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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경제의 성립과 동아시아

은의 흐름으로 보는 동아시아

미상

중국 은경제의 성립과 동아시아 대표 이미지

은괴

위키피디아

1 개요

16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은이 화폐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16세기 조선에서는 새로운 은 제련법이 개발되었고, 이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이와미(岩見) 광산으로부터 대량의 은이 산출될 수 있었다. 1540년대에는 신대륙에서 포토시(Potosí) 광산이 개발되어 상당한 은이 채굴되었다. 이렇게 채굴된 은의 상당량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세금 징수 항목이 정리되고 은 납세로 일원화하는 은납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장거정(張居正)은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여 세액의 일원화와 은납화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명에서는 은이 표준 통화가 되어 전역에서 은이 통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었다.

2 은 제련 기술의 혁신과 은 생산의 증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여러 종류으 화폐가 사용되어 왔다. 14세기 한반도에서는 은, 지폐, 포(布), 쌀 등이 화폐로 유통되고 있었다. 금과 은이 부족해지면서 15세기에 이르면 포 등이 주요 화폐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경우, 13세기 교역을 통해 얻은 중국산 동전이 주로 유통되었지만, 쌀과 같은 현물 화폐도 유통되었다. 화폐 유통이 가장 활발하였던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에서는 금속 화폐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송원대에는 교자(交子)나 교초(交鈔)와 같은 지폐도 등장하였다. 명대에도 정부에서 지폐를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명초에는 지폐 유통의 혼란으로 인하여 세금 중 일부가 은으로 납부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는 동전이 활발히 사용되었으며, 이후로는 여러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었다.

은(銀)은 고대에도 화폐로서 역할을 담당했지만 본격적으로 화폐로 자리잡게 된 것은 명 중기부터였다. 16세기에 이르면 동아시아에서 은 채굴이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은 제련법 개발은 은 채굴을 촉진하였다. 16세기 초, 조선에서는 회취법(灰吹法, cupellation)이라는 제련법이 개발되었다. 회취법은 도가니에 재를 넣고 납이 섞인 은 원석을 녹여 은을 제련해내는 방식을 말한다. 납과 은은 녹는점이 다르기에 도가니를 가열하면 은 광석에 섞여 있는 납이 먼저 산화되어 재에 떨어지고 은을 걸러내게 된다. 원석에서 납과 은을 분리시켜 은을 제련한다 해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은 제련 방식은 민간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1503년 양인(良人)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掌隷院)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연철(鉛鐵, 납) 1근으로 은 2돈(錢)을 제련하는 방법을 연산군에게 보고하였고, 연산군은 두 사람에게 시연해 볼 것을 지시하였다. 실제로 은이 분리된 것을 본 연산군은 당시 조선의 가장 큰 은광이 있었던 함경도(咸境道) 단천(端川) 광산에서의 은 채굴에 활용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이 개발한 제련법을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련법은 중종(中宗)이 즉위하면서 금지되었다. 은 채굴 과정이 위험하고 채굴 중 사고가 잦다는 이유로 은 채굴을 중단시키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에는 일본에서 온 ‘왜은(倭銀)’이 많이 유통된 상황이었기에 은의 채굴이 더 이상 필요가 없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온 제련법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한 이와미(石見) 광산에서 조선에서 건너온 제련법을 통해 은을 채굴하였다. 단천연은법 덕분에 일본에서의 은 생산량은 증대되었고, 그 결과 153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은 생산량은 급증하였다. 이렇게 채굴된 일본은은 조선과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본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경로는 크게 두 가지였다. 바다를 통하여서는 일본에서 저장(浙江)이나 푸젠(福建) 등 중국 동남 연안 일대를 경유하여 중국 본토로 유입되었다. 육지를 통하여서는 일본 쓰시마(對馬)에서 조선으로 유입된 후 다시 조선에서 랴오둥(遼東)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일본은 유통의 확산은 중국의 은경제(銀經濟) 성립의 한 촉발제가 되었다.

은경제가 수립되기 위하여 필요한 은 수요의 급증과 은 사용의 통상화는 북방 방어와 관련이 있었다. 16세기 명은 만리장성 북쪽에 있는 몽골 부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막대한 국방비를 북변에 투입시켰다. 명의 정책에 따라 막대한 양의 은이 북변으로 투입되면서, 거대한 은 수요가 발생하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명은 해외에서 생산되는 은을 수입해야 했다. 명초 이래 해금령이 줄곧 실시되면서, 명은 조정의 공인을 받지 않은 물자의 유입 및 교역에 대하여 철저히 경계하였고, 특히 일본인과 중국인의 교역에 대하여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은은 동남 연안과 조선 두 방향으로 경유해 명으로 유입되었다.

