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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협약

간도를 둘러싼 근대 한·중·일 관계

1909년(순종 3)

간도 협약 대표 이미지

간도에 관한 협약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1 간도의 어원과 범위

간도라는 말에는 고종 초기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개간지를 확대해 간 삶이 투영되어 있다. 1860~70년대 함경도에 대기근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관할 밖이었고 아직까지는 남의 국경을 침범하는 ‘범월(犯越)’이라고 하여 불법행위였다. 지방관 차원이었지만 조선정부가 그 개간을 용인한 것은 함경북도 종성군 두만강 가운데에 있는 퇴적된 섬이 시초였다. 사잇섬이라는 뜻의 한자어 간도(間島)라는 명칭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두만강 북쪽변까지 개간지를 확대하면서 개간지라는 뜻의 간도(墾島)라는 말도 혼용되었다. 종성군은 토지대장인 『간도야초(間島野草)』를 작성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청일 전쟁 이후 해란강 지역까지 한인들의 개간지가 확대되면서 같은 간도(間島)라는 말을 쓰면서도 해란강과 두만강 사이 지역이라는 의미를 담기도 하였다. 또 영토문제와 결부되고 두만강변의 군과 연계되어 간도지역을 나누어 무산간도, 회령간도, 종성간도, 온성간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북간도(北間島, 北墾島)와 서간도(西間島, 西墾島)라는 말은 대한 제국기에 등장하였다. 1902년 대한 제국은 간도지역에 이범윤을 파견하여 주민을 보호하였다. 이때 그의 직함은 함북간도시찰(咸北間島視察)이었는데, 이를 줄여 ‘북간도시찰’이라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북간도라는 지역명칭이 사용되었다. 북간도라는 말에는 함경북도의 일부인 간도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대한 제국 정부의 적극적인 간도정책의 산물이었다.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로 북간도의 대칭이었다. 함경도를 관북(關北)으로 평안도를 관서(關西)로 부르는 전통도 한 몫 하였다. 조선시대 압록강 대안지역은 ‘강북(江北)’이라 불렸다.

1907년에 설치된 통감부간도파출소는 현재 중국 연길지역 전체(당시 연길청)를 동간도라고 부르고, 길림 남부의 송화강 상류를 서간도로 지칭하였다. 이것은 통감부 파출소가 임의로 나눈 것으로 만주침략의 매개로 간도문제를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만주국 시기에 설치된 간도성(間島省)은 연길에다 혼춘(琿春) 지역을 포괄하였다.

이처럼 간도, 북간도, 서간도라는 명칭과 범위에는 한인들의 개척의 역사, 대한 제국의 간도정책, 일본의 만주 침략정책 등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2 두 차례 감계협상

간도문제는 땅과 사람의 문제, 곧 영토문제와 주민문제였다. 즉, 19세기 이래 조선과 청이 국경선 획정을 둘러싼 협상과 여러 정책을 포함하여 주민 보호, 관리라는 사법권의 문제, 그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조사와 과세 문제, 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회문화정책 등을 망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간도지역과 함경도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계와 현재 삶을 바꾸려는 여러 전망까지도 포함한다.

조선 후기 이래 조선과 청은 간도지역을 봉금(封禁)하고 발견된 이주민을 처벌해왔다. 이 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여 소규모로 몰래 이주하여 농사짓거나 사냥과 인삼 채취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불법이었다. 그런데 고종 초기인 1869년과 1870년 함경도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너 이주하였다. 청도 1860년 북경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변경 방어를 위해 봉천성과 길림성 지역의 봉금을 철폐하고 한인(漢人)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조선정부는 가끔 이주민 소환을 위해 관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두만강 연변 각 지방관리는 이들에게 세금을 받는 것에 주목했다.

