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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세계경제의 대공황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가 무너지다

1929년

1929년 세계경제의 대공황 대표 이미지

1932년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뉴욕의 은행으로 몰려든 사람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자본주의 발달과 그에 내재한 모순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1929년에는 미국의 주가 폭락을 계기로 세계가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직면하였다. 나라마다 실태와 시기가 다르지만, 대공황은 1929~1933년에 걸친 미증유의 최대 공황이었다. 그에 대응해 영국과 프랑스 등이 세계 경제를 블록화 하는 이른바 블록 경제(bloc economy)를 형성하고, 미국은 뉴딜(New Deal)이라는 수정 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파시즘 국가로서 영토 확장에 몰두하였다. 결과적으로 대공황을 거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시 안정되었던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는 다시 양분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 미증유의 세계 공황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불완전하게나마 국제 정치가 안정되었다. 경제적으로 1920년 공황이라는 조정이 있었지만, 유럽과 달리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은 미국이 상승 국면으로 접어들어 세계 경제를 주도하였다. 그 배경에는 무엇보다 자본 수출과 국내 투자의 확대 등이 있었다. 미국의 호황과 대외 투자를 배경으로 세계 경제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원한 번영’을 꿈꾸며 주식 투기가 전개되면서, 특히 자동차·가전·건축·철강 등의 산업에서 과잉 생산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호황이지만 구조적 실업과 더불어 농업·방적업·피혁·석탄·조선 등의 산업이 불황이었고, 소비와 수요의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과잉 생산은 재고 확대, 생산 축소, 기업 도산과 실업 등으로 이어져 주가 변동을 초래하였다.

1929년 9월부터 미국에서 주가가 폭락해, 10월 24일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가 대혼란에 빠졌다. 주식이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진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었다. 이후 위기감이 증폭되며 주가가 2개월 만에 40% 이상 급락했고, 공업은 물론 농업과 금융 등 경제 전반이 위축되었다. 미국 사회가 공황 상태에 처한 것이다. 공황 이전과 비교해 1933년에는 주가가 약 80% 폭락하고, 공업 생산이 평균 3분의 1 이상 감소했으며, 1만여 개의 은행이 폐쇄되었다. 그리고 대량 실업으로 실직자가 약 1,200만 명에 이르러 당시 미국인의 25%가 실직하였다.

미국의 공황은 일차적으로 과잉 투자 및 생산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업을 시작으로 농업과 금융 등 경제 전반에 확대되며 전례 없이 장기간 이어졌다. 이는 세계 경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독일·영국·프랑스 등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어서 그들과 긴밀히 연관된 남아메리카·동남아시아·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의 공황을 시작으로 강국과 빈국 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 대공황이 전개된 것이다.

일본 역시 서구 각국에 비해 정도는 덜했지만, 대공황의 영향으로 불황에 빠졌다. 당시 일본은 은행 경영의 불안으로 금융 공황을 겪은 후,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정지한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해 긴축 정책으로 전환하고, 1930년 금 수출을 허가하였다. 환율 안정에 기초해 산업을 합리화하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금본위제의 경기 조절 기능으로 경제를 정상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대공황과 맞물려 정화(正貨)인 금이 대량으로 유출되었다. 주가와 물가가 폭락하고, 기업 도산으로 실업이 증가하는 한편 국제수지가 크게 악화하였다. 특히 미국 수출이 격감해 생사 가격이 폭락했고, 연쇄적으로 다른 농산물 가격도 떨어져 이른바 농업 공황이 일어났다. 쌀의 경우, 디플레이션 정책과 풍작 그리고 조선 등으로부터 유입으로 인해 가격 하락의 피해가 매우 컸다. 따라서 쌀농사와 양잠을 중심으로 하던 일본 농촌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1910년대 식민지에 대응한 경제구조로 재편되었고, 1920년대 총독부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쌀 생산이 늘었지만, 생산량 증가 이상으로 많은 쌀이 거의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지주제 하의 농업과 농민은 파탄에 이르렀다. 한편 수출된 쌀은 일본의 식량 문제와 국제수지 대책에 활용되었는데, 대공황 시기에는 오히려 쌀값 하락을 초래하였다.

