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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농민 봉기

삼정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농민들

1862(철종 13)

진주 농민 봉기 대표 이미지

비변사관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사회경제적 배경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철종 13) 농민항쟁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다. 김인섭(金麟燮)이 주도한 단성민란(丹城民亂)과 더불어 농민항쟁의 규모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굉장히 주목하였다.

진주농민항쟁의 근본적 원인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환곡(還穀) 문제 등 소위 삼정의 문란이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서배들의 부정부패에 의하여 발생한 결손은 심각한 문제였다.

원래 환곡이란 관청에서 춘궁기에 곡식이 떨어진 농가에 곡식을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계를 잇고 농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가 가을 수확기에 거두어들이는 일종의 농민 구체책이었다. 다만 운영 과정에서 원곡이 축나는 부분을 보충한다는 명목 하에 모곡이라 해서 1할의 이자를 붙여 거두고 있었다.

17세기 이후 부세 체제의 변화가 일어나고 기존의 조·용·조 체제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을 중심으로 한 수취 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정과 군정의 수취가 점차 고정되어가면서 환곡 모조의 일부를 호조(戶曹)·상평청(常平廳)에 상납하여 재정의 부족분을 채우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세도정권기에 들어 더욱 확산되어갔으며 중앙 기관은 물론 지방의 감영(監營), 병영(兵營), 진영, 군현 등이 독자적으로 환곡을 운영하여 재원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분(加分), 입본(立本) 등 다양한 종류의 편법적 운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환곡을 받는 농민 중 계속되는 흉년으로 환곡의 원곡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농민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장부상에만 남아있는 원곡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를 포흠(逋欠)이라고 일컫는다. 그 결과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이자는 점차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포흠의 문제는 19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갔으나 수령들은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기피하였고 포흠이 심한 고을을 회피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 재정 전반에 누적된 문제의 결과이기도 했기 때문에 수령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조정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종대에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가분 등의 폐해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 이후 전반적인 도덕적 해이와 더불어 중앙 정부의 근본적인 재정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1862년(철종 13)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으며 1859년(철종 10)에는 집단상경하여 비변사에 호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부임한 수령들도 특별한 해결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1861년(철종 12) 부임한 신억은 매결 2냥 5전씩 수취를 시도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유계춘이 중심이 되어 지방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부임한 홍병원은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도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가 부과하고자 했던 세액은 6냥 5전으로 종래 2냥 5전보다 훨씬 늘어난 양이었다. 이에 진주민들은 진주목과 감영에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고, 진주에 위치한 우병영(右兵營)에서도 진주목의 도결 결정을 틈타 병영의 환곡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우병사 백낙신은 1862년(철종 13) 1월경 주민들을 불러 모아 회유·협박하여 우병영의 포흠 중 약 6만냥을 통환으로 충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은 전라좌수사로 근무할 때도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액수를 착복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 전개는 진주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이 과정에서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이 횡행하였고, 진주 지역의 사족들도 피지배층과 동일한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이들 사족들, 특히 몰락 양반들이 진주항쟁을 기획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원래 진주 지역은 남명 조식이 활동하던 곳으로서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심으로 경상우도 사림을 결속하는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덕천서원의 창건을 주도한 인물들은 최영경(崔永慶)·하항·하응도(河應圖)·손천우·류종지 등의 진주 거주지역 인물들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곽재우(郭再祐)·정인홍(鄭仁弘)·김면·조종도(趙宗道) 등 우도 사림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선조 말년부터 광해군대까지 우도 사림들은 전성기를 누렸으나 대북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이후로 이들은 전반적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우도 출신의 정희량(鄭希亮) 등이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에 깊이 개입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 경상우도 사림들은 더욱 깊은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불만의 누적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족들에게까지 인징과 족징의 폐해가 미치게 되자 이 지역 양반들은 구체적인 항쟁을 기도하게 되었다.

2 항쟁의 조직화 과정

항쟁의 초기 논의는 지도 인물들이 거주하던 유곡리에서 몇 차례 회합을 통해 진전되었다. 구체적으로 날짜가 드러나는 것은 1월 30일 이웃 산기촌에 있는 사노(私奴) 검동의 집에서였다. 여기서 유계춘(柳繼春), 이명윤(李命允) 그리고 여러 동리 사람들이 모여 항쟁이 본격적으로 기획되었다.

이명윤은 본관이 전주 이씨이며 정종의 열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14세손이었다. 그는 1836년(헌종 2) 문과에 급제한 경력도 있으며 이후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청직을 맡았다. 철종대에는 홍문관 부교리, 교리 등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한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그는 상당히 여유가 있는 재지사족이었다고 보여지는데, 이 시기 도결에 의해 관리 출신인 자신까지 부세 부담이 돌아오게 되자 굉장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유계춘은 문화 유씨로서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유종지의 9세손인데 후대로 가면서 몰락양반으로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토지와 같은 경제적 기반은 없는 상태에서 향론을 주도한 농촌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이 둘의 사이는 좋지만은 않았으나 이 시기 들어서 억지로 감정을 풀고 나름 공조를 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월 2일 박수익의 집에서 유계춘 등의 항쟁 계획은 보다 적극적인 방향을 모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명윤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유계춘 등은 이명윤과 상의 없이 새로운 통문을 배포할 계획을 세웠고 단순한 등소(等訴)에서 벗어나 철시(撤市) 등 보다 적극적인 저항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불쾌감을 느낀 이명윤은 자리를 뛰쳐나갔고 논의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이 시기 유계춘 등 항쟁 지도부는 읍 차원으로 농민 항쟁을 끌어올리려고 했고 여기에 강승백, 강쾌, 정치회, 정지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대부분이 강씨와 정씨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강씨의 경우 강쾌가 유계춘과는 이성 사촌이었고 정씨의 경우 유계춘의 외가성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 중 정씨 계열의 인물들은 진양 정씨 은렬공파, 진양 정씨 충장공파 등이 존재했는데 가까운 촌수는 아니었지만 같은 성씨로서 양반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항쟁의 폭발과 전개

