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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

황사영,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알리려고 하다

1801년(순조 1)

황사영백서사건 대표 이미지

황사영백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의 과정 중에 발생하였다.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황사영은 중국 북경의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담은 편지를 비단에 써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백서는 북경으로 보내지기 전에 압수되었다.

백서에는 신유박해의 전말과 처벌된 사람들의 약력이 적혀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자수하게 된 경위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리고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는 데 필요한 방안들도 제시되어 있다. 현재 백서 원본은 로마 교황청에 있으며, 1801년 이후 필사된 이본이 여럿 있다.

2 조선과 천주교

조선에 천주교 문화가 들어온 때는 임진왜란 무렵이었다.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패배한 장졸들의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포르투갈 선교사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를 웅천(熊川)에 있는 진중으로 초빙했다. 신부는 조선인과 교류하지 못했지만, 천주교 신자였던 일본인 장졸들이 조선에 천주교를 포교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은 있다.

다만 이러한 천주교와의 만남이 이후 신앙운동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천주교를 언급하였고, 이수광(李睟光)은 북경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얻어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소개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과학서적과 천주교 서적의 수입은 증가하였다. 일례로 1784년(정조 8)에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勳)은 많은 천주교 서적을 갖고 귀국하였는데, 그는 훗날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주요 인물이 되었다.

조선의 천주교 전파는 서양 신부의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해진 측면이 컸다. 지식인들의 서학(書學)에 대한 탐색은 일부 천주교 신앙으로 연결되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박해했지만, 이는 오히려 천주교의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다. 천주교인들은 서울, 경기, 충청, 전라, 강원, 경상 등의 각지에 숨어 살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보았다. 특히, 옹기업에 종사하면서 공동 노동을 하고 공동 분배를 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794년(정조 18)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여 교회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전추교의 확산에 대해서 반발하는 움직임도 거셌지만, 정조는 천주교[邪學]는 유학[正學]의 진흥에 의해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남인 시파(時派)의 거두 채제공(蔡濟恭)도 박해를 회피하였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은 노론 벽파(僻派)로 바뀌었고, 이후 천주교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만여 명의 천주교 지도자와 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3 신유박해의 발생

1801년(순조 1) 1월 10일, 수렴청정을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사학’에 대한 토벌을 공식화하였고, 천주교 관련 인물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승훈,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이는 천주교 박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남인 시파에 대한 탄압이었다.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이 탄핵되었고, 이미 고인이 된 채제공의 관작을 추탈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3월 13일에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면서 채제공은 사학의 비호세력이 되었고, 황사영이 체포된 이후에는 그가 쓴 백서가 채제공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정리되면서 그의 관직을 추탈하는 전교가 내려졌다.

4 유학을 공부하던 황사영, 천주교 신자가 되다

황사영(1775년(영조 51)∼1801년(순조 1))은 사족(士族) 출신의 천주교 신자이다. 자는 덕소(德紹)이고, 세례명은 알렉산드르(Alexandre)이다. 그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그 무렵 정약종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정난주(丁蘭珠, 鄭命連)와 혼인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세례를 받았다.

1795년에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고, 1798년에는 서울로 이사한 후 서울 지역 천주교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가서 북경에 머물고 있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편지는 발각되었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아내 정난주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5 황사영 백서사건의 전개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용은 추국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조카사위인 황사영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었다. 2월 11일에는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에 그는 서울을 떠나 여러 신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배론으로 피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아들이라는 촉구가 이어졌다.

배론에 도착한 황사영은 백서의 작성에 착수하였다.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정보를 수집해가며 백서 내용을 구상하였는데, 정약종 등이 참수되고 주문모 신부가 자수했다는 소식은 그를 깊은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백서를 작성하는 데에는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

백서의 전달에 대해서는 황심(黃沁)과 의논하였다. 백서(하얀 비단)에 쓴 이유는 옷 안에 꿰매 은밀히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9월 말 황심이 다시 와 백서를 가져가서 북경의 동지사(冬至使) 편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9월 15일에 황심이 먼저 체포되었다. 황사영도 9월 29일에 배론에서 체포되었고, 백서도 발견되었다. 황사영은 곧바로 의금부에 이송되었고, 이어 추국이 이어졌다. 황사영은 백서 작성의 배경으로 주문모 신부의 체포에 대한 불만으로 천주교[洋敎]를 확산시킬 계책을 모색했다고 언급하였다.

