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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정변을 통해 근대 국가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3일 천하로 끝나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대표 이미지

갑신정변을 주도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개항 이후 개화파세력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여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일어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은 청에 의한 내정간섭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국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진정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우선 정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 1884년(고종 21) 청불전쟁(淸佛戰爭)이 일어나자 청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의 일부를 철수시켰다. 이를 계기로 개화당은 정변을 단행할 것을 결정했고,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884년(고종 21)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개화세력은 민씨 수구세력을 처단하고 신정부를 수립하였으며 혁신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곧이어 청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하면서 개화당의 집권은 3일 만에 끝나게 되었다.

2 개항 이후 조선 정계의 변화와 개화당의 형성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조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었다. 조선사회는 이제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국제 환경의 변화는 조선 사회에 큰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으며,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 중 하나가 바로 개화사상이었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조선 사회는 개항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이 단연 높았다.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로 꼽히는 최익현(崔益鉉)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며 개항을 반대하는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기도 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에도 위정척사론적 견해들이 지배적이었으나,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 가운데 서구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 역시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의 대내외정책 변화를 가져왔던 중요한 전기는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 파견에서 마련되었다. 김홍집(金弘集)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에서는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대일·대미 개방정책을 추동시켰다.

수신사의 보고와 개화에 대한 고종의 적극적인 의지로, 조선정부는 점차 개화·자강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했다. 1880년 12월에는 서양 국가들과의 외교·통상에 대비하여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동시에 국가의 재정·군사 업무를 맡아 볼 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새롭게 설치했다. 통리기무아문의 실질적 운영을 주도한 것은 각 사(司)의 당상들이었는데, 1881년(고종 18) 11월 이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조사(朝士)였던 홍영식(洪英植), 심상학(沈相學), 박정양(朴定陽)등이 대거 등용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발생했지만 그 후에도 개화세력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화파들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계열의 정치세력을 일소하고,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나갔다. 임오군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1882년 8월 일본으로 수신사가 파견되었는데, 정사(正使)는 박영효, 부사(副使)는 김만식(金晩植), 종사(從事)는 서광범(徐光範)이었으며, 고문으로 김옥균·민영익 등이 참가했다. 즉 이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박영효·서광범을 비롯한 정변 세력들이 1882년 수신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들 수신사 일행은 4개월간 도쿄에 머무르면서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일본 정계의 인물들을 두루 만났다. 또한 개화의 방책으로 군주의 문명화를 통한 개혁정책의 추진, 개혁세력의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한 정부 내의 부분적 개편, 개혁정책을 지원하고 선전하기 위한 신문 발간 사업 등을 구상했다.

한편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1882년 7월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체제를 이어받은 기무처(機務處)를 설치하고, 이후 이를 통리아문·개편했다가 1882년(고종 19) 12월에 다시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내아문)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외아문)으로 다시 체제를 개편했다. 이로써 정부 조직은 의정부·육조(六曹)와 내아문·외아문의 이원적 체제로 운영되었다. 특히 내아문은 그 처소를 궁궐 안에 두고 부국강병에 관한 업무와 국정 정반의 주요 사안을 의결·집행하는 개화·자강의 추진기구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의정부를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기능했다.

내아문의 실권은 독판(督辦), 협판(協辦) 등 당상관들이 장악했으며, 주로 친청파와 민씨 척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따라서 내아문에서 주도한 개화정책은 청의 영향력 아래 진행되었으며, 친청적인 민씨 척족 일파는 각종 개화 사업을 독점적으로 운영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던 개화당 세력은 민씨 척족이 주관하는 청국식 개화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이에 따라 개화정책의 내용과 노선을 둘러싸고 자연스럽게 개화정치세력의 분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비록 민씨 일파는 내아문 등의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반면 고종에 대한 영향력과 외교문제는 개화당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개화당은 5~6명의 소수에 불과했고, 제도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권력기구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고종은 각 정치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갈등구조를 왕권 강화에 적절하게 이용하고자 했다. 개화당은 고종의 기회주의적 정치운영과 개화정책 추진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따라서 ‘독립’과 ‘개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종만을 믿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3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정치적 성장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임오군란 이전에 과거를 거쳐 관계(官界)에 입문했는데, 박영효를 제외한 모두가 문과에 급제한 문인들이었다. 김옥균·홍영식은 1872년(고종 9)에 문과에 급제했고, 서광범과 서재필(徐載弼)은 1880년(고종 17) 이후 과거를 거쳐 관직을 부여받았다. 박영효는 같은 해에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그들은 주로 홍문관과 사헌부의 직임에 종사했으며, 그 외에 성균관·규장각의 직임을 역임했다. 그들 가운데 홍영식은 조사시찰단의 조사로서 일본을 방문했고, 김옥균은 개인적으로 6개월 여 동안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했다. 그만큼 그들은 근대화에 대한 높은 관심과 적극성을 보이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2년여 동안에 개화당 세력은 외교와 정치 분야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임오군란 후 일본에 파견된 3차 수신사행에 박영효·서광범·김옥균이 참여했으며, 그들은 3~7개월에 걸쳐 외교활동은 물론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했다. 홍영식과 서광범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각각 5개월과 1년여 동안 서구의 근대 문물을 경험했다. 김옥균은 또한 고종의 위임장을 갖고 차관 도입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10여 개월 동안 차관 도입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일본과 미국 등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문물을 시찰하고, 조선을 대표하여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주로 외아문과 내아문, 승정원·육조 등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개화정책을 총괄했던 내아문에는 홍영식이 참의·협판을, 서광범은 내아문 참의를 역임했다. 외교를 총괄했던 외아문에는 김옥균과 홍영식이 참의·협판을 지냈고, 왕명을 전달하는 승정원에는 김옥균·서광범·박영교가 승지를 역임했다. 육조에는 이조참의(김옥균·홍영식)·호조참판(김옥균)·병조참판(홍영식) 등을 맡았다, 그밖에 우정국 총판·한성부판윤·광주부유수·동남개척사 등의 직임을 맡아 활동했다. 박영효는 1883년(고종 20) 10월 광주부유수를 그만둔 이후 관직에 오르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왕실의 부마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반청개화사상

