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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참변[間島慘變]

일본군대 간도 한인사회를 파괴하다

1920년

간도참변 대표 이미지

간도참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운동 세력의 성장

한인 간도(間島) 이주의 역사는 19세기 중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후기 서북지방을 휩쓴 대흉년으로 인하여 한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한인의 간도 이주는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식민지 토지정책으로 인하여 자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하는 한편, 경작지를 잃은 농민이 증가함에 따라 빈곤한 농민들이 경작지를 찾아 만주(滿洲)로 건너갔기 때문이었다.

간도는 흔히 북간도와 서간도로 구별하여 일컬어진다. 연길(延吉)현, 화룡(和龍)현 왕청(汪淸)현, 훈춘(琿春)현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대안(對岸)지역을 북간도, 백두산 서쪽의 집안(集安)현, 통화(通化)현, 유하(柳河)현, 환인(桓仁)현, 관전(寬甸)현, 임강(臨江)현, 장백(長白)현, 무송(撫松)현, 안도(安圖)현, 흥경(興京)현, 해룡(海龍)현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서간도라 한다. 특히 북간도의 한인사회는 규모가 매우 컸다. 간도참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8년의 자료에 따르면 북간도의 전체 인구 32만 6,563명 중 한인이 25만 3,691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도 한인이 북간도 전체 인구의 75%~80%를 점하고 있었다.

간도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조선과 중국의 접경 지역이었으므로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깝고, 규모가 큰 한인사회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국외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간도로 망명하였으며, 한인사회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도의 한인들은 민족교육시설을 설립하여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동시에, 민족운동의 중요한 후원 세력이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간도를 기반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같은 독립군기지들도 설립되었다.

2 참변의 서막: 봉오동 전투와 훈춘 사건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간도의 한인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열기를 이어갔다. 무장독립운동 세력들이 속속 결집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의군부(義軍府)등의 독립군단체들이 3·1 운동 이후 결성되거나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들은 간도를 거점으로 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수행하였고, 이에 따라 ‘조중(朝中)국경’ 지역의 무력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1920년 6월 일어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는 일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조선주둔일본군(朝鮮駐屯日本軍) 제19사단 사령부는 앞서 일어난 신민단 독립군 소부대와의 충돌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3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1920년 6월 6일 북로독군부의 주둔지였던 봉오동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인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대패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경 부근에서 강력한 무장세력이 성장하자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일본은 중국동북지역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장작림(張作霖)과 교섭하여 간도지역 무장독립운동 세력을 ‘철저소탕’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독립군 토벌작전에 나선 중국군은 일본에 비협조적이었다. 길림독군고문으로 파견되어 작전에 참여한 사이토(斎藤) 대좌는 중국군이 “토벌이라 칭하고 그곳에 가서 그들이 남긴 병영 등을 파괴하고 표면을 호도”하는 데 그쳤다고 불만을 표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독립군을 절멸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1920년 8월부터 간도침공을 위한 사전 준비를 시작하는 한편, ‘출병(出兵)’에 대한 명분을 마련하였다. 1920년 10월 2일 일어난 훈춘사건(琿春事件)이 일본군 ‘간도출병’의 명분이 되었다.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 마적(馬賊)들이 훈춘 시가를 습격, 약탈,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10월 2일 마적단은 다시 한번 훈춘에 나타나 일본 영사관에 방화하고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다. 일본 영사관과 거류지가 습격당하자 일본에서는 즉각 출병청원이 잇따랐다. 훈춘사건은 일제가 ‘간도출병’을 단행하기 위하여 마적단을 사주하여 날조한 사건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3 일본군의 간도 침공과 청산리 전투

일본 내각은 즉각 ‘출병’을 결정하였다. 주력군은 조선주둔일본군 제19사단, 블라디보스톡 파견군, 북만주 파견군, 관동군(關東軍) 등으로 구성된 2만여 명의 군대였다. 일본군대는 간도를 포위하고 10월 중순부터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작전(間島地方不逞鮮人焦土作戰)’에 들어갔다.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북간도를 담당한 것은 이소바야시(磯林), 기무라(木村), 아즈마(東) 의 3개 지대(支隊)로, 각각 10월 14일, 17일, 15일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훈춘사건이 일어난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대규모 군사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이소바야시지대는 훈춘과 나자구(羅子溝)를 비롯한 북간도의 가장 동쪽, 기무라지대는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 대감자(大坎子) 일대의 중부지역, 아즈마지대는 국자가(局子街), 용정(龍井), 두도구(頭道溝)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를 맡았다.

그러나 독립군은 1920년 9월 무렵부터 근거지를 옮기기 시작하여 노령(露領, 러시아 영토)과의 접경 지역과 북간도의 서쪽인 화룡현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즉, 북간도를 중심으로 각각 동서로 나뉘어 이동하였던 것이다. 이 중 서쪽으로 이동해 있던 독립군의 지도자는 김좌진(金佐鎭), 홍범도(洪範圖), 이범석(李範奭) 등으로, 아즈마 소장이 지휘하는 약 5천여 명 규모의 부대와 청산리(靑山里)에서 격돌하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를 옮겨가며 이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독립군 부대는 주력을 보존한 채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도를 빠져나갔다. 이것이 독립운동사에 유명한 청산리전투였다.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는 1921년 ‘간도출병’에 대한 종합보고서에서 “중국군대가 타협적 토벌을 벌인 후라 적도가 흩어져서 바로 초토 행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외교 등의 관계상 서쪽 및 북쪽 지역은 거의 개방되어 있었던 데다 지역이 넓고 병력은 적고 시간이 없는 등 다양한 원인으로 그들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즉, 1920년 10월 일본군의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작전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변’이라고 부를 만큼 간도 한인사회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4 파괴와 살상, 그 이후

간도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해 가며 북쪽으로 이동하여 1920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중국 밀산(密山)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독립군 부대를 재정비하고 통합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1920년 말부터 1921년 초에 걸쳐 연해주 이만(현재의 러시아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하여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자유시에 모인 3천여 명의 독립군 병력 중 2,000여 명 정도가 간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간도의 한인사회가 어느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군 철수 후에도 간도 한인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조선인 민회(民會) 조직을 확대하고 경찰력을 증가시켰다. 파괴와 학살이 자행되는 폭력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제에 ‘귀순(歸順)’하거나 민회에 가입함으로써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1920년 이후, 간도지역에서 일제에 의한 한인 지배력이 이전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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