진주 농민항쟁은 일반적으로 초군 작변이라고 불리었는데 초군, 즉 나무꾼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무꾼으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산에 오르면 나무꾼이요, 들에 나가면 농부라고 불리운 자들로 농민과 명확하게 분리되지는 않는 집단들이다.

이 시기 목재는 땔감용으로서 나름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어서 적지 않은 빈농들이 부업으로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초군들의 숫자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일정한 집단성을 띄게 되었고 이후 농민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주 읍내에는 초군청이라는 기구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 관찬 사료에도 이러한 명칭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관의 통제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2월 6일 수곡에서 열린 도회에서 고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향후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크게 보면 고을과 감영에 호소를 하자는 주장과 장시를 철거하고 행동으로 나서자는 두 가지 의견이 제기가 되었다. 온건파에서는 감영에 호소해보자는 주장이 주를 이룬 반면 유계춘 등 강경파는 보다 강력한 집단 시위를 통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온건파와 강경파가 팽팽하게 맞서던 상황 속에서 처음에는 온건파들이 우위를 보였으나 강경파들도 별도의 읍회를 열고 철시 주장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다.

7일 뒤 14일 수청가(水淸街) 회의에서 농민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지도층은 적극적인 인원동원 작업을 통해 초군들을 끌어들이고 본격적인 집단행동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각 면리에 통문을 돌려서 인원을 배정했고, 이를 따르지 않을 시 벌금을 매기기도 했다. 동원 외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인원들도 적지 않아 일부 노비들도 동리인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일차 공격 목표는 장시들이었다. 우선 수곡 장터를 장악하고, 이후 덕천장시를 공격하여 집을 부수고 장시를 철거했다. 이들의 기세에 눌려 사족이나 요호부민층도 이들을 호의적으로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17일 감영에서는 도결을 혁파하겠다고 공문을 발송하여 이들을 회유하려고 했으나 농민들은 집단행동을 지속하였다. 18일 농민군은 진주성에서 서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오죽전 부근에서 집회를 가지고 평거역촌의 집들을 부수었다. 농민들의 참여는 갈수록 활발해져갔다.

진주목사는 이명윤을 내세워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농민들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19일 아침 농민군은 읍내 대안리에 있는 객사 앞 장터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농민들은 본격적으로 부세 수탈의 구조적 모순을 주도한 이방, 호방층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은 드디어 진주목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원래 목표는 본부의 이방이었으나 그가 이미 눈치 채고 달아난 상태여서 농민들은 대신 목사를 끌어내어 위협을 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농민들의 조직력은 탄탄해졌고 한편으로 항쟁은 더욱 거세졌다.

20일 이후 농민들의 활동은 진주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갔다. 23일까지 농민들은 22개 면을 지나면서 56채의 집을 부수고 40채의 집에서 제물을 압수했다. 공격받은 대상자는 주로 대상인, 지주들이었다. 농민들은 소촌, 대여촌, 개천리 등을 공격했고 소촌역, 옥천사 등의 지역에서 악명 높은 양반들과, 농민들과 마찰을 일으켰던 승려들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보여주었다. 이후 농민들은 자진해산하였으나 이후 박규수가 내려와서 항쟁을 진압하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수만 명의 농민들이 모여서 진을 치기도 하는 등 조직적 활동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4 조정의 대처

조정은 2월말부터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논의를 하였다.

정부에서는 일단 문제를 야기한 지방관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고 박규수를 안핵사로 보내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후 진주지역은 박규수에 의해 약 3개월에 걸쳐 수습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효수, 귀양, 장형 등의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주동자였던 유계춘 등은 처형을 당했다

또한 박규수는 진주민란을 유발한 최대의 책임이 우병사 백낙신에게 있다고 보고 그를 엄하게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6만냥의 돈을 도결로 거두어 드리고자 한 시도가 진주민들을 폭발하게 만들었다고 파악했다. 백낙신은 유배형이 결정되었고, 처음에는 고금도로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이후 제주도로 유배지가 변경되었다.

비록 진주 농민항쟁은 10여 일만에 끝나버렸지만, 이것이 발단이 되어 농민항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3월에 들어서 진주의 북쪽에 있는 함양·거창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그 파장은 전라도 장수·무주 등의 마을에도 미쳤으며, 이후 다수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고을들로 농민항쟁이 확산되어갔다.

농민항쟁의 대대적 확산에 당황한 정부는 나름대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박규수는 문제의 원인이 심각한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하였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는 삼정의 문란을 해결할 방도를 여러 유현들과 재상들에게 문의하여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근본적 개혁에 착수하기에는 능력과 의지 모두가 부족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 조정은 이를 단순한 일시적 충격으로 넘기게 되었고 부세의 모순은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갔다. 누적된 모순은 궁극적으로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농민운동으로 분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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