임오군란 이후 청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의 정치·외교에 관여함은 물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체결 후에는 특권을 앞세워 경제적 침탈을 자행했다. 청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고 조선 내부의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지배구조를 완결시켜 나가자, 개화당원들은 청의 압력을 배제하고 독립을 이루는 것을 제1차 과제로 삼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에 쓴 「조선개혁의견서」에서, “이전부터 청국이 속국으로 여겨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나라가 떨쳐 일어날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이에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속박을 벗어나고 독립하여 완전 자주국을 수립하는 일이다. 독립하고자 하면 정치와 외교는 불가불 자수자강(自修自强)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을 섬기는 지금의 정부·인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개화당 세력은 청에서 독립하는 것이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동도서기론자를 비롯한 다른 정치세력과 다른 것이었다.

1882년(고종 19) 후반에 이미 청에 대한 입장과 개화정책 추진을 둘러싸고 개화정치세력의 분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1882년 11월 김옥균은 서양과의 조약체결 문제를 논의하는 중에 “우리 조정에 발의한 바 있으나 여러 지나당(支那黨)의 저희(沮戲)를 입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상심하는 바다.”라고 하며 친청파의 방해를 받고 있음을 밝혔다. 이는 집권층 내 개화정치세력이 친청적인 ‘지나당’과 개화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또한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지나당’과 김옥균 일파 사이에 정치적 알력이 있었음을 나타난다. 이후 청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친청파인 민씨 척족과 개화당 간의 정치적 대립 관계가 심화되어 갔다.

이와 같이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반청의식은 뚜렷했던 반면, 일본과 서구의 침략적 의도에 대해서는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실제로 윤치호와 홍영식은 미국을 침략적 야심이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서구와 일본의 침략적 의도를 읽어내고 막아내기보다,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당장의 외압인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개화파는 청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과 서구세력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으며 그들과의 결탁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정변 당시 일본과 서구 열강은 침략자로서보다는 협조와 이용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5 정변의 진행과 결과

개화파가 정변을 계획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정변 발생 1년 6개월 전이라는 견해와 1년 전이라는 견해, 1884년(고종 21) 5월경이라는 견해, 1884년 7~8월경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무장 정변을 구체화한 결정적인 계기는 1884년 6월경으로 추정된다. 1884년 4월에 발발한 청불전쟁으로 인해 청의 군대가 조선에서 일부 전선으로 이동하고, 전쟁 상황이 청국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6월부터 국내에 구체적으로 전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이 모두 외국에서 돌아와 함께 정변을 모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민영익과 연대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무산된 것도 이 시기이다.

1884년 8월에는 정변에 필요한 무력으로 일본인을 고용하기 위해 일본에 사람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이후 9월이 되면 다시 조선에 들어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협의하여 일본 공사관 수비대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9월 27일에는 미국 공사 푸트에게 정변의 계획을 알렸다. 이때 미국 공사는 이미 이들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조용히 때를 기다릴 것을 부탁했다. 이어 10월 7일에는 영국 영사 애스턴과 미국 공사를 찾아가 정변의 계획을 이야기했으며, 이들로부터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를 들었다.

