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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약조

왜인에게 삼포왜란으로 단절된 교류의 길을 열어주다

1512년(중종 7)

1 개요

임신약조는 1510년(중종 5) 발발한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일본과 통교를 단절하였다가 이를 재개하면서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약조이다.

2 삼포왜란의 발발 배경

대마도주 가문인 소오씨(宗氏)는 본래 다자이후(大宰府) 관인(官人)으로 규슈지역에 번성했던 고레무네씨(惟宗氏) 계통이다.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4대 도주 소오 모리쿠니(宗盛國)가 규슈 3대 명가인 쇼니씨(少二氏)의 슈고다이(守護代)가 되어 무로마치막부로부터 대마도의 지배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6대 소오 요리시게(宗賴茂) 때인 1378년 지토우다이(地頭代)에서 슈고(守護)로 승격하면서 명실공히 대마도의 지배자가 되었다.

대마도에 정착한 것은 15세기 초반 7대 도주 소오 사다시케(宗貞茂) 때부터이며 8대 도주 소오 사다모리(宗貞盛)대에 이르면 히젠슈(肥前州)의 가신들도 대마도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에서 왜구를 종식시키기 위해 1419년(세종 1)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 함.) 즉 대마도 정벌을 결행하여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1438년(세종 20) 문인제(文引制)가 합의되고, 1443년(세종 25)에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통해 세견선(歲遣船) 등 무역에 관해 규정함으로써 대마도(주)를 중심으로 일본측과 교류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오씨(宗氏)가 규슈의 주도권을 두고 오우치씨(大內氏)와 쇼니씨(少二氏)가 벌인 전쟁에 말려들면서 대마도의 상황은 불안정하였다. 쇼니씨와 연합한 소오씨 가문은 1497년 10대 도주인 소오 사다쿠니(宗貞國)가 오우치씨를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규슈의 영지를 회복하기도 했지만, 1506년 기타큐슈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쇼니씨가 멸망하고 소오씨도 결국 규슈의 20만 석 영지를 상실하고 만다.

소오씨는 규슈와 단절되면서 대마도 안으로 갇힌 형국이 되었고, 대마도가 만성적 식량부족인 상황에서 조선과의 무역 확대가 절박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항거왜인(恒居倭人), 사송왜인(使送倭人), 흥리왜인(興利倭人) 등으로 구분하여 왜인들과 통교함으로써 그들이 왜구가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통교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해졌고, 이와 함께 변방을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빈발하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3 삼포왜란의 발생

삼포왜란은 1510년(중종 5) 4월 4일 제포(薺浦)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과 대마도 대관(代官) 소오 모리치카(宗盛親)가 중심이 되어 대마도주의 전격적인 지원 아래 무장한 왜인 4~5천명을 거느리고, 웅천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난을 일으킨 왜인 측이 대마도주가 병선 수백 척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서 대마도주와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고, 갑주(甲胄)를 입고 궁전(弓箭)·창검(槍劍)·방패(防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나 난에 참가한 왜인의 숫자가 엄청났다는 점에서 우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포의 관리들이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부산포(釜山浦), 염포(鹽浦)의 항거왜인들도 합세하였다. 그들은 부산첨사(釜山僉使) 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한 뒤 각 포소의 선박을 모두 불태우고 철수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金世鈞)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여 삼포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대마도주 소우 모리노부(宗盛順)는 이후 요구조건을 내걸고 화호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정부에서는 곧 5천여 명의 진압군을 보내어 대응하였다. 그 결과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조선측은 군민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796호가 불탔으며, 왜인들은 배가 5척이 격침되고 295명이 참획되었다. 참획된 왜인들의 수급은 높고 큰 무덤으로 만들어 뒤에 오는 왜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가지도록 하였다. 왜란 종식 후 피살된 사람은 여제(厲祭)의 예에 의하여 제사를 내려 위로하고, 가옥이 소실된 자에게도 진휼을 가하였다. 군공에 대해서는 황형 등 188명은 1등으로, 현감 백사반(白斯班) 등 326명은 2등으로, 갑사(甲士) 권영생(權永生) 등 359명은 3등으로, 모두 873명에 대해 공에 따라 상을 내렸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겼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고, 국교를 다시 열 때까지 지속되었다.

4 일본의 강화요구

삼포왜란 후 조정에서는 바로 삼포를 폐쇄하며 일본과 통교를 단절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으로 곤란에 빠진 대마도주가 막부(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였으며, 일본에서는 국왕사(國王使)로 승려인 호추(弸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일본 측의 강화 요구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며, 특히 적에게 얕보일 위험 가능성 때문에 강화를 반대하거나 시기와 조건을 조율해야 한다는 입장이 많았다. 결국 북방의 야인 문제까지 겹쳐 있는 상황에서 변방의 긴장 요인을 더할 수 없다는 점, 지리상 일본과 절교하기가 힘들며, 대마도의 경제적 형편상 교역을 막을 경우 필연적으로 왜구가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등의 이유로 강화를 결정하였다.

조선은 강화 교섭 조건으로, 첫째 삼포왜란의 수괴자를 참수해 헌납할 것, 둘째 우리측 포로를 송환할 것, 셋째 소오 모리치카(宗盛親)가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제시하였으나, 마지막 조건은 조선에서도 실제 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이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이 충족되면서 특히 호추가 1512년(중종 7) 윤5월에 삼포왜란 주모자를 참수하여 바치면서,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다.

5 임신약조의 성립

임신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왜인의 삼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삼포 중 제포만 개항한다.
2)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3) 대마도주에게 내리던 종전의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을 반감해 100석으로 한다.
4) 대마도주가 보낼 수 있었던 특송선제(特送船制)를 폐지한다.
5) 대마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의 수직인(受職人) 및 수도서인(受圖書人)들의 세사미와 세견선을 폐지한다.
6) 대마도주가 보낸 선박 이외의 배가 가덕도(加德島) 부근에 와서 정박하면 적선(賊船)으로 간주한다.
7) 일본 혼슈(本州)의 수직인 및 수도서인은 통교기간과 공로를 참작하여 그 수를 가감하고, 통교가 허용된 자의 도서(圖書)를 고쳐서 발급한다.
8) 대마도에서 제포에 이르는 직선 항로 외의 항해자는 적왜(敵倭)로 규정한다.
9) 상경 왜인(上京倭人)은 국왕 사신 외에는 도검(刀劍) 소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5척을 증치하여 30척까지 허용하였지만, 이 조약은 전체적으로 세종대 계해약조 체제에 비하여 대폭적인 제한을 가한 것으로서, 조선 조정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왜인 접대 비용이 경감되고, 왜인들이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은 감소되었다. 결국 교역의 확대를 요구하는 일본측의 입장과 이를 통제하려는 조선의 입장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상존하게 되었으며, 이후 사량진왜변, 을묘왜변 등의 왜변이 간헐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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