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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일본 중심부에서 유학생들 조선독립을 외치다

1919년

2·8 독립선언 대표 이미지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2·8 독립선언이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낭독한 사건이다. 일본 유학생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소식과 이 회의에 대한 국외 한인사회의 반응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일본 유학생들도 시국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일본 정부, 언론사에 발송을 했다. 이와 함께 1919년 2월 8일 도쿄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일본 경찰은 강제로 모임을 해산을 시켰으며, 27명을 체포하였다. 2·8 독립선언에 대한 소식과 ‘독립선언서’는 국내로 전해졌으며,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2·8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최초로 일어난 순수한 학생운동이며, 3·1 운동을 촉발시킨 선구적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2·8 독립선언의 배경

1918년 하반기에 전해진 국제사회 소식은 일본 유학생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시 식민지 상태에 있던 민족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앞서 1918년 11월 미국 의회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많은 일본 유학생들은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므로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의 독립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며, 파리강화회의에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 간행되는 영자신문과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新韓民報)』 등에 게재된 미국 교포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은 회고담에서 독립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은 1918년 12월 1일 자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에서“이승만과 정한경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본 이후였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들은 12월 15일 자 『도쿄 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12월 15일에 게재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국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30만 원의 거액을 모았다”라는 기사를 본 것도 독립운동을 기획한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메이지대학교(明治大學校) 재학생이었던 양주흡(梁周洽)은 그의 일기에서 당시 유학생들이 『신한민보』를 보았다고 하였다. 유학생들은 『신한민보』를 통해 “안창호가 국민회(國民會) 중앙총회장에 다시 당선되었고 현재 시국(時局)에 관해 의논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이승만(李承晩)과 정한경(鄭翰景)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30만 원을 모금하였다는 내용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신문 기사를 접한 도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 유학생들은 큰 자극을 받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다.

3 웅변대회 개최와 조선청년독립단 조직

1918년 12월 29일 도쿄 간다구(神田區)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주최로 망년회가 열렸다. 다음날인 30일에는 유학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서연합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두 모임에서 유학생들 사이에서 “이번 기회에 조선은 독립해야 하며, 우리는 생명을 걸고 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1919년 1월 6일 일본 유학생들은 동경 시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약 2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윤창석(尹昌錫), 서춘(徐春), 이종근(李鐘根), 박정식(朴正植), 최근우(崔謹愚), 김상덕(金尙德), 안승택(安承澤), 전영택(田榮澤) 등이 차례로 연설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은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진행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 동포들이 이미 독립운동을 실행하고 있으니 마땅히 일본 유학생들도 구체적인 운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의 연설이 종료된 후 웅변대회 참석자들은 한국독립운동을 구체화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한국독립에 대한 의지와 의사를 내각 및 각국 공사에게 청원한다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추진하기 위한 10명의 임시위원을 선정하였다.

위원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와세다대학교(早稲田大學校)의 최팔용(崔八鎔), 송계백(宋繼白), 게이오대학교(慶應義塾大學校)의 김도연(金度演),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의 백관수(白寬洙), 도요대학교(東洋大學校)의 이종근(李琮根), 고교생 최근우(崔勤愚), 전 고등사범학교 학생 서춘(徐椿), 아오야마카쿠인(靑山學院大)의 전영택과 윤창석(尹昌錫), 그리고 무직이었던 김상덕(金尙德)이었다. 이날 저녁, 이들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일본 정부 및 각국 공사, 귀족원 및 중의원의 의원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7일 청년회관에서 회의가 열렸다. 임시위원들은 이 자리에서 전날 밤에 협의하였던 결과를 보고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위시위원들이 협의한 사항에 찬성하였다. 이후 일부 회원들의 격한 연설이 진행되자 경찰은 모임을 해산시키고 회의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발언을 한 학생 12명을 경시청으로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7일 밤 임시위원 9명과 추가된 위원인 이광수(李光洙)와 김철수(金喆壽)는 선언서 초안 작성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속해 있던 이광수는 조소앙(趙素昻), 장덕수(張德秀)와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종용하기 위해 도쿄로 파견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한국 청년들이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여운형, 한진교(韓鎭敎), 장덕수,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조동호(趙東祜)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신한청년당은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견하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일본, 미주 및 국내와 긴밀한 연락관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 일환으로 신한청년당은 일본에 이광수, 장덕수, 조소앙을 파견했다.

