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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천도

조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다

1394년(태조 3)

1 고려 말 천도 논의와 한양의 부각

고려 전반에는 문종·숙종[고려](肅宗)대 남경(南京) 경영, 명종대 삼소(三蘇) 경영처럼 천도 혹은 순주론(巡駐論)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원간섭기 이후에는 특별한 논의가 없어서 삼경(三京)·삼소 등에 대한 관념도 희박해졌다.

공민왕(恭愍王)대 들어서 다시 천도논의가 제기되어 1356년(공민왕 5)에 남경 천도 논의가 있었다. 이때의 천도 논의는 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6월에 기철(奇轍) 등 부원세력이 처단되고, 원의 연호 사용이 정지되었으며,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가 폐지되었는데, 이에 대한 교서를 반포한 이틀 후에 남경을 상지(相地)하게 하였다. 천도 논의는 정국을 쇄신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하지만 이후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1360년(공민왕 9) 1월에 태묘에서 천도가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었다는 이유로 중지하였다.

1360년 1차 홍건적의 침입이 일단락된 후 7월에는 삼소 중 좌소였던 백악(白岳) 천도를 논의하여 11월에 백악 신궁(新宮)으로 잠시 이어하였다. 이후 강화가 천도지로 언급되기도 하였고, 신돈(辛旽) 등장 이후에는 그의 건의로 평양과 충주가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는 천도를 통해 신돈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공민왕대 천도론은 천도대상지가 고려 전반기 논의된 지역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전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왕대 천도론은 이러한 공민왕대의 경험 위에 왜구의 위협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짐으로써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당시 왜구는 연해의 조창과 조운선을 목표로 공격하여 국가의 조운체계를 마비시켰으며, 공민왕 후반부터는 교동(喬桐), 강화 등지를 습격하여 수도인 개경(開京)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내륙 지역으로 천도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우왕(禑王)이 재위 초반에 지세를 살핀 지역은 철원과 연주(漣州)로 모두 임진강 상류에 위치한 내지였다. 1378년(우왕 4)에 이르면 내지이면서도 공민왕대 유행한 삼소론과 관련있는 북소 기달산(箕達山)과 좌소 백악이 거론된다.

그리고 우왕대 천도 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우왕의 순탄치 못한 즉위과정과 연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1377년 5월과 7월의 철원, 연주 천도 논의도 3월에 지윤(池奫) 일파를 숙청한 후에 제기한 것이었다. 1379년(우왕 5) 7월에 양백연(楊伯淵)을 숙청하고, 9월 유모 장씨(張氏) 일파를 숙청한 후에는 바로 회암(檜岩)을 상지(相地)하였다. 이렇듯 논의의 시점이 대부분 우왕이 정국운영에서 위기에 몰린 상황으로, 천도 논의를 통해 정국돌파를 꾀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점은 1382년(우왕 8) 한양 천도 때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논의는 1382년 2월에 들어 서운관에서 한양 천도를 건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장보지(張補之)와 부정(副正) 오사충(吳思忠) 등이 『도선비기(道詵秘記)』에 근거를 두고 천도를 건의하였으며, 삼소가 아닌 삼경을, 그 중에서도 남경을 염두에 두고 천도를 청하였다. 이때 이인임은 반대하였으나 최영은 “참서(讖書)에 실린 지난 일이 모두 입증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속히 서울을 옮겨야 한다.”라며 찬성하였다.

