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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과 홍이포

화약무기의 시대를 열다

미상

조총과 홍이포 대표 이미지

홍이포 복원품

실학박물관

1 개요

조총과 홍이포는 16~17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유럽 세력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전래된 화약무기이다. 조총은 화승식(火繩式) 점화법의 개인 휴대화기로 날아가는 새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명중률이 좋다고 하여 조총이라 불렸다. 홍이포는 명(明)에서 서양의 컬버린 포를 바탕으로 모방하여 제작한 중국식 대포이다. 당시 명에서는 네덜란드인을 붉은 털의 오랑캐라는 뜻의 홍모이(紅毛夷)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으면서 조총과 홍이포 등의 새로운 화약무기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화약무기의 전래는 16~17세기 세계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이다.

2 동아시아 바다의 무역

‘대항해시대’로 잘 알려진 15·16세기 유럽인들의 팽창은 향신료의 유통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향신료는 아랍 상인들로부터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로 전해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453년(단종 1)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육로를 통한 향신료 교역로를 독점하여 많은 세금을 부여하였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바다를 통한 새로운 향신료 무역로 개척에는 포르투갈이 선두에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1510년(중종 5) 인도 고아를 점령하고 향료 무역의 중심지였던 말라카를 장악하게 된다. 1513년(중종 8)에는 광동 둔문(屯門)에서 명과 처음 접촉하였다. 1520년(중종 15) 둔문을 점령한 후 명과 비공식적으로 정기적인 무역을 진행하였고, 1557년(명종 12)에는 마카오[澳門]의 실질적 거주권을 획득하면서 공식적으로 명과 교역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유럽-인도-동남아시아-마카오-일본’의 방대한 국제 무역체계가 형성되었다.

당시 무역의 매개가 되었던 것은 은이었다. 15세기 중반 이후 명에서는 조세의 은납화가 진행되면서 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유럽에는 멕시코·페루 지역의 은광에서 생산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일본에서는 은 제련 기술인 회취법(灰吹法)을 도입하면서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당시 멕시코와 일본의 은광은 전 세계 은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을 통해 전해진 멕시코의 은과 일본의 은으로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 생사, 도자기, 차 등을 구매하였고, 이는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대항해시대의 무역은 현대와 같이 평화로운 형태로 이뤄지지만은 않았다. 교역이 무사히 진행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상인과 도적의 두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 당시 국제교역의 민낯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해역의 무역 체계를 통해 무기 교역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고, 이때 가장 주목받은 것은 조총, 홍이포와 같은 화약 무기였다.

3 임진왜란과 조총의 조선 전래

조총은 전장식(총구쪽으로 총알을 장전하는 방식) 화승점화법의 개인 휴대 화기를 지칭한다. 조총을 동아시아로 처음 가져온 것은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명 가정제 즉위 이후 1520년 이래 둔문을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 상인들을 소탕하기 위한 둔문 전투와 천초만(茜草灣) 전투에서 명이 승리하면서 포르투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조총과 서양식 화포인 불랑기(佛狼機)를 노획하였다. 당시 조총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반면, 기존의 전장식 화포에 비해 연사속도가 빨랐던 불랑기의 효용성은 높이 평가되었다. 불랑기는 발사체인 모포(母砲)와 모포에 삽입하여 발사하는 장전된 포탄틀인 자포(子砲)로 구성되는데, 미리 여러 개의 자포를 준비하여 재장전 시간을 단축하고 연속해 발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이 조총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1548년(명종 3) 밀무역의 중심지였던 쌍서도(雙嶼島)를 공격하면서 일본에 의해 개량된 조총을 노획하면서였다. 이후로 날아가는 새를 맞출 수 있는 총이라는 의미로 조총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명이 노획한 조총은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1543년(중종 38) 규슈(九州) 다네가시마(種子島)를 통해 전해진 것을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개량한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 1589년(선조 22)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된 대마도의 소 요시토시(宗義智)에 의해서 조총이 처음 전래되었다. 조선 역시 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조총의 전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경과하면서 점차 조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선조는 “일본군의 장기는 조총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총을 도입하고자 하여,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투 중에 노획한 조총을 활용하다가 조총 제작 기술이 있는 일본인 포로인 항왜(降倭)를 통해 제작기술을 습득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593년(선조 26) 중반에는 자체적인 조총 제작도 가능해졌다.