3 신대륙 은의 동아시아 유입

중국에 필요한 은을 제공해 주었던 또 하나의 원천은 신대륙이었다. 페루의 포토시 은광은 막대한 은 수요를 충당시켜주었던 대표적인 광산이었다. 포토시 광산은 1540년대에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1560년대에는 아말감 제련법이 도입되면서 대량의 은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1570년대 이후 포토시 광산의 은 생산량은 급증하여 세계 은 유통량을 상승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신대륙의 은은 바닷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까지 흘러 들어왔다. 수많은 연안 중국 상인들은 신대륙은을 구하는데 주력하였다. 마카오에 정주한 포르투갈인들은 신대륙은을 구매하여 중국에 판매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 상인들은 마카오에서는 물론 각지에 산재한 밀무역 항구에서도 은을 구매하거나, 심지어 바다를 건너 직접 외국으로 가서 은을 교역해 오기도 하였다.

푸젠 상인들은 왕성히 해외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푸젠은 지형적으로 해안지역까지 산맥이 펼쳐져 있어 인구를 충분히 부양할 농지가 부족하였기에, 예로부터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았다. 송원대에도 취안저우(泉州)에는 민간 무역선들이 빈번히 왕래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명의 해금령으로 인하여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허가받지 않은 밀무역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 중국 내에서 은의 수요가 늘어나고 왜구와 유럽인들이 바다를 빈번히 왕래함에 따라, 푸젠 상선들도 활발한 항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선을 통하여 실어 온 은을 비롯한 교역품들은 푸젠 지방 재정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푸젠 지방 행정 당국은 해금령의 규제에 맞서 제한적인 출항 무역을 허용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 결과, 1567년 명은 푸젠성 장저우부(漳州府)에 하이청현(海澄縣)을 신설하였고, 월항(月港)이라는 항구를 통해 중국 상선들이 해외로 나가서 교역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이를 ‘융경개양(隆慶開洋)’이라고 한다.

때마침 스페인인들이 필리핀제도에 정착한 것도 중국으로의 은 유입량을 증대시킨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본래 중국 상인들은 마닐라 일대로 와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스페인이 필리핀을 장악하고 마닐라에 스페인 정청이 들어선 후에는 스페인인들과 무역을 개시하였다. 중국 상인들은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대량의 은을 구매하였는데, 마닐라로 오는 중국 상인 대부분은 월항을 출항한 푸젠 상인들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을 마닐라로 들여온 후 다시 중국인에게 판매하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중국 상인으로부터 얻는 형태의 무역을 수행하였다. 포토시 등지에서 생산된 신대륙은은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 항구를 출항한 갈레온(galeon) 선박에 선적되어 태평양을 횡단한 후에 마닐라에 하역되었다.

한편 신대륙은은 동쪽으로 스페인 본국으로도 수송되었다. 이후 이러한 은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으로 판매되었으나,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다시 동인도로 수송되었고, 결국에는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세계의 모든 은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은 신대륙은의 상당량을 흡수하였다. 한 연구에 의하면, 신대륙과 일본에서 생산된 은 가운데 1/5 내지 1/3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의 은 보유량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증가하였다.

동남 연안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온 은의 상당량은 다시 내륙을 거쳐 북변으로 흘러갔다. 이 때문에 내수용 은이 부족해지게 될 수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유입되는 신대륙은과 일본은은 북변으로 흘러 들어간 은의 공백을 충분히 메웠다. 전 세계 은의 상당량이 중국으로 유입되었음에도 민간에서는 여전히 은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한 가격 급등과 같은 현상은 없었다. 비슷한 시기 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유럽의 ‘가격혁명’ 현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4 세금의 은납화와 은 재정

1560년대에서 15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징세 제도의 은납화 과정을 통하여 중국 전역에서는 은을 이용하는 경제 체제가 구축될 수 있었다. 정규 세금인 세량(稅糧)과 노역 제공 형태인 요역(徭役) 모두 은으로 납부되는 형태로 단순화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은 다양하고 복잡한 명대 세역 제도의 폐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지방의 자의적인 세액 항목 설정과 과도한 세역 징발은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은 지방마다 천차만별이었으며, 그만큼 폐단도 상당하였다. 명 중기에 이르면 이러한 폐단을 뿌리 뽑기 위한 대책이 본격적으로 고안되었다. 15세기 중엽 각 호(戶) 납세 규모에 따라 잡역을 부과하고 이갑(里甲)을 기준으로 10년에 1번씩 돌아가며 부과하는 균요법(均徭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을 규모와 각 호마다의 재산 차이에 따라 요역 규모가 들쭉날쭉하여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각 호의 자산을 기준으로 매년 잡역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한 현(縣)의 토지를 10단(段)으로 나누고 각 단의 갑들이 1년마다 잡역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십단법(十段法)이 남방에서 실시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 면제 특권이 있는 신사(紳士) 계층에게 토지 명의를 기탁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회피하였다. 또한 여전히 노역을 직접 제공하는 잡역들이 계속 남아 있었다. 북방에서는 호(戶)에 따라 다른 액수를 납부하는 문은(門銀)과 정(丁)에 따라 다른 액수를 납부하는 정은(丁銀)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폐단은 쉽사리 개선되지 않았다.