주목할 것은 대공황을 계기로 자본주의 근간이던 금본위제가 무너지고 경기 순환의 흐름이 작동하지 않게 된 점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호황과 불황을 순환하며 발전했고, 20세기 들어서 금융자본의 확대를 배경으로 주기적으로 공황이 일어났다. 그런데 대공황 이후 세계 경제는 장기간 호황을 회복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발전의 회복력을 상실하였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드러난 것인 동시에, 각국 경제가 유기적으로 관련되며 자본주의 모순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중심의 세계 체제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지는 한편 미국이 패권국이 되는 과정에서 대공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미국은 새로운 패권국으로서 통화정책을 준비하지 못한 채, 오히려 투자 자금을 거둬들여 세계 각국의 유동성을 고갈시켰다.

3 세계 경제를 분할한 블록 경제의 형성

대공황의 위기에 먼저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관세를 인정하는 한편 저금리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은 연방국 및 식민지를 동일 통화권의 블록으로 설정하고, 특혜 관세를 부과하는 이른바 관세 협정을 맺었다. 아울러 제3국에 대해 높은 관세율 등을 적용해 관세 장벽을 만들고 통상조약을 파기함으로써, 다른 블록과의 무역을 차단하였다. 이른바 블록 경제라는 보호 무역의 체제를 만든 것이다. 그 결과 1929년과 1933년을 비교하면, 국제 무역액이 약 3분의 1로 줄었다. 블록 경제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어, 세계 무역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경제 규모 자체를 축소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미국 역시 높은 관세를 부과해 수입을 규제하는 등 보호 무역을 실시하고, 범아메리카 회의(Pan-American Conference)를 통해 달러 블록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경제 회복은 순조롭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당시 사회주의 체제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소련의 경우 국가가 소비와 생산을 계획하는 경제 구조에 기초해, 중공업 생산량이 4배 이상 성장했고 실업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도 생겨났다. 한편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대공황에는 금융정책보다 소비를 직접 증대시키는 재정지출 정책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였다. 구체적으로 감세와 공공투자 등을 통해 투자를 늘리고, 유효수요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수요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33년에는 미국 정부가 새로운 경제정책 즉 뉴딜(New Deal)을 실행하였다. 정부는 먼저 금융을 안정시키고, 단기간에 경기 회복과 고용 확보를 위한 정책들을 제정하였다. 400만 고용의 창출을 목표로 대규모 공공사업 등을 실행하는 한편, 농업 부문의 생산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 임금의 확보에 관여하고 노동자 권리를 확대하였다. 그것은 무분별한 과잉 생산을 막고, 수요를 늘리기 위해 노동자의 소득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또 미국 정부는 연방긴급구제국(FERA: Federal Emergency Relief Administration)을 설립하고 최저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그것은 대공황에 대응한 최초의 구제기관으로, 이후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가 전면적으로 개입해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수습하면서, 미국은 대공황의 늪에서 조금씩 빠져 나왔다.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으로 인해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렸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해소하는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하였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국가에 보통선거제가 실시되고 대중의 정치적, 경제적 요구가 강해지는 한편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는 실업 대책 등 사회 개혁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역설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전국산업부흥법(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에 기초해 생산과 가격이 조정되는 등 카르텔 구조가 형성되었고, 거대 자본이 국가 권력과 연계해 이윤을 증대시키는 국가독점자본주의(state monopoly capitalism)의 성격이 내재되었다.