선언서 초안 작성을 위한 모임에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이 조직되었다. 선언서의 작성 책임은 백관수가 맡고 있었다. 그는 이광수에게 선언서를 작성해 줄 것을 부탁을 하였다. 이광수는 백관수의 제안을 허락하고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였고, 백관수 등이 이것을 검토를 했다. 최종적으로 일본어로 ‘민족대회소집청원서’가,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이 작성되었다. 이 문서들은 인쇄, 등사, 타이프 등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인쇄되었다. 청원서는 2월 6일 최팔용이 도쿄 시내에 있는 인쇄소에 의뢰하여 1,000여장을 인쇄했다. 선언서와 결의문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은 등사판으로 약 600장을 등사했고, 영어본은 타이프라이터로 찍었다. 선언서의 등사는 최원순(崔元淳), 정광호(鄭光好)가 광주에서 온 유학생 10여명과 밤낮으로 작업했다.

한편 1월말 송계백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에 도착하여 최린, 현상윤과 만나 독립운동의 계획을 알렸다. 이광수는 1월 31일 고베(神戶)를 거쳐 상해로 건너가 영문으로 된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미국 대통령 윌슨,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등에게 전문으로 보냈다. 그리고 2월 8일에 맞추어 상해에서 가장 유력한 영자신문인 『차이나 프레스(China Press)』와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North China Daily News)』에 한국의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기사화하려 했다. 하지만 현지 통신원이 직접 확인한 기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여 2월 8일자 신문에 실리지는 못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낭독 소식은 이튿날인 2월 9일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평론 란에 「청년조선의 열망(Young Korea’s Ambition)」이라는 제목으로 2·8독립운동의 내용이 처음 소개되었고, 10일에는 『차이나 프레스』에 보다 상세한 보도가 나가게 되었다.

4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중심부에서 독립을 선언하다

유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 경찰들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과 독립청원서를 작성해서 의회에 제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2월 6일, 경찰은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大) 한국인 학생 9명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朝鮮女子留學生親睦會) 대표 김마리아(金瑪利亞)를 연행했다. 그 결과 학생들이 임시위원들에게 운동자금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경찰의 이러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은 진행되었다.

임시위원들은 2월 8일 유학생학우회의 임원 선거를 위한 총회를 연다는 공지를 하였다. 이와 함께 오전 10시경 ‘독립선언서 및 결의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에 보냈다. 또한 일본 정부의 각 대신 및 일본 국회의원 등 일본 정치인들에게도 우송하였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각 신문사 및 잡지사, 여러 학자들에도 보냈다. 오후 3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유학생총회를 가장한 조선청년독립단대회가 개최되었다. 윤창석의 사회로 회의가 시작되었고 백관수는 단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비단에 쓴 선언서가 단상에 내걸렸고 학생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오후 3시 50분경 경찰은 회의 중지와 함께 선언서 낭독 금지를 명령했으며, 곧 학생과 충돌이 일어났다. 대회를 마친 후 시가행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선언서 낭독 후 임시위원 포함 총 27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경찰은 검속된 학생들의 학교에 모두 퇴학 처분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검속된 학생들 가운데 임시위원 10명은 출판법 위반 명목으로 2월 10일에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국(東京地方裁判所 檢事局)에 송치되었다. 이 중 최근우는 선언서 등을 작성할 때 조선에 가 있었다는 것이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체포된 임시위원 9명에 대한 공판은 예심을 거치지 않고 빠르게 진행되었고 실형을 언도받았다. 유학생들의 변호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등이 담당했다.

일본 유학생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서울에 있는 민족대표자들에게 전해졌으며, 이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또한 국내외에서 2·8운동을 계승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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