간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조선인을 발견한 청은 1882년 이들을 청 호적에 편입시키겠다고 조선정부에 알렸다. 조선정부는 그럴 바에는 이들을 귀환시키겠다고 회답하였다. 그런 중에 1883년 청과 변경무역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함경도에 머물고 있던 서북경략사 어윤중에게 주민들의 청원이 올라왔다. 주민들은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서위압록(東爲土門西爲鴨綠)’, 즉 정계비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구절을 환기하면서 자신들이 개간한 간도지방이 토문강 남쪽으로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또 그동안 조선과 청이 변경무역을 할 때도 두만강이 아니라 분계강(오늘날 해란강을 지칭)을 경계로 했음을 강조하였다. 실상 백두산정계비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토문강은 만주 내륙의 송화강으로 흘렀던 것이다. 정계비를 세울 당시 정확하지 않은 지리정보 때문이었다. 어윤중은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백두산정계비와 그 하류지역을 재조사한 다음 청에 간도문제를 공식 제기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반면 청에서는 월간국(越墾局)을 설치하여 간도 거주 한인들을 통제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정부가 수차례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제기하여 마침내 양국은 1885년 을유감계(乙酉勘界)와 1887년 정해감계(丁亥勘界) 등 두 차례 영토문제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주민 귀환 문제 논의는 일단 유보되었다. 을유감계에서 조선 측 협상대표인 감계사 이중하는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두만강과는 다른 강이며, 해란강-분계강을 양국 경계로 할 것을 주장했다. 분계강(分界江)이라는 명칭은 조선후기 여러 지도에 실려 있는 지명으로 고려시대 윤관의 선춘령비와 연계되어 이해되어 왔다. 반면 청 대표는 토문(土門)은 두만(豆滿)을 다르게 부르는 이름으로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며, 백두산이 자신들의 발상지라는 전제 하에 백두산 아래 소백산에서 발원하는 두만강 물줄기를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청으로서는 두만강과는 무관한 백두산정계비 존재 자체가 최대의 약점이었다. 그래서 조선 측이 정계비를 옮겼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정계비의 가치를 축소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당시 양국 관계를 환기하며, 조선 측이 정계비의 송화강 발원을 경계로 삼으려는 뜻인가 하고 역공하였다. 이중하는 토문강이 해란강과 이어지지 않는 조사 결과와 조선시대의 문헌 중에 토문강이 곧 두만강이라는 기록을 확인하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협상 과정에 청 관리가 위협적인 말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토문’은 ‘두만’이 아님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그 직후 조선 주재 청 총리 위안스카이와 외아문 독판 김윤식간에 이른바 ‘차지안민(借地安民)’ 안이 제기되었다. 간도를 청 땅임을 인정하고 대신 그 주민들을 조선 지방관이 관할한다는 안이었다. 당시 조선정책을 총괄하던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은 이를 거절하였다. 또 위안스카이는 조선정부의 간도문제 제기가 어윤중 등 강경파의 주장 때문에 일어난 사안으로 파악하였다.

1887년 정해감계에서 다시 협상대표가 된 이중하는 후퇴하여 ‘토문=두만’이라는 청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것은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국은 두만강 하류에서 무산까지의 경계는 확정지었음을 서로 확인하였다. 다만 무산에서 정계비까지 두만강 상류의 여러 물줄기 가운데 이중하는 최상류인 홍토수를 경계로 할 것을 주장한 반면, 청 협상 대표는 홍토수의 남쪽인 석을수를 경계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청의 주장은 백두산을 조선 영토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안이었다. 역시 합의문 작성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합의문 작성을 위한 추가 협상 필요성이 청에서 나왔지만 양국은 다시 회동하지 않았다. 미정인 상태로 남겨두면서 후일 조선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1890년에 이르러 청은 경계문제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면서 간도 거주 조선인 유민들에게 이른바 ‘치발역복(薙髮易服)’ 즉 청식의 복장과 변발을 강요하였다. 또 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통해 청 호적에 편입시키고 세금을 받는 등 자국에 영토와 주민을 완전히 편입시켰다. 조선정부가 이에 반발했지만 청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3 대한 제국의 간도정책

