤을 틈타 도주하였다. 만령에서의 패배로 이시애의 반란군은 크게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만령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은 기세를 몰아 이성을 점령하고 마운령(摩雲嶺)을 적의 저항 없이 넘어 북쪽으로 진격하였다. 이시애는 단천에서 관군을 막고자 하였으나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진데다가 병력이 크게 줄어 다시 단천을 버리고 길주로 도주하였다. 이어서 그는 재기를 노리고 6진의 병사들과 야인들을 규합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다가 8월 12일에 처조카이자 함경도 절제사 허종의 부하였던 허유례(許惟禮)에게 생포되어 동생 이시합과 함께 관군에 압송되었다. 구성군 이준은 이들을 문초한 이후 목을 베어 조정에 보내었고, 8월 18일에 한양에 이시애 형제의 목이 도착함으로써 반란은 종결되었다.

4 반란의 결과 및 영향

반란이 종결된 이후 세조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구성군 이준 등 45명을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책록하였다. 적개공신은 1등에서 5등까지 등급이 있었는데, 공신 선정이 반드시 공정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세조를 옹립하는 데 공헌하여 세조 즉위 이래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한명회 등 정난공신, 좌익공신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의 젊은 신진세력들이 정계에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들과 기존의 재상들과의 갈등은 이후 구성군사건(龜城君事件), 남이의 옥(南怡-獄)으로 표출되게 된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적개공신에 책록됨으로써 출세하였는데, 경주 양동마을(慶州良洞)의 입향조 손소(孫昭) 역시 이시애의 난 진압 때 공신이 되어 특진된 인물이다.

반란이 일어난 함길도에 대해서는 강온 양면의 처우가 이루어졌다. 즉 함길도의 민폐를 덜어주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함길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통치를 강화하였다. 또한 반란이 일어난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시켰다. 아울러 반란 도중 유향소를 중심으로 결집한 현지의 토호들이 이시애에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는 등 중앙의 통제에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향소를 철폐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성종대 김종직은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하면서 유향소가 이시애의 난 이후로 철폐되었다고 하였다.

즉 세조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일어난 반란이 결과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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