최영은 원래 천도를 반대하는 데 선두에 섰던 인물이었다. 철원으로의 천도를 반대할 때 그는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소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왜구가 엿보는 마음을 열어 나라가 장차 날로 수세에 몰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에서 이인임이 한양 천도를 반대했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결국 천도에 대한 최영의 의견은 이인임과 결별하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더구나 1382년 2월에 이인임의 반대로 일단 중지되었던 천도는 6개월 후 우왕이 전격적으로 한양 천도를 명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것은 이인임에 반하는 우왕의 적극적인 의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천도를 통해서 대내정국을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공양왕대에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 1390년(공양왕 2)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양으로 천도한 적이 있었다. 이는 1390년(공양왕 2) 5월 이초의 옥으로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권중화(權仲和) 등이 원지(遠地)에 유배되고 이성계 일파의 세력이 커지자 공양왕이 한양 천도를 통해 정국의 변화를 도모하려 한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때 한양 천도론이 우왕대와 다른 점은 공양왕이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을 폐하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도선비기』의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은 이전부터 언급되었지만 ‘군신을 폐하게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말은 공민왕 시해를 시작으로 우왕·창왕이 줄줄이 폐위되는 상황과 관련하여, 입지가 불안했던 공양왕에게 심리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천도에 반대하는 세력에게 명분상 반박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 천도 중이었던 1390년(공양왕 2) 11월에는 김종연(金宗衍)·조유(趙裕) 등 여러 명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계획하던 사건이 탄로나는 등 한양으로 천도했던 기간 동안 이성계 세력은 정치적인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 말에 대외정세가 불안하여 수도 방비의 허점이 드러나자 천도론이 제기되어 여러 지역이 물망에 올랐으나 실제 천도가 이루어진 지역은 백악과 한양밖에 없었다. 특히 1382년(우왕 8) 이후로는 천도지로 한양만이 거론되었고 이는 조선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천도론이 제기되는 한편에서는 폐허가 된 개경을 복구하고 방어를 정비하려는 노력도 지속적으로 취해지고 있었다. 실제 천도가 행해진 곳이 한양밖에 없었다는 점과 개경 복구 노력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 건국 후 천도 대상지를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 태조대 천도논의와 한양천도

조선 건국 후 약 4년 동안의 논의를 통해 태조의 적극적인 주도로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고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이다.’라고 주장한 태조는 개경에서의 취약한 기반을 극복하고 민심을 잡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풍수도참에 부응하여 자신의 건국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반면 태조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여타의 공신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양자의 이런 대립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 13일 태조는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령한다. 건국 직후였던 만큼 태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염(李恬)을 한양으로 보내서 궁실(宮室)을 수리하게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한양 천도가 번복되는데, 궁궐과 성곽도 갖추지 못하고 천도할 경우 민가(民家)를 빼앗는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개국 직후 대규모 토목공사 실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입장에서 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1월에 태 묻을 곳을 찾기 위하여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던 권중화가 돌아와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를 바쳤다. 이를 계기로 계룡산이 새 도읍의 후보지로 대두되었고, 풍수지리가 주요한 판단근거가 되었다. 2월이 되자 태조는 계룡산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거둥하였다. 새 도읍의 산수(山水)의 형세(形勢)를 관찰하고 성석린(成石璘)·김주(金湊)·이염에게는 조운과 도로의 측면을 살피게 하고 이화(李和)와 남은(南誾)에게 성곽을 축조할 곳을 살피게 하였다. 종묘·사직·궁전·시장을 조성할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고, 실제로 땅을 측량해 보기도 하였다. 계룡산 일대를 다 둘러본 뒤에는 떠나면서 김주와 박영충(朴永忠)·최칠석(崔七夕)을 남겨서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게 하고 3월 24일에는 계룡산 새 도읍을 중심으로 기내(畿內)의 행정구역도 설정함으로써 천도가 확정적으로 추진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12월에 하륜(河崙)의 상언으로 이 또한 중지되고 천도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륜은 호순신의 지리서를 근거로 계룡산이 도읍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고려 왕조의 산릉(山陵)의 길흉과 대조한 결과 호순신 지리서의 효험이 인정된다고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계룡산 천도가 철회되었다. 이에 태조는 하륜에게 서운관(書雲觀)의 비록문서(秘錄文書)를 모두 주어서 검토하게 하고 천도할 후보지를 고르게 하였다. 결국 계룡산 천도 시도는 시작과 중단 모두 풍수지리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다만 건국 이후 두 번의 천도 시도가 전부 태조의 일방적인 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이었다면, 계룡산 천도 중지 이후로는 비로소 천도에 대한 조정에서의 논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하륜에게 비록문서를 검토하게 한 얼마 뒤인 1394년(태조 3) 2월 14일, 태조는 권중화·이무방(李茂芳)·정도전·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남은·정총(鄭摠)·권근(權近)·이직(李稷)·이근(李懃) 등 10인에게 명하여, 하륜과 함께 우리나라 역대 여러 현인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다. 천도지 선정을 위한 풍수지리나 도참설 검토를 하륜만의 일이 아닌 조정의 대신들이 참여하는 일로 만든 것이다.

