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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 미국에게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한국을 요구하다

1905년(고종 42)

가쓰라-태프트 밀약 대표 이미지

가쓰라 타로와 윌리엄 H. 태프트

일본 국립공문서관, 미국 국회도서관

1 개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란, 1905년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郞)가 동아시아 문제를 두고 논의한 사항을 작성한 합의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다.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미국 대통령이 이를 적절한 사항이라고 인가하는 뜻을 밝혔다. 미국의 필리핀 점유와 일본의 한국 점유를 상호 양해하는 내용이 가장 핵심이자, 논쟁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일본이 한국 보호국화를 달성하기 위해 서양 강대국을 상대로 펼친 국제법 외교의 일환이다.

2 ‘가쓰라-태프트 합의 비망록(agreed memorandum)’이란?

1904년 2월에 시작한 러일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거중조정(居中調整, 국제법상 제3자가 분쟁 당사국 사이에 개입하여 분쟁 해결을 도모하는 외교적 방식)에 나서 1905년 6월 러시아와 일본에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양국은 이를 받아들여 1905년 8월부터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강화 회의를 진행했다. 이 협상이 진행된 결과 체결된 조약이 바로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양해하는 내용을 담은 포츠머스 조약이다.

그런데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진행되기 직전인 1905년 7월 25일, 루스벨트의 대일(對日) 개인 특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던 육군장관 태프트는 필리핀으로 가던 도중 일본 요코하마항에 입항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7월 27일 목요일 아침, 태프트는 일본 수상 가쓰라와 비밀리에 회담을 진행하였다. 여기서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할 뜻이 전혀 없음을 밝히는 동시에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한국을 지목하며 한국 문제에 대한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태프트 역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라고 한정했지만, 일본이 한국에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고 밝혔다. 회담 후 태프트는 가쓰라와 나눈 대화 내용을 요약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데, 이 문서가 바로 7월 29일에 작성된 ‘가쓰라-태프트 합의 비망록’이다.

흔히 ‘가쓰라-태프트 밀약’, ‘가쓰라-태프트 협약’, ‘가쓰라-태프트 조약’ 등으로 불리는 이 비망록은 작성된 지 20년 가량이 지나서야 그 내용이 공개되었다. 제1, 2차 영일동맹과 관련된 조약, 포츠머스 조약 등 조약 형태로 이루어진 합의가 체결 후 곧바로 알려진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또한 대화록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에는 이 담화의 성격을 놓고 학계에 논쟁이 일었다. 비망록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고, 이를 둘러싼 논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3 문서의 발견, 이를 둘러싼 논쟁

1924년 존스홉킨스대 역사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던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은 미국 국회도서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관련한 사적(私的) 기록과 외교 문서 등을 조사하다가 1905년 7월 29일 자로 태프트가 미국 외무장관 루트(Eligu Root)에게 보낸 전보문서(電文)를 발견하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한반도 문제에 관한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던 탓에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일 간의 합의안은 작성된 지 거의 20년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데넷은 미국 국무성과 비망록의 작성 당사자인 태프트에게 내용 공개를 허락받은 후 이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논문의 요지는 태프트의 전문을 루스벨트 대통령과 일본이 각각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지배를 양해한 비밀협정(Secret Pact)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1905년 7월 31일 루스벨트가 대화록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점을 확인했으며, 이를 가쓰라에게 알려달라는 회신을 태프트에게 보낸 것을 들었다. 사실 이 전문은 태프트와 가쓰라 사이의 여러 논의를 간추려 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데넷은 이를 마치 비밀협정문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전문의 사진 복사본에서 태프트의 이름과 전문의 발신인 및 수신인을 삭제한 뒤 논문에 첨부하였다.

데넷의 연구가 발표되고 약 30년 뒤인 1959년, 미국의 역사학자 에스더스(Raymond Arthur Esthus)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태프트가 루트에게 보낸 문서는 단순히 가쓰라와 태프트 사이의 회담에 관한 보고서일 뿐, 양자가 서명한 정식 협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내용 면에서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에는 미국이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나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즉, 필리핀과 한국을 거래한다는 내용은 이 문서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태프트는 가쓰라의 간청을 받아 불가피하게 사견임을 전제로 한국 문제를 언급하였다.