내각대학사 장거정은 1578년부터 1581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을 실시하여 세금 징수 현황을 파악하였으며, 여러 세금 항목들을 세량 항목 1개와 요역 항목 1개로 통합시키고 모두 은으로 납부하게 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명은 은을 중심으로 하는 재정을 본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중앙 조정에서부터 도시는 물론 농촌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은이 유통되었다.

5 17세기 은 부족과 동아시아

17세기에 이르면서 전 세계적으로 은의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러한 추세를 역사의 격변과 연관 지어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17세기 초기 신대륙은의 생산량이 감소세로 접어든 가운데, 이러한 감소세가 기상 이변 현상과 겹쳐 유럽의 생산성 저하를 일으켜 경제 침체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1642~1649)과 명예혁명(1688~1689), 프랑스에서는 프롱드의 난(1648~1653)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홉스봄은 ‘17세기의 위기’라고 표현하였다.

17세기 초, 동아시아에서도 은으로 인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16세기 크고 작은 전쟁들이 연연이어 발생하면서 과다하게 지출된 은이 재정 부족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만력(萬曆) 연간(1573~1620) 보저우(播州) 묘족 양응룡의 반란, 닝샤(寧夏) 몽골인 발배의 반란, 그리고 조선에서의 임진왜란 등 이른바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을 거치면서, 명의 재정은 급격히 고갈되었다. 만력제는 고갈된 내탕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임진왜란 중에 각 성(省)마다 환관을 파견하였다. 환관들은 각 지역 은광이나 항구 등에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채굴한 은이나 징수한 상세 혹은 선세를 곧바로 베이징으로 조달하였다. 이러한 환관들은 ‘세감(稅監)’, ‘세사(稅使)’, ‘태감(太監)’ 등의 이름으로 칭하였다. 세감들은 황제의 심복으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기 때문에 지방 행정관들도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세감들은 이를 이용하여 필요 이상의 재화를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신을 납치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등 각종 폐단을 저질렀다. 심지어 조선이나 루손 등 외국에도 세감을 파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일반 행정관료들은 황제에게 세감 파견을 중지할 것을 끊임없이 권고하였지만, 만력제는 10년 가까이 세감 파견을 유지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은 부족 현상은 다시 안정세를 찾아 갔다. 중국의 경우, 신대륙은과 일본은의 생산량이 감소하여 은 유입량도 감소하였지만, 청(淸, 1636~1911)이 건국되고 서북 변방 지역도 안정되면서 국방비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자연 은의 수요도 감소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공급과 수요는 다시 균형점을 찾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국제 무역 의존도가 줄고 자립적 경제구조로 전환되었고, 이에 따라 은 수출에 대한 압박이 줄어들면서, 국내에서 유통될 수 있는 은의 양에 여유가 생겼다.

6 은의 유통 방식

16세기 이후 신대륙은은 순도 93% 8레알(real, 즉 1페소peso)짜리 은화를 주로 주조하였다. 이 1페소 은전은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 은화는 스페인달러 혹은 멕시코달러 등으로 불렸다. 중국에서는 양은(洋銀) 혹은 번전(番錢)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동전의 생김새에 따라 화변(花邊), 불두은(佛頭銀), 쌍주은(雙柱銀) 등으로도 불렸다. 처음 스페인달러를 들여왔을 때 중국인들은 이를 녹여서 사용하였다. 근세 초기 동아시아에서는 은의 무게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칭량(稱量) 화폐 제도였기 때문이다.

청 중기 이후, 동남 연안에서는 은화의 중량이 아닌 개수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방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달러도 원형 그대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주화를 세는 단위를 ‘원(圓, 元, 円)’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원형의 ‘달러’를 칭한데서 비롯되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새롭게 발행한 은화가 중국에 유통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은화의 독수리 도안에 따라 ‘응양(鷹揚)’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중국 상인들은 은을 구매하기 위하여 도자기, 비단, 생사, 차 등을 판매하였다. 이러한 상품들은 유럽인들의 선박을 통해 신대륙과 구대륙 각지로 확산되었다. 15세기 이전에는 인도양 일대 무슬림 상인들이 주로 중국 상품을 수출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이 유럽으로 중국 상품을 공급하는 매개가 되었다. 또한 태평양 횡단 항해가 가능해지면서, 물품은 스페인령 마닐라에서 신대륙을 경유하여 유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는 페루은과 멕시코은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중국 상품 수입을 제한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명대에 은경제가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은의 수요와 공급이 모두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이전부터 세역 제도 정리 작업이 점진적으로 이뤄졌고, 은이라는 화폐가 등장함에 따라 세역 은납화 과정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의 은 수요량은 급증하게 되었는데, 이는 외부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상당량은 적체되지 않고 서북 변경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은의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청 후기까지 중국에서 은은 주요 화폐로서 통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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