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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대표 이미지

감란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이인좌의 난’ 이전의 시대상황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각종 세금 부담과 지주층의 경제적 수탈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양역문제와 관련한 부담이 컸다. 당시 백성은 군역(軍役)을 부담하는 대신, 군포(軍布)를 납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노인, 어린아이,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군포를 부담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들은 도적단이 되어 관아와 지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도적단은 전라도 정읍에서 100여 명이 창과 포를 들고 다니고, 우두머리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적지 않은 규모와 지휘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반 확대를 위해 상인, 승려, 유랑민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영덕(盈德)에서는 향리와 수령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에서는 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중앙의 정치상황도 불안하였다. 노론(老論)은 ‘정유독대’를 계기로 동궁(경종[조선](景宗))을 즉위시킨 다음, 연잉군(영조(英祖))을 세제로 책봉하는 당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노론이 동궁을 폐한다는 의혹을 진정시키면서, “효종(孝宗)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은 주상과 연잉군에게만 있다”는 왕대비의 언문 수교를 이용하여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노론 측의 움직임에 대해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이 이미 은퇴하였고,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은 노론으로 옮기는 등 세력이 약해진 소론(少論)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남인(南人) 역시 경신환국(庚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신사옥사(辛巳獄事)를 거치면서 세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이러자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였다. 그러나 소론계와 남인의 강한 반대가 있고, 노론의 권상유(權尙游), 박치원(朴致遠) 등 일부세력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노론은 1721년(경종 1)에서 1722년(경종 2)에 걸친 신임옥사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1724년(경종 4)에 죽고,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영조는 즉위 직후에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귀양을 가 있던 민진원(閔鎭遠)을 소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방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일경(金一鏡), 유봉휘(柳鳳輝), 최석항(崔錫恒) 등을 비난하는 상소가 잇달았다. 이를 계기로 영조는 김일경을 유배보내고, 신임옥사를 일으킨 목호룡(睦虎龍)을 처벌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노론계인 민진원, 정호(鄭澔), 이관명(李觀命)을 재상에 임명하였으며, 신임옥사는 무옥(誣獄)이라고 판정하여 피해자를 신원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노론이 중앙정치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 소론의 불만 증가와 반란 계획 준비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해졌다. 게다가 영조가 노론계 인물을 중용함에 따라 소론은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1725년(영조 1) 김일경이 제거되자 마침내 소론의 일부 세력은 무신당을 결성하였다. 무신당은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등이 주도하였고, 이들은 남인계 인물인 한세홍(韓世弘)과 이인좌(李麟佐) 등을 포섭하였다. 이들은 노론과 영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노론을 제거해야만 비로소 정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무신당은 영조의 왕위계승의 부당함을 선전하였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외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면, 경중에서 내응’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같은 무신당의 전략은 당시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인좌(李麟佐)와 정세윤(鄭世胤)의 역할에 기대한 것이다. 이인좌는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 당시 관직 진출이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박필현(朴弼顯) 등과 반란을 계획하였고, 안성의 이호, 과천의 이일좌(李日佐), 거창의 정희량(鄭希亮), 충주의 민원보(閔元普)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남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영남의 유명 사족과도 접촉하였다. 이로써 이인좌는 경기, 호서, 영남 세력의 중개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세윤은 1724년(영조 즉위년)에 600~700여명의 유민을 기반으로 녹림당을 결성하여 나주의 나숭대(羅崇大)와도 결탁하였다. 무신당은 녹림당을 주력부대로 삼을 계획이었고, 이의 지휘권을 이인좌에게 맡겼다.

그러나 무신당의 반란계획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단행되어 노론정권이 퇴진하면서 차질이 발생하였다. 영조와 노론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성향을 가진 무신당은 영조가 소론과 남인의 일부세력을 등용함에 따라 내부적인 분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박필현, 한세홍, 이유익 등 중앙에서 추진한 반란계획은 일시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중앙에서 반란 계획이 유보된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이인좌와 정세윤을 중심으로 반란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인좌는 영남사족의 반노론(反老論) 성향이 강하니, 반란을 계획하면 영남사족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안동과 상주는 정홍수(鄭弘壽)에게, 거창과 안음은 정희량에게 반란 준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경기지역을 담당하였다. 한편 이호와 정세윤은 호남에서 반란을 준비하였다. 이호는 나만치(羅晩致)를 통해 나주의 나숭대를 만나, 태인현감 박필현과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이 반란을 준비 중이니, 합세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세윤은 부안의 성득하(成得夏)와 김수종(金守宗)을 만나 반란에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고, 조총 수백 정을 은밀히 마련하여 녹림당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에서 반란준비가 진행되자, 중앙에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의 지도층은 당시 평안병사로 나가있던 이사성과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고, 태인에 있던 박필현도 무신당의 일원인 담양부사 심유현(沈維賢), 무장에 유배와 있던 박필몽(朴弼夢) 등과 반란을 준비하였다. 특히 박필현과 심유현은 관군을 훈련시키고, 담양에서 화약을 훔쳐 한양으로 운반하여 반란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한편 박필현은 고부의 송하(宋賀), 부안의 김수종(金守宗), 순창의 양익태(梁益泰) 등 지역유지와 결탁하여, 전주와 남원의 시장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괘서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안, 고부, 순창 등의 지역유지와 녹림당이 박필현 등과 결탁하면서, 이들의 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방의 반란 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자, 중앙의 지도층도 군대와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집안의 노비 등을 동원하거나 돈을 지급하고 고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군의 별장을 지내고 있던 이사주(李思周)가 관군을 동원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중앙에서 반란군을 모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괘서를 뿌리고 암살단을 결성하였으며, 평안병사 이사성에게 군사를 요청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3 ‘이인좌의 난’의 전개양상