에스더스에 따르면 이 문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협약이나 밀약이 아닌, 서로가 원하는 바를 가지고 있었던 미국과 일본 간의 비망록이었다. 태프트가 루트에게 보고한 문서를 보면 더욱 정확히 알 수 있다. 태프트는 문서의 첫 줄에 ‘양자가 동의한 대화 기록(agreed memorandum of conversation between Prime Minister of Japan and myself)’이라고 써 놓았다. 그렇다면 7월 29일의 대화록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었을까.

4 1905년 7월 27일, 가쓰라와 태프트의 만남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는 7월 27일 오전, 비밀리에 회동했다. 장시간 이어졌던 회의의 내용은 크게 필리핀, 극동 그리고 한국에 관한 세 가지 사항으로 나뉜다. 첫째, 필리핀 문제에 관해서 태프트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필리핀에 진출할 것이라는 우려가 미국 내부에서 여론으로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더 나아가 필리핀 문제를 미국에 전적으로 맡기는 게 일본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쓰라는 태프트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어떠한 침략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가쓰라는 극동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이해를 가진 영국, 미국, 일본 3국이 상호 협조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점을 언급했다. 당시 일본과 영국은 1902년 체결한 영일동맹(英日同盟)으로 동아시아에서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쓰라는 미국 또한 이러한 동맹에 가담해주기를 간접적으로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전통적으로 어떤 나라와도 그러한 동맹관계를 맺지 않았고, 가쓰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가쓰라의 말에 대해 태프트는 상원(上院)의 동의 없이 미국 대통령이 비공식 협정에 가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정확히 밝혔다. 그와 동시에, 미국의 정책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본, 영국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므로, 비록 국가 간 공식 협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조약상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과 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셋째, 한국 문제에 관해서 가쓰라는 한국이 러일전쟁의 원인이라고 지목하였다. 한국을 그대로 둔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시 전쟁과 같은 국제적 분쟁이 시작될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태프트는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위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한국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가쓰라의 의견은 타당하며,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도록 그 외교권을 제한할 수 있는 정도의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태프트의 사적인 의견이었으며, 태프트 자신 또한 어떠한 결정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문제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한 태프트의 견해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대통령 루스벨트 또한 태프트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쓰라-태프트 사이의 회담이 곧 국가 간에 체결된 정식 협정 또는 협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태프트가 일본을 방문한 지 3개월이 지난 1905년 10월 4일, 친정부 성향의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은 가쓰라와 태프트 사이에 한국과 필리핀에 관한 비밀거래가 있었으며,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일본, 영국, 미국의 동맹이 사실상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가쓰라와 태프트의 회담에서 필리핀-한국의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오해를 낳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일본 언론의 과장된 보도로 태프트가 한 발언의 진의가 왜곡된 데에 대해 주미일본공사 다카히라(高平小五郞)를 불러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미국은 자국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에 어떠한 지원이나 보장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시 가쓰라-태프트 회담에서는 필리핀에 대한 일본의 입장만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을 뿐, 미국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이 보고 전문은 1924년 데넷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5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의 의미

1924년 ‘가쓰라-태프트 비망록’의 존재가 알려진 후 그 성격을 두고 여러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론적으로 이는 국가 간의 공식 협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당시의 회담이 공식적인 협약이었는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된다. 태프트가 이 사안을 보고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놓은 긍정적인 답변에서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입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프트와의 회담을 통해 한국 보호국화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미 미국과 일본은 루스벨트의 제안으로 1905년 1월 미일중재조약(美日仲裁條約)을 체결하였다. 중재조약(Arbitration Treaty)이란, 만약 중재조약을 체결한 국가 사이에 법적 성격을 띤 분쟁이 발생하면 이를 헤이그의 국제법정(Hague Arbitral Court)에서 해결하기로 약속한 일종의 국가 간의 계약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중재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 문제에 관해서는 국제재판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국의 보호국화에 대한 미일 간의 공식 합의는 가쓰라-태프트 회담이 있기 7개월 전에 이미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1905년 7월의 가쓰라-태프트 회담에서 실제로 미일 간의 공식 협정이 체결되었는지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쓰라-태프트 회담의 의미는 다만 미일중재조약의 연장선에서 미국이 한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일본에 재확인시켜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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