4 베르사유 체제의 동요와 파시즘 정권의 대두

전례 없는 세계 공황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기반과 금융 시스템이 약화한 유럽의 나라들은 한층 곤경에 처했다. 독일의 경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 등 외국 투자에 의존해 경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미국 발의 대공황이 미친 영향은 심대하였다. 거기다 1931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세동맹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라고 비판하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서 자본을 회수하였다. 그로 인해 유럽 전체에 금융 위기가 일어났고, 독일에서는 준비금 부족으로 은행이 파산하고 기업들이 줄지어 도산했으며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불안한 독일 사회는 보다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했고, 사회주의 확산에 공포를 느낀 자본가와 중산 계층도 동조하였다. 이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치스의 아돌프 히틀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921년 나치스의 당수가 된 히틀러는 독일 민족 지상주의와 국가주의에 기초해 반민주·반공산·반유대 주의를 내걸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짓밟힌 독일의 자존심을 회복하자고 외쳤다. 그의 주장에 독일인들이 열광해, 나치스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독일 전역으로 나치즘이 확산되었다.

사실 그 배경에 국제사회가 독일의 배상금을 조정해 감축하는 과정, 즉 영 플랜 (Young Plan)이 도리어 독일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대공황의 영향으로 1932년 독일 노동자의 42퍼센트가 실업자로 전락하자, 이듬해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되었고 이후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히틀러 집권 이후 독일은 단기간에 실업이 줄어들고 경제는 공황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으나, 1933년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뒤 모든 경제를 군비 확장에 집중하고 영토 확장에 몰두하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지만 영토를 크게 획득하지 못한 채 심각한 재정난에 처했다. 이미 경제 혼란이 가중되어 사회 불안이 격화한 상황으로, 대공황의 직접적인 영향은 오히려 적었다고 할 수 있다. 1921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군인, 자본가, 지주 등의 지지를 얻어 국가 파시스트당을 결성하고, 이듬해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로마로 진군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역시 단기간 경기를 회복했지만, 1920년대 후반에는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노동조합·언론·종교 등 사회 전반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고 재정 지출이 늘어나자, 산업 통제와 국유 기업화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였다. 대외적으로 1937년 베르사유 체제의 타파를 주장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등을 침략하였다.

한편 일본은 대공황 시기에 우선 긴축 재정을 유지하며 산업 합리화를 추진하였다. 정부는 임시산업합리국을 설치해 산업의 정리·통제, 생산 기술과 관리 방법의 개선, 산업 금융의 개선, 국산품 애용 등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중요산업통제법을 공포하고 기업 간 카르텔과 트러스트를 조성하였다. 각 지방에 대해서도 생산과 유통 과정의 합리화를 강제하고, 정신 교화를 강조하는 이른바 자력갱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 전반의 합리화 정책은 노동·농민 운동을 격화시키는 등, 독점자본의 강화와 그로 인한 사회 모순의 심화를 초래하였다.

이에 1931년 일본은 영국에 이어 금본위제를 정지하고, 엔화 약세와 함께 무역을 확대하였다. 이를 통해 서구 열강에 비해 일찍 경기를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 서구의 블록 경제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어서 열강의 비판과 제약을 받았다. 이후 일본은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설 등으로 아시아에서 세력권을 확장하고 식민지 및 종속지역과의 무역을 급속히 확대하였다. 1934년에는 만주국의 화폐를 엔화와 연동시키고 만주지역을 일본 경제권으로 편입함으로써 대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만주사변 등 군수 경기를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해 영토 팽창에 몰두하였다. 주목할 점은 일련의 변화가 일본 자본주의의 전환과 긴밀히 연관되는 것이다. 즉 일본은 중공업을 강화하고 점차 전시경제 체제로 나아가는데, 그 배경에 타이완과 조선, 관동주(關東州) 및 만주국을 포함시킨 경제구조의 재편이 있었다. 그 영향으로 일본과 식민지 및 종속지역 간의 무역이 크게 증대되었고, 세계 무역에서 동아시아 무역의 비중이 커질 정도였다. 일본과 식민지 및 종속지역이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도가 높았던 만큼, 일본은 식민지 및 종속지역에 크게 의존하는 제국주의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일부 국가는 블록 경제와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경기를 회복하는 한편,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국가는 산업 통제와 국가 개입을 통해 공황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축(軍縮)과 국제협조 노선이 무너졌다. 그런 점에서 세계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대공황 이후 만성 불황이 이어져, 그 영향이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졌다.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군수 지출을 통해서야 대공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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