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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전문제[表箋問題]

명에서 조선의 표전 문장을 문제 삼다

1393년(태조 2) ~ 1397년(태조 6)

표전문제 대표 이미지

권근 응제시주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표전문제는 조선 건국 초 외교문서의 한 종류인 표전(表箋)에 쓰인 문장 때문에 발생한 명과의 외교적 갈등을 가리킨다. 명은 조선이 보낸 표전에 명을 업신여기고 기만하는 문장이 있다고 하여 건국 초기의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하였던 것이다.

1396년(태조 5)에 명에서는 표전 문장을 문제 삼아 조선 사신을 억류하고 해당 문서의 작성자로 정도전(鄭道傳)을 지목하며 그를 압송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표문 작성에 정도전이 참여하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대신 김약항(金若恒), 정탁(鄭擢), 권근(權近) 등을 보내 해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명은 표전 내용을 문제 삼았고, 조선은 수차례 사신을 파견해 해명을 이어가야만 했다. 이러한 표전문제는 명 홍무제(洪武帝)가 사망하면서 마무리되었다.

2 표전이란 무엇인가

표전은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외교문서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표문은 중국 황제에게 진정(陳情)·하례(賀禮)하는 데 쓰는 문장이고, 전문은 국가에 길흉사가 있을 때나 중국 황후 혹은 동궁에게 하례·진위(進慰)하는 데 쓰는 문장으로 구분된다. 한편,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표전 외에도 주본(奏本), 자문(咨文), 방물장(方物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표전은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어온 이래 오랫동안 외교문서로서 기능하였다. 표전 문장은 격식과 용어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특정한 문체에 따라 작성해야 했기 때문에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들이 지었고, 여러 차례 교감과 대조를 거쳤다. 명에 전달될 때에도 까다로운 의례 절차에 따라야 했다.

3 건국 직후 명과의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다

1392년 왕조 교체 후 새 조정에서는 명에 사신을 보내 국호를 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에 제안한 후보 명칭은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두 개였고, 명에서는 이 가운데 ‘조선’을 국호로 정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조선은 곧바로 전문(箋文)을 보내 국호를 정해준 것에 진하(陳賀)하였고, 며칠 후에는 표문을 보내 사례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명에서 돌아온 답변은 매우 위압적이었다. 조서에는 양국이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다섯 가지 이유가 서술되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절동(浙東)·절서(浙西) 사람들이 조선에 정보를 넘겨주고 있다.
(2) 조선에서 요동(遼東)의 변장(邊將)에게 뇌물을 주어 꾀어내고 있다.
(3) 요동에 있는 여진 사람들을 꾀어 조선으로 데리고 갔다.
(4) 조공을 바치는 말(馬) 상태가 좋지 않다.
(5) 국호를 정해준 조서(詔書)를 보낸 이후 그에 대한 조선의 사신 파견이 늦었다.

조선에서는 곧바로 해명하는 표문을 발송하였지만, 위의 내용은 향후 대명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조선 사신들이 요동에서 명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일부 사신이 매질을 당해서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일도 발생했다. 1394년(태조 3)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을 위시한 사신단이 파견되고 나서야 사신의 왕래가 가능해졌다.

4 명에서 표전 문장의 경박함을 힐책하다

1396년(태조 5) 2월, 하정사(賀正使) 김을진(金乙珍) 등이 가져온 명 예부 자문에서는 조선의 외교적 대응을 문제 삼는 내용이 또다시 담겨있었다. 얼마 전 새해를 맞아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에 ‘경박하고 희롱하며 업신여기는[경박희모(輕薄戱侮)]’한 문구가 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예부에 자문을 보내 “배운 바가 거칠고 얕아서 문자 사용이 비루하고 표전문의 체제를 다 알지 못했을 뿐 고의로 우롱하거나 모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또한 표문을 작성한 정탁은 풍질(風疾)을 이유로 보내지 않는 대신 전문을 작성한 김약항을 명으로 압송하였다.

이때는 마침 조선에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때였다. 하지만 그해 3월 명 예부에서는 고명, 인신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하는 동시에 표전을 찬술하고 교정한 사람들을 모두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6월에 온 명 예부 자문에서는 표문을 지은 정도전과 정탁을 지목하여 보내라고 했다.

조선에서는 표전문을 지은 권근(權近)·정탁과 교정을 맡은 노인도(盧仁度) 등을 보내고, 별도로 하륜(河崙)을 계품사(啟稟使)로 삼아 표전 작성의 전말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경전과 역사서에 밝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말이라 어음(語音)이 다르며, 표전문의 체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다시 변명해야 했다. 또한 정도전의 경우는 표문의 작성과 교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병중이라 명에 갈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

약 3개월이 지나 하륜, 정탁은 예부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으나, 당시 정총, 권근, 김약항, 노인도 등은 여전히 명에 억류되어 있었다. 다만 권근은 이듬해인 1397년(태조 6) 3월에 안익(安翊), 김희선(金希善)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홍무제의 성지(聖旨)에는 권근이 ‘노성하고 진실된’ 인물이라서 귀국시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실록』에는 황제가 내린 어제시(御製詩)와 이에 대해 권근이 화답한 응제시(應製詩)가 실려 있다. 당시 명에서는 조선 왕실과의 혼인을 거론하거나 신덕왕후 강씨의 죽음에 조문하는 내용을 담은 칙위조서(勅慰詔書) 등을 보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조선에 대해 강압적으로 접근하였다. 이듬해인 1397년(태조 6)에는 정도전을 ‘화의 근원[禍源]’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도전의 압송을 재차 요구하였다. 한편, 그해 11월에는 명에 억류되어 있던 정총, 김약항, 노인도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5 홍무제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진 표전문제

표전 문구를 문제 삼는 자문은 1397년(태조 6) 12월에도 다시 왔다. 8월에 전 광주목사(前光州牧使) 유호(柳灝)가 천추사(千秋使)로 파견되었는데, 그때 가져갔던 계본(啓本)의 문구가 문제된 것이었다. 이에 계본을 쓴 조서(曺庶) 등이 명으로 가야만 했고, 명에서는 계본 저작에 참여했던 공부(孔俯), 윤규(尹珪), 윤수(尹須) 등을 추가로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공부 등이 압송되어 요동까지 갔을 때, 명 태조 홍무제가 세상을 떠나 혜종(惠宗)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조치가 행해졌다. 공부 등은 곧바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표전문제에 대해 한 연구에서는 명 홍무년간(1368~1398)에 발생한 필화사건(筆禍事件)인 문자옥(文字獄)의 일환으로 발생했음을 검토하기도 했다. 명 국내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 문자옥이 조공-책봉 관계에 따라 조선까지 파급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후 명에서 조선의 표전 문구를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1410년(태종 10)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조선의 표전을 보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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