곧바로 『비록촬요(秘錄撮要)』이라는 이름의 책을 완성하였고, 이직과 하륜으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다. 태조는 이들 대신과 하륜까지 11명으로 하여금 서운관 관원과 함께 완성된 책을 가지고 가서 무악 지역을 살펴보게 하였다. 대신들은 무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다고 반대하였고, 하륜은 풍수지리와 도참을 근거로 무악이 적합함을 강조하였다. 『비록촬요(秘錄撮要)』라는 매개체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과 하륜의 판단은 기준 자체가 달랐다. 결국 태조는 직접 가서 보고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로 결정한 후 서운관원 유한우(劉旱雨)와 이양달(李陽達) 등이 무악이 도읍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불일사(佛日寺)와 선고개[鐥岾]를 추천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는 선고개와 불일사를 각각 답사하였으나 천도에 적합하지 않았고, 남은은 이들이 풍수지리를 앞세워 후보지 선정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꾸짖었다. 그리고 이런 혼동을 없애고자 풍수지리에 대한 학설상 차이와 비록의 옳고 그름을 교정할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두게 된다. 이 도감의 구체적인 활동은 파악이 어렵지만 독단적인 결정방식이 아닌 다자의 논의에 의해 결과를 내려고 했다는 취지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마철과 농번기를 지나 1394년(태조 3) 8월 8일에 태조는 도평의사사와 대간·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를 데리고 무악의 천도지로 출발하였고 8월 11일에 무악에 이르러 지세를 살폈다. 윤신달(尹莘達)과 유한우 등 서운관원들은 모두 무악이 지리법 상으로 도읍에 적합하지 않으며 개성에 지금대로 도읍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태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고려 말에 서운관이 주도적으로 개성의 지덕이 모두 쇠하였다고 주장했던 것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조가 직접 무악을 살펴보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악이 도읍 후보지로서 반대에 부딪히자, 답사는 무악만이 아니라 검토 가능한 후보지를 전부 둘러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왕사(王師) 자초[무학대사](自超(無學大師))를 불러들였고, 대신들에게 도읍할 만한 후보지를 글로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성석린은 부소(扶蘇)의 명당이 고려왕조만을 위한 것일 수 없으니 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입장을 제시하였고 정총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하륜은 이전과 다름없이 지리와 도참의 측면에서 무악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고, 이직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정도전은 “국가가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盛衰)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해서 풍수의 설에 의한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오히려 새 수도의 건설보다는 민생 안정이 더 시급하니 천도는 천천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결국 재상들의 의견이 대체로 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이었고, 이미 살펴본 무악과 현 수도인 개성 이외의 다른 지역을 언급하지도 않았기에 태조를 불쾌하게 하였다.

태조는 한양 답사를 강행하여 13일에 옛 궁궐터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동행한 신하들 중 무악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하륜을 제외한 나머지 신하들이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라고 하여 근본적으로 천도에 동의하지 않으나 굳이 천도를 해야 한다면 한양이 가장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16일에는 한양을 둘러볼 때 양원식(楊元植)이 제안한 적성 광실원(廣實院) 동쪽, 17일에 백악의 신경(新京), 18일에 도라산터를 경유하여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도 후보지를 추가적으로 둘러보았지만 한양은 커녕 무악만큼의 평가를 받은 곳도 없었다.

드디어 8월 24일에 도평의사사에서 건의를 하는 형식을 빌어 한양을 새 수도로 결정하였다. 곧바로 9월 1일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심덕부(沈德符)·김주·이염·이직을 판사(判事)로 임명하여 임무를 맡겼다. 9월 9일에는 이들과 권중화·정도전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11월 2일에는 태조가 직접 내려와 종묘와 사직의 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12월 3일에 정도전에게 제문을 짓게 해서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고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다. 12월 4일에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고 권근을 궁궐 지을 터에 보내서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 태조가 직접 지켜보는 속에서 종묘의 터를 닦는 것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9월 29일에 마침내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었다.