중앙과 지방에서 반란 준비가 진행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중앙은 4월에 반란을 계획 중이었으나, 지방에서는 3월 초순부터 이인좌, 정세윤 등이 경기도 양성, 진위 등에서 군사를 모아 집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신당은 중앙과 지방 간에 거사시기에 일정한 차이를 두고 반란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순에 안성, 평택, 양성, 괴산의 집결지에서 양반과 기병 50여 명을 포함한 약 300여 명의 군사가 모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모인 반군은 병기가 부족하여 전력이 보잘 것 없었다. 그러다가 소사평으로 이동하여 군기와 말을 보충하고 전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반군은 가천역에서 말을 탈취하기도 하였고, 각처의 부민(富民)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수물자와 군량 확보, 군사 모집을 위해 반군은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전라병사 조경[후기](趙儆) 등이 반군에 동참한다는 정치선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선전이 큰 효과가 있어, 반군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어 확산되었고, 경기도 남부와 호서 일부지역에 행정과 치안이 마비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사에 있던 반군이 청주(淸州)성을 점령하면서 반군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청주의 군관과 향임층이 반군에 가담하였고, 반군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에 반군의 세력은 황간, 회인, 목천, 진천 등지로 확대되었다. 반군은 이들 지역에 수령을 파견하였고, 환곡을 나누어 주고 군사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200~300명으로 시작한 청주성 점령은 각처, 각층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한편, 경기도와 호서의 반군이 청주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영남과 호남세력이 동조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영남과 호남에서의 동조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3월 12일 안동에 도착한 이웅보(李熊輔) 등은 이인좌의 지시에 따라 거사를 시도하였지만, 지역민의 비협조로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자 이웅보는 안음, 거창으로 이동하여 병사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지만, 이 지역의 반군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전라도 역시 태인현감 박필현이 인근의 지역유지와 거병을 하기로 하였지만, 고부 토호 송하는 괘서 살포에는 동참하였지만 군사 동원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박필현이 관군을 동원하여 전주의 감영군과 합세하여 청주로 진격하는 계획 역시 사전에 탄로되었다. 또한 무장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은 30여 명의 군사로 전주에 입성하고자 하였으나, 태인에서의 군사 동원이 실패하자 해산하였다. 결국 거사 이전의 계획과 준비대로 호남에서의 군사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호남과 영남의 반군 동원이 수월치 않자, 평안병사 이사성도 사전의 약속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과 지방이 연계한다는 무신당의 반란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청주성의 반군은 도성으로 곧바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정부는 반군이 양성, 소사 등지에서 집결하던 중에 최규서(崔奎瑞)가 보고를 올림에 따라 중앙과 지방의 반군이 연결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먼저 성문의 방어를 강화시켰고,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여러 진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반란 동조세력인 윤휴(尹鑴), 이의징(李義徵) 등의 자손 중에서 한양 거주자와, 김일경과 목호룡 등의 가족을 체포하였다. 또한 반란으로 인한 쌀값 폭등과 이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한강 인근에 보관한 세곡을 성안으로 운반시켰다.

한양 도성의 안전을 확보한 이후, 정부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대장으로 하여 반군 진압을 시작하였다. 관군은 3월 24일 반군의 주력부대와 안성·죽산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안성·죽산전투에서 관군은 반군을 제압하였고, 이인좌, 권서봉(權瑞鳳), 목함경(睦涵敬) 등 반군의 지도자를 생포하였다. 주력 부대가 관군에게 패배하고, 지도자까지 생포된 상황에서 반군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게다가 반군을 소탕하는 민병대가 결성되어 반군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추풍령(秋風嶺)을 넘었을 때 이미 영남의 반군은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에 개선하였고, 영조는 숭례문에 나가 오명항을 친히 영접하였다.

4 ‘이인좌의 난’의 영향

한 때 청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를 과시했던 반군의 반정계획은 안성·죽산전투 패배로 실패로 돌아갔다. 주도층간의 갈등, 정미환국을 통한 중앙지도층의 반란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통일된 준비체계의 부재 등으로 인해 ‘이인좌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이인좌의 난’은 정국 방향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소론 세력은 반란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노론 역시 반란을 유발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만은 아니었다. 반면에 붕당간의 반목과 갈등을 비판한 탕평파가 집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탕평파는 노론의 온건파인 홍치중(洪致中), 김흥경(金興慶)의 협조를 얻어, 노론·소론의 온건파와 함께 정국을 운영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로써 노론과 소론 온건파에 의한 탕평정권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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