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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丁酉再亂]

일본의 재침, 조선의 피해는 극심했다

1597(선조 30) ~ 1598(선조 31)

정유재란 대표 이미지

해남 명량대첩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정유재란은 1597년(선조 30)에 일본이 재침략하면서 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1592∼1598)에 정유재란(1597∼1598)을 포함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명칭 자체는 정유년(1597, 선조 30)에 발생한 일본의 재침략을 일컬을 뿐 아니라 전쟁의 성격도 다르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 요구에 의해 전쟁이 발생함으로써 북진을 위한 전투들이 발생하였다. 그에 비해 정유재란 때 일본은 조선 영토 장악에 주력하며 가혹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나마 조선은 나름 전력을 보강한 상태에서 정유재란에 임하였고, 명량해전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하였다. 정유재란은 1598년(선조 31)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종식되었다.

2 임진왜란 강화 교섭의 불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생 초기 일본 육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일본은 전국(戰國, 센코쿠) 시대의 치열한 전투 경험과 신무기 조총의 강력한 위력을 발판으로 한반도 북쪽으로 진격하였던 반면, 조선은 오랜 평화를 누리며 전쟁에 대한 대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순신(李舜臣)을 필두로 하는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일본의 수륙병진(水陸竝進) 계획에 차질을 주었다. 또한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필사적으로 방어하였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한 조선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였지만, 7월에 조승훈(祖承訓) 등이 이끄는 명 군대는 평양성을 공격하다 참패하였다.

8월에는 심유경(沈惟敬)이 와서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휴전을 합의하기도 했다. 이어 송응창(宋應昌), 이여송(李如松) 등이 연이어 오며 명군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은 평양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2월 벽제관전투에서는 역습을 당해 참패하였다. 한편, 일본은 벽제관전투의 승전에 힘입어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공격하였지만, 이때 조선 관민은 권율(權慄)의 지휘 하에 큰 승리를 이끌어냈다.

명은 벽제관전투의 패배로 인해 강화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을 추진하였다. 조선을 배제한 채 명과 일본이 협상에 나섰는데, 양국의 강화 조건은 매우 달랐다. 일례로 명에서는 “일본군이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해 주겠다.”고 한 반면, 일본에서는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에게 하가(下嫁)하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결국 강화 협상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조선은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이 결렬될 것으로 예상하였고, 여러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고, 병력을 정비하였으며, 명에 원군을 다시 요청하였다. 반면, 일본은 동래·부산 등지에 교두보를 다시 구축하며 전쟁의 재개를 준비하였다.

3 1597년, 일본의 재침

1597년(선조 30) 일본은 14만여 군사들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 명에서는 총독 형개(邢玠),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楊鎬), 제독 마귀(麻貴)를 주축으로 원병을 보냈다. 그리고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권율을 중심으로 군대를 정비하였다.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은 경상도로 들어와 칠천량(漆川梁), 황석산성(黃石山城) 등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조선 수군은 해임된 이순신 대신 원균(元均)의 지휘를 받고 있었고, 7월에 원균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일본 수군에 맞섰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서생포(西生浦)에서 패전하였고, 칠천량에서는 수륙에서 양면 공격을 받아 크게 패했다. 이로써 일본은 남해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8월 16일에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일본군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함양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산성 내 관민은 결사 항전했지만, 3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일본은 전라도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각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며 북상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의 출격 요청을 받은 명 장수 양호 등은 직산(稷山, 천안) 방면으로 내려가 일본을 대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후퇴하여 순천, 사천, 울산 등에 집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9월에 명량(鳴梁) 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에 참패를 당하였다.

4 명량해전의 승리

칠천량해전의 패배를 접하고 나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재기용하였다. 그 후 이순신은 장졸과 무기들을 확보하는 데 부심했다. 칠천량해전에서 패배 후 남은 전선이 겨우 10척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전력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약한 수군으로 적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하여 육지에서 싸우라고 명하였지만, 이순신이 답서를 올려 결사 항전의 의지를 내보였다.

이때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고자 했고,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길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전라도 진도의 동쪽 해안가에 있던 나루터)으로 이동하였다. 벽파진에서 일본 수군의 기습 공격에 맞서다가 9월 15일에는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옮겼고, 이튿날 16일에 일본의 133척 전함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명량(울돌목)의 지형조건과 조류를 활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조선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이후 조선 수군은 전력을 회복해 나갔고, 전세는 조선-명 연합군에게 보다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선조 31)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그 이전에도 확인되지 않은 사망설이 조선에 유포되고 있었지만, 일본은 도요토미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조선의 일본군 철군을 명하였다. 철군 명령이 조선 내 일본군에 언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그 무렵 조명 연합군은 ‘4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 즉 수륙 4개 노선을 통해 울산, 사천, 순천 등에 웅거하던 일본군을 동시에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전라도 순천의 왜교성(倭橋城, 정유재란 직후 일본에 의해 축조된 왜성)에서 조선, 명, 일본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과 명의 육군과 수군이 순천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의 군대를 공격하였던 것인데, 매우 큰 규모의 전투가 행해졌음에도 명 장수 유정(劉綎)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6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죽음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교성 전투가 끝난 후 10월 무렵에는 철군 명령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후 고니시의 군대는 철군을 모색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1598년(선조 31) 11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명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일본군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퇴로가 여의치 않았던 고니시는 시마즈 야스히로(島津義弘)의 수군에 도움을 청했다.

11월 19일 새벽, 시마즈 야스히로가 이끄는 500여 척의 군대가 노량에 진입했을 때 그에 맞선 이순신의 군대는 200여 척에 불과하였다. 약 4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일본은 전선 350여 척이 파손되며 패색이 짙어졌고, 결국 남은 전선들을 이끌고 도주하였다. 그리고 퇴각하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이후 조선 군사들은 도망가는 전선 100여 척을 나포했던 한편, 왜교성에 갇혔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퇴각하였다.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7 가혹했던 인명 피해와 귀무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해 전력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무력으로 한반도 남부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점령한 지역에 가혹한 살육, 약탈, 방화를 자행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점령 지역이 확대되면서 회유책으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재란 초기 인명 피해는 극심하였다. 임진왜란에 이어 사망·부상 등의 인명 피해가 극에 달했고, 기근·전염병 문제도 심각했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도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에게 “해마다 군사를 보내 그 나라(조선) 사람을 모두 죽여 빈 땅을 만든 후에 일본 사이도오(西道) 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귀는 두 개이니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재침 이후로 사람만 보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후 수십 년 동안 조선에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등을 비롯한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본 교토(京都)에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들이 조선 백성의 귀와 코를 잘라서 가지고 가면, 도요토미는 그들의 전공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조선인의 코와 귀를 귀무덤에 묻고 그 영혼에 대한 공양 의례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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