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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계변무[宗系辨誣]

태조가 이인임의 아들이 아님을 해명하다

1394년(태조 3)

종계변무 대표 이미지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종계변무는 명(明)에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문의 세계(世系)[종계(宗系)]가 잘못 전해진 것을 올바르게 고치려고[변무(辨誣)] 약 2백 년 간 노력했던 과정을 일컫는다.

태조가 고려 우왕대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서술된 것을 알게 된 때는 1394년(태조 3)이었다.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변무하였고, 1404년(태종 4)에 개정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1518년(중종 13) 명의 법전에 여전히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사라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이후 1589년(선조 22)에 조선 측의 요구를 주(註)로 처리한 『대명회전』 완질을 받아오기까지 종계변무는 조선 전기 대명관계에 있어서 주요 과제가 되었다.

2 고려 말의 윤이·이초 사건

명에 이성계의 가계가 잘못 알려진 선례는 조선 건국 이전인 1390년(공양왕 2)에도 있었다. 그해 명에 다녀온 사신들이, 명 예부(禮部)에서 고려사람 윤이(尹彛), 이초(李初)에게서 들은 말을 고려 조정에 전하면서 정국이 파란을 겪었다. 당시 윤이, 이초가 명 황제에게 한 말은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다. 공양왕과 이성계가 명을 공격할 것을 모의하자 이색 등이 불가 의견을 냈고, 그에 따라 이색(李穡), 조민수(曺敏修), 이림(李琳), 변안열(邊安烈) 등을 제거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성계 세력이 이색 등을 하옥하며 고려 말의 정치적 대립은 극에 달했었다. 이후 명에서는 윤이, 이초의 말을 무고로 인정하였으나, 이때 잘못 전해진 이성계의 가계는 명나라 기록 「조훈조장(祖訓條章; 皇明祖訓)」에 왜곡되어 반영된 듯하다. 훗날 조선 건국 후 종계의 오류를 알게 되었을 때 관료들은 윤이, 이초의 거짓말을 언급하였으며, 중종대에도 잘못된 종계가 윤이 등의 날조에 의해 기재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

3 명에서 온 문서, 잘못 기록된 종계

조선 건국 이후 명의 종계 기록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때는 1394년(태조 3)이었다. 곧바로 조선 조정에서는 태조의 22대조 이한(李翰)에서부터 이긍휴(李兢休), 이안사(李安社) 등의 종계를 서술하며 ”이인임과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다.

고려 말에 이어 조선 건국 이후까지 왕실 가문의 종계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알려진 것은 대내외적으로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직 태조는 명으로부터 고명(誥命)을 받지 못했고, 명에서는 조선의 요동(遼東) 공벌 혐의를 문제 삼고 있었다. 더욱이 건국 초기 조선 왕실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도 종계 문제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대에도 종계변무는 이어졌다. 다만 명에서 건문제(建文帝), 영락제(永樂帝)가 연이어 즉위하면서 조선에서는 고명을 받을 수 있었고, 외교적 긴장관계도 한결 누그러졌다. 명에서는 연이은 황위 교체에 따라 국내 정치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선의 요구를 관대하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태종은 종계변무를 위해 다시 사은사를 파견하였고, 이듬해 귀국한 사신단은 영락제가 개정을 허락했다는 예부 자문(咨文)을 가져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의 종계 관련 서술이 수정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실제 개정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영락제가 개정을 명하기는 했지만, 태조 홍무제의 조훈조장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조훈조장 서문에는 ’한 글자라도 바꿀 수 없다.‘라는 문장이 있다. 따라서 명에서 조선과의 외교적 약속보다 홍무제의 명을 우선했다.

4 종계변무의 재개

종계변무 문제는 백여 년이 지난 중종대에 다시 불거졌다. 1518년(중종 13) 명 사행을 다녀온 이계맹(李繼孟)에 의해 종계가 개정되지 않았음이 알려진 것이었다. 「조훈조장」 전문이 수록된 명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고쳐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1375년(우왕 1)부터 1392년(태조 1)까지 왕씨 사왕[王氏四王]을 시해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음도 확인되었다. 네 왕은 중종대에는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으로, 광해군대에는 공민왕이 아니라 공양왕의 세자 석(奭)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한 관료들은 종계변무와 관련한 문서를 작성하여 남곤(南袞)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외교문서에는 왕실 종계에 대한 서술 뿐 아니라 고려 공민왕 이후 네 왕의 사망 경위까지 설명되었다. 이때에도 명 예부에서는 종계 등의 개정을 청하여 무종(武宗) 정덕제(正德帝)의 승인을 받았지만, 고쳐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종계변무는 이어졌다. 외교문서인 주본(奏本)에는 조선 초기 이후 종계변무와 관련된 조선 정부의 설명과 그에 대한 명의 개정 약속에 대한 사실까지도 덧붙여졌지만,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1529년(중종 24)에도 명에서 『대명회전』을 중수(重修)한다는 소식에 조선은 다시 종계변무 관련 문서를 예부에 보냈지만, 이때에도 개정 조칙이 있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1539년(중종 34)에도 다시 종계변무하였고, 이때에도 기존 잘못된 기록을 원문이 아닌 부록에서 수정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에 개정 요청을 거듭하면서 사신들이 갈 때 『대명회전』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대명회전』을 다시 반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5 종계변무의 마무리

종계와 사왕 시해에 관련된 수차례의 해명이 이뤄졌던 결과 선조대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1578년(선조 11) 종계변무를 위해 파견되었던 주청사(奏請使) 황임(黃琳)은 『대명회전』이 곧 반사(頒賜)될 것임을 전해 들었고, 1584년(선조 17) 주청사 황정욱(黃廷彧)은 『대명회전』의 개정된 초본을 받아가지고 왔다.

이후 조선 조정은 『대명회전』의 완성 과정에 적극 촉각을 세웠다. 유홍(兪泓)은 아직 최종 완성되지 않은 『대명회전』의 일부를 가져오기도 했다. 1589년(선조 22)에는 성절사(聖節使) 윤근수(尹根壽)가 수정된 『대명회전』 완질을 가져왔으나 『대명회전』에 인용된 「조훈조장」의 기록이 수정된 것은 아니었다. 명으로서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홍무제의 유시를 거스를 수 없었다. 대신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용 말미에 부기(附記)하는 형식으로 기재되었다. 아무튼 사신단이 개정 요청이 반영된 『대명회전』을 가지고 왔을 때, 선조는 홍화문(弘化門)까지 나아가 직접 사신단을 맞이했다. 또한 사면령을 내렸으며, 황정욱, 유홍, 윤근수 등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하였다.

이로써 2백 년 간의 여정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사실 이후에도 명에서 수입한 서적들에 종계가 잘못 기록된 사례들은 있었다. 조선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 변무하였지만, 대개 사찬(私撰) 야승(野乘)이나 패관소설(稗官小說)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이전만큼 큰 논란이 행해지지는 않았다.

이상과 같이 종계변무는 조선 전기 대명관계에 있어서의 주요 과제였다. 특히, 건국 직후라는 시점에서 조선 왕조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태조대에는 사신들이 억류되어 일부 죽임을 당할 정도로 종계변무 문제는 난제였다. 중종대 이후 상황은 조금 개선되기도 했지만, 명에 간 사신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개정을 요청하였다.

종계변무를 비롯한 조선의 외교적 노력은 난감하면서도 필사적인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 전기 대명 관계의 안정을 이끌어냈다. 물론 조선의 지극한 사대를 기반으로 하는 관계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 양국은 전형적인 조공-책봉 관계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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