6 하얀 비단에 1만 3천여 자를 써서 천주교 박해를 알리다

황사영은 하얀 비단에 깨알 같은 작은 글자 1만 3천여 자를 썼다. 우선 서론 부분에는 백서를 쓰게 된 동기가 서술되어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박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천주교가 앞으로 조선에서 아주 끊어져버릴 것 같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교황으로 하여금 서양 각국에 알려 조선의 천주교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든 모색해 주기를 바랐다.

본론 부분은 천주교 박해 상황을 열거하면서 관련 인물들의 행적을 적었다. 총 55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데, 밀고자를 제외하면 총 39명이다.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최필공(崔必恭),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이벽, 강완숙(姜完淑), 송마리아 등은 신앙과 순교 행적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었고, 정약용, 권일신(權日身), 원경도(元景道), 이안정(李安正) 등은 이름만 나오거나 간략한 사실만 언급되는 수준이다. 다만 일부 내용은 다른 자료들과 차이가 있다. 특정 인물이 순교(殉敎)한 것인지 아니면 배교(背敎)한 것인지가 각기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백서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천주교 확산에 대한 각종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 교회 최초의 신자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조직, 조선 사람이 만든 교리서인 『천교요지(天敎要旨)』, 『성교전서(聖敎全書)』 등의 편찬, 강완숙을 비롯한 여성 신자들의 역할, 1791년 이후 남인이 신서파(信西派)와 공서파(功西派)로 나뉘는 과정, 대보단(大報壇)·충량과(忠良科)와 관련된 사상적 경향, 주문모 신부를 둘러싼 조선과 청의 외교문제 등이다.

한편, 천주교 교회의 재건을 위한 다섯 가지 제안도 기술되었다. 첫째, 국제적인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재정 부족이 천주교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재정이 넉넉했으면 신부의 거처를 좀 더 안전한 곳에 마련하여 박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향후 교회의 운영 방안을 설명하면서 서양 여러 나라에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둘째,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방안이다. 조선인을 북경 교회에 보내 그곳의 나이 어린 신학생에게 조선의 말을 가르쳐 후일을 대비하자고 했다. 책문(柵門) 안에 중국인 교우를 이주시켜 연락소로 삼으려 했다.

셋째, 교황에게 청하여 중국 황제로 하여금 조선에서 천주교를 공인하도록 권고하였다. 천주교 수용에 조선과 청의 사대관계를 이용한 방안이었다.

넷째, 조선을 영고탑(寧古塔)에 소속시키고 안주(安州)와 평양(平壤) 사이에 안무사(安撫司)를 두어 감호(監護)하자는 방안이다. 즉, 조선을 청에 복속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조선이 서로 통하여 신부의 왕래와 조선인의 세례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다섯째,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협박하자는 것이다. 수백 척의 배에 정예 군사 5∼6만 명과 대포 등을 싣고 와서 조선 정부와 천주교 수용을 의논하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의 배를 선교사와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배를 통해 사회와 사상의 개혁까지도 모색하였다.

바로 위의 세 조항은 너무 과격하여 당대 뿐 아니라 후대까지도 비판을 받는 내용이다. 그러나 황사영의 의도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이나 서양의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조선에 천주교를 확산하려는 절실한 바람이 담겼던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7 황사영 백서사건, 그 이후

백서사건 이후 조선에서 백서는 ‘흉서(凶書)’로 규정되었다. 백서에 수록된 인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주문모 신부를 둘러싼 청과의 외교문제도 현안이 되었다. 주문모 신부가 자수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에 알리지 않고 신부를 효수형에 처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시급히 주문모 신부의 일과 백서 사건을 알렸고, 청에서는 이를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백서사건은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질 때마다 거론되었다. 더욱이 백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천주교인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고, 천주교인들은 서양세력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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