청일 전쟁과 대한 제국의 출범 이후 간도문제는 다시 요동쳤다. 대한 제국에서는 자주, 독립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등 언론과 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영토문제와 주민문제를 제기하였다. 청일 전쟁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던 양국이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이 열린다는 소식이 계기였다. 1898년 가을 종성 출신의 오삼갑(吳三甲) 등이 간도영유권 문제와 주민 보호를 위한 관리 파견 문제를 청과 협상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부 내에는 오삼갑의 주장이 두 차례의 감계 결과와 상이함을 들어 논의를 거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함경북도 차원에서 간도문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만큼 이를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함경북도의 보고가 올라왔다. 그동안 정부 차원에서 주장한 간도의 범위 중 가장 광범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청통상조약 협상에 임하였다.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청이 양국 경계문제는 육로통상조약 협상으로 넘길 것을 주장함에 따라 결국 1899년 주민 보호 조항을 담은 내용의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 6월 의화단사건은 또 하나의 변수였다. 의화단 진압을 명분으로 10만 이상의 러시아군이 만주를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대한 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되었다. 의화단사건으로 간도지역에는 청의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공백이 생기고, 두만강과 압록강 변에는 이른바 ‘청비(淸匪)’가 등장하여 한인들을 약탈하였다. 대신 러시아가 간도지역에서 행정과 군사 부분을 장악하였다. 대한 제국은 변경방위를 위해 진위대를 설치하고 지방 단위의 포군을 동원해 방비하였다. 간도 한인들은 수차례 자신을 보호해줄 관리 파견을 정부에 청원하였다. 대한 제국은 1901년 2월 회령에 본부를 둔 200명의 규모의 변계경무서 를 설치하였다. 경찰인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한인 호구 조사와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청의 반발과 러시아의 개입 때문에 제한된 무장력을 가지고는 차츰 두만강 넘어 순찰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간도문제에 대해 청 영토임을 전제로 접근하였다. 이곳에 분란이 생겨 일본이 개입하게 되면 자신들이 역점을 기울이고 있는 만주문제에 장애가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한국과 청 양국에게 교계관(交界官)이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공동으로 주민을 보호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청은 그 수용을 거부하였다. 이런 중에도 두만강 지역에서 양국의 무력 충돌이 일상적으로 일어나 인명, 재산상의 피해가 격증하였다. 함경도와 간도 지역 지식인들은 진위대의 파병이나 자위 무장력인 사포대 결성을 허락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였다.

1902년 대한 제국은 러시아의 압박 속에서 시찰 이범윤을 파견하였다. 그는 한국인 호구와 부동산 조사, 청의 부당한 세금 수탈 행위를 조사하였다. 그가 파악해 정부가 보고한 호구 수는 10여 만에 이르렀다. 그리고 함경북도 경원의 김노규(金魯奎)와 접촉하여 대한 제국기 간도영유권 문제를 총정리한 『북여요선』 집필의 계기를 주기도 하였다. 이 책은 주민보호 문제를 넘어 영유권 문제를 본격 거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 책은 장지연의 『대한강고』와 『증보문헌비고』의 간도 관련 서술에도 영향을 주는 등 이 시기 간도영유권 문제의 전범이었다. 1903년 주재 관리 성격을 띤 관리사(管理使)로 승격된 이범윤은 간도 주민들을 결속하여 1천명 규모의 사포대를 결성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신식 소총을 지급하였다. 고종의 의지와 함께 함경도 출신의 이용익의 지원이 컸다. 1903년 말에서 1904년 초까지 사포대는 청 지방군과의 충돌을 불사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결국 대한 제국은 간도 주민 보호라는 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청은 이범윤 철수를 위해 영토문제 재협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개입하면서 이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지방관들 사이에서의 선후장정이라는 잠정합의만 이루어졌다. 양국의 무력 충돌을 중지하고, 이범윤을 소환하며, 현재의 국경선을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4 일본의 개입과 간도 협약

러일 전쟁 이후 양국의 협상이 중단되었지만, 일진회의 간도 이주 구상, 일본 낭인들과 일본 귀족의 간도 개발 구상도 있었다. 이민과 만주개발, 그리고 독자적인 왕국 건설을 모색한 것이었다. 그런 중에도 계속해서 주민보호를 위한 관리 파견 요구가 간도 현지에서 제기되었다. 반면 관리 이범윤은 러일 전쟁 종료 시점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후일 연해주 의병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 이곳에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일본은 초기에는 한국의 논리를 받아들여 청과의 협상에 임했으나 만주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간도문제를 처리한다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1909년 9월 북경주재 일본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와 청 외무부 상서회판대신 양돈언(梁敦彦) 사이에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영토문제는 청의 요구대로 하고(정해감계 당시의 청 측 주장이었던 석을수 경계), 주민 관할 문제는 기본적으로 청이 법적, 경제적 관할권을 행사하되, 일부 무거운 범죄에 대해서만 간도에 설치될 일본 영사관이 개입할 여지를 남겨둔 것에 그쳤다. 영토문제를 양보하고 주민문제에 이해를 관철시키려는 것은 1886년 이른바 ‘차지안민’ 협상과 같은 맥락에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다. 일본은 간도문제를 양보하는 대신에 만주지역에서 철도, 광산 등 여러 이권을 담은 ‘동삼성육안(東三省六案)을 관철시키는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로써 간도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들어 한인들의 대규모 이주와 독립운동, 일본의 만주침략 정책에 따라 간도문제는 또 다른 변주를 하였다. 또 우리 손으로 간도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함으로써 간도문제는 한국인들에게 회한과 염원을 남겨 한국인들의 만주와 북방에 대한 인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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