준공 직후인 윤9월 13일에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두고 정도전에게 성 쌓을 자리를 정하게 하였고, 10월에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여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景福宮), 전각의 이름은 강녕전(康寧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근정전(勤政殿)·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근정문(勤政門)·정문(正門)으로 정해졌다. 이 이름들은 ≪시경≫과 ≪서경≫ 등 유교 경전에서 인용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이념적 기준이 어떠한 가를 내외에 분명히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1396년(태조 5) 1월부터 도성을 쌓는 일이 시작되어 2월까지 공사를 한 후, 8월에 다시 인부를 징발하여 9월까지 공사를 더 해서 성 쌓는 일을 마무리 하였다. 그 사이인 4월 19일에는 한성부의 5부 아래에 52개의 방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붙여서 수도의 행정구역과 체제를 정비했다. 도성의 완성과 함께 숙청문(肅淸門)·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의 4소문도 만들어 졌다.

3 정종대 개경 환도와 태종대 한양 재천도

태조대의 천도는 광범위한 동의 아래 단행된 것이 아니어서 관료층 내부에서는 물론 도성민, 특히 도성의 상인층으로부터 반발이 심하였다. 이들은 여전히 개경이 수도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양 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제거되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정국의 혼란을 무마할 대책으로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되었다. 1399년 2월에 제릉(齊陵) 참배로 개성을 방문했을 때 환도 의사를 내비친 후 3월 7일에 곧바로 태조와 함께 개성으로의 환도를 단행하였다. 환도에 대해서는 관료와 백성들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듬해 1월 28일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 번 정국이 요동쳤다. 2월 4일에 정안군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고, 11월 11일에 정종이 선위하면서 13일에 태종이 즉위한다. 이 때 태상왕인 태조가 새로 즉위한 태종에게 한양으로 재천도할 것을 요구하였고, 즉위 명분이 취약했던 태종으로서는 따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양 천도에 대한 논의는 이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도 반대의 입장이 그만큼 강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402년에 가서야 한양 천도가 다시 언급되는데 관민의 반대가 여전한 상황에서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가 제기한 것이 ‘양경제(兩京制)’였다. ‘양경제’란 자신이 있는 구도(舊都) 개경(開京)과 종묘가 있는 신도(新都) 한양 두 곳을 모두 폐하지 않고 수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오히려 이듬해인 1403년(태종 3)에는 종묘와 사직을 아예 구경(舊京)인 개경으로 옮기자는 건의를 하였다. 결국 개경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태종은 이러한 결정을 뒤집고 1년 후인 1404년(태종 4) 7월 10일에 삼부(三府)의 기로(耆老)는 물론이고 종친의 여러 군(君)들까지 모아서 다시 도읍에 관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당시에도 일반 관료들의 논의 분위기는 여전히 개경으로의 천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때 태종의 심중을 대변한 남재(南在)와 조준에 의해 양경제가 다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관료들의 논의는 번복되지 않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결국 태종의 일방적인 명령으로 양경제를 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약 2개월 만에 이런 명령은 번복되어 한양 천도가 결정되었다. 당시 태조는 다시금 한양 천도를 요구하였는데 태종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논의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궁 건설을 언급하면서 태종의 입장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천도 명령이 나온 다음 달인 1404년 9월 19일에 처음 한양이 새 수도로 결정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륜이 무악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자, 태종은 10월 2일에 조준·하륜·권근 등과 여러 종친을 데리고 무악으로 거동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무악이 아닌 한양으로 천도지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태조대와 달리 태종은 무악과 한양을 놓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가지고 도읍지를 선정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에 대해서 이설(異說)이 나오는 것을 적극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양 천도를 확정함과 함께 이궁 건설을 지시함으로써 천도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는 것을 정한 지 1년 만인 1405년(태종 5) 10월 8일에 개경을 떠나 11일에 한양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이궁도 19일에 완성을 보았으며, 25일에는 창덕궁(昌德宮)으로 이름지었다. 이렇듯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는 태조의 한양 천도, 정종의 개경 환도, 태종의 한양 재천도의 과정을 겪었다. 하지만 태종대에는 1411년(태종 11) 윤12월 14일에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여, 이듬해 1월 15일부터 1달 동안 충청·전라·경상도 5만 2천 8백 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청계천(당시 개천)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 기존 도감을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삼아 정비된 청계천을 바탕으로 행랑을 만들어 시전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양은 확고하게 조선의 새로운 수도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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