조총을 제작하는 일과 함께 중요한 것은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운용하는 전술과 훈련법을 익히는 일이었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할 때, 명군은 불랑기 등의 화포와 조총, 창검으로 무장한 군사들을 활용하여 효과적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조총의 사용법과 이를 활용하는 전술을 명군으로부터 습득하고자 하였고, 그해 10월 훈련도감을 조직하여 우선 조총을 다루는 포수(砲手)를 집중 양성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근접전 전문 군사인 살수(殺手)와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수(射手)가 추가되면서 이른바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갖출 수 있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조총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이 도입되었고, 이는 단순한 전술 변화 뿐 아니라 군사제도 전반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훈련도감의 군병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군 역시 새로운 편제를 적용한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정비되었다. 당시 훈련도감의 삼수병 중 포수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달하였으며, 지방군의 경우 1596년 평안도의 속오군 편제에 따르면 포수가 30% 수준이었다. 조총을 중심으로 한 전술체계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되어, 인조 후반 전국의 포수 비율은 40%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빠르게 조총 위주로 편제를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조총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활과 비교하여 훨씬 짧은 기간에 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총은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길다는 것과 비가 오면 점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부싯돌을 이용한 점화장치를 장착한 수석식(燧石式) 조총을 도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631년(인조 9) 명에 파견되었던 정두원(鄭斗源)이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를 통해 수석식 조총을 처음 소개하였으나, 당시에는 제작되지 못하였다. 그 후 1654년(효종 5) 흑룡강 지역으로의 1차 파병(나선정벌) 때 수석식 조총을 몇 정 노획하였고, 1658년(효종 9) 2차 파병 때는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는 수석식 조총의 사용법과 원리를 습득하였다. 하지만 이미 화승식 조총이 널리 보급된 상황에서 수석식 조총이 일반적으로 보급되진 못하였다. 다만 17세기에 이르면 총신의 길이를 연장시켜 사거리를 늘린 대조총(大鳥銃), 천보총(千步銃) 등이 제작되었다.

4 국제 무기교역의 성과, 홍이포와 남만대포

서양식 대포가 명에 전래된 것은 천초만 전투에서 불랑기를 노획하면서부터이다. 명은 천초만 전투 직후 곧바로 대포 개발에 들어갔고, 1530년(중종 25) 남경에서 불랑기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1557년 포르투갈인의 대포주조공장이 마카오에 설립됨에 따라 기술을 교류하며 발전시키게 된다. 1620년(광해군 12)에 이르면 마카오의 공장에서는 동포(銅砲)뿐 아니라 철포(鐵砲)를 주조하였는데, 동포는 포르투갈인, 철포는 명의 주철 장인이 제작하였다. 또 제작에 필요한 철과 화약은 중국에서 공급하고, 동은 일본에서 수입하였다.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국제 무역체계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성과였다.

17세기 후금의 성장으로 북방지역의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고, 결정적으로 1619년(광해군 11)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명은 서양식 화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르후 전투 직후 서양의 신식 화포를 구입하고 화포교사를 초빙하여 교습하였는데, 이때 구매한 화포가 바로 홍이포였다. 홍이포는 북방지역 방어를 위해 1622년(광해군 14) 영원성(寧遠城)에 배치되었고, 명장 원숭환(袁崇煥)은 1626년(인조 4) 누르하치의 공격을 우월한 화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홍이포에 의한 부상으로 그해 8월에 사망하였다. 이후 명은 자체적인 기술을 결합하여 홍이포를 생산하였고, 이는 청대에도 이어졌다.

서양식 대포와 조선의 첫 만남은 임진왜란을 통해서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당시 명군을 통해 불랑기를 접하고 곧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처음 제작한 이후 1871년(고종 8) 발생한 신미양요 때에도 광성보(廣城堡)와 초지진(草芝鎭)에서 불랑기를 사용했을 정도로 조선말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다.

반면 홍이포는 당시 조선군의 주력화기였던 불랑기와 비교해 유효사거리가 거의 3배나 길었을 뿐 아니라, 그 규격이나 화력 면에서도 당대 가장 위력적인 화포였음에도 그리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조선에서 홍이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631년 명에 파견되었던 정두원이 한역(漢譯)된 각종 서양 과학서적과 함께 신식 화기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오면서부터였다. 정두원은 명으로부터 홍이포의 제조 및 발사법을 습득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야전보다는 수성 위주의 방어 전략을 수립하였던 조선에서는 불랑기 정도 규모의 화포만으로도 유효한 측면이 있었고, 또 무게가 가벼운 불랑기가 홍이포에 비해 경제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두원이 홍이포를 소개하고 5년이 지난 후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 조선에서는 홍이포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청군은 홍이포를 사용하여 남한산성에서는 국왕인 인조가 거처한 행궁을 파괴하였으며, 강화도에서는 강화도 건너편 문수산에서 포격하여 염하수로(鹽河水路) 도하를 보조하였다. 이때 홍이포는 강화도 함락의 주역으로 기억될 만큼 조선 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뒤로 조선에서도 역시 홍이포 등의 개량된 대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기록상 조선에서는 1731년(영조 7)이 되어서야 홍이포를 처음 제작하였다. 다만 남만포라고 하여 홍이포와 같은 계열의 서양식 화포에 대한 기록이 있다. 1664년(현종 5) 강화부에서 강화지역 군기 수량에 대한 보고하면서, 남만대포 12좌와 불랑기 244좌가 있다고 하였다. 남만대포는 1626년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J. J. Weltevree), 즉 박연(朴淵)에 의해 제작된 서양식 화포로 보인다. 박연은 훈련도감 소속되어 화기 제작의 업무를 담당하였고,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네덜란드를 남만이라고도 하였던 점은 박연과 남만대포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남만대포는 조선에서 제작한 서양식 화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이 유럽 세계와 동아시아 세계가 무역망으로 연결되어 인적·물적 교류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화약무기의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중 조총과 홍이포는 16~ 17세기 동아시아 해역의 국제 무역체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이고 주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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