9월 29일에는 이인종(李寅鍾)의 집에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주도세력과 이창규(李昌奎)·이규정(李奎禎) 등 행동대원들이 모여 정변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정변 열흘 전인 10월 8일에 김옥균은 일본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그동안 준비해왔던 구체적인 세부 계획을 최종적으로 협의·확정했다. 김옥균은 거사 후 개혁에 필요한 재정자금을 차관 형태로 빌리고자 했으며, 이에 대해 일본공사는 ‘수 삼 백만 원’ 규모의 차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10월 13일에는 정변의 거사 날짜를 10월 17일로 결정했다. 이는 일본 측의 태도가 변화하기 전에 정변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끝낸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거사 일을 결정한 후 정변 주도세력은 박영효의 집에서 행동대원들을 불러 모아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전달했다. 첫째, 우정국 옆 별궁에 방화하고 화약을 폭발시켜 혼란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둘째, 우정국 연회를 기해 거사하며, 홍영식은 4영사(營使)의 참석 여부를 확인한다. 셋째, 별궁 화재 진압의 틈타 4영사를 제거한다. 넷째, 민태호·민영목·조영하 세 사람이 대궐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 손을 쓴다는 것이다.

정변 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가면서, 개화당 내부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생겼다. 특히 윤치호는 9월에 접어들면서 아버지 윤웅렬(尹雄烈)과 더불어 유동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정변 다음 날인 10월 18일 오후에 윤치호와 윤웅렬은 정변을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이라고 논하기도 했다.

정변은 1884년(고종 21)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 연회를 계기로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0월 19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 정도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에 개화파는 빠른 속도로 정권을 장악하고 인사를 단행했으며, 자신들의 개혁구상이 담긴 정령을 반포하기까지 했다.

정변 첫날인 10월 17일, 우정국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한 우정국 만찬은 10월 17일 견평방(堅平坊)에서 예정대로 저녁 7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는 우정국 총판 홍영식을 비롯해 박영효·김옥균·서광범 등 정변 주도세력이 참석했고, 좌영사 이조연과 우영사 민영익, 전영사 한규직 등 권력의 실세와 외아문 독판 김홍집 등이 참석했으며, 미국 공사와 영국 영사·청국 총판 등 각국의 외교관들이 참석했다.

원래 계획에는 연회 도중 별궁에 방화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패하고, 9시 경 별궁 옆 초가에 방화했다.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연회 도중 김옥균의 빈번한 출입을 수상하게 여긴 민영익이 제일 먼저 나갔는데,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안으로 들어오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으며, 이에 원래 계획했던 4영사 처단은 실패했다. 처음에 세웠던 제1단계 계획이 차질을 빚자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 공사의 태도를 확인한 후, 고종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했다.

김옥균 등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의 침실로 들어가 우정국의 변란을 알리고, 잠시 정전(正殿)을 피해 이어(移御)할 것을 청했다. 고종은 별 이의 없이 김옥균 등을 따라 창덕궁 서쪽에 자리한 경우궁으로 몸을 옮겼다. 김옥균이 고종에게 일본병을 요청해서 호위하도록 하라고 하자, 고종은 친필 칙서를 내려주었다. 고종의 칙서를 받은 일본 공사가 군대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여, 경우궁의 각 대문 안팎을 경호했다.

10월 18일 자정이 지나 전영사 한규직과 좌영사 이조연이 경우궁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고종에 대한 알현을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정변 세력은 이들이 경우궁 후문으로 나갈 때 살해했다. 이어서 경우궁으로 들어오는 민영목·조영하·민태호를 차례로 처단했다. 이로써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모두 처단한 것이다.

날이 밝은 뒤 정변 세력들은 곧바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여, 조보(朝報)를 통해 전달했다. 이때 단행된 인사를 통해 정변 주도층은 의정권(議定權)과 군사·치안권, 재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또한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왕실 외척과의 연대를 도모했으며, 의정부 세력과 범개화세력을 동반세력으로 설정했다. 이런 인사는 당시 민씨 척족 중심의 권력구조에서 소외된 자들을 규합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민비의 끈질긴 요구로, 10월 18일 오전 10시경 고종은 경우궁 남쪽 계동에 있던 이재원(李載元)의 집으로 이어했다가 오후 5시경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으로 다시 옮겼다. 창덕궁 경비는 정변 주도층이 동원한 행동대원들과 일본군, 그리고 정변 주도층이 장악한 4영의 군사들이 맡았다.

10월 19일 오전 10시경 김옥균·박영효 등은 개화당의 구체적인 개혁 구상을 담은 정령을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정변의 의도와 목적을 제시하고, 의구심을 가진 국민들과 다른 정치세력들을 무마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공포된 정령은 원래 80여 개 조항에 이르렀다고 하나, 현재 14개 조항만이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전하고 있다.

『갑신일록』에 전해지는 14개 조항의 정령은 다음과 같다.

1. 대원군을 불일내(不日內) 모셔올 것(조공 허례는 의논하여 폐지함).
1.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으로써 관(官)을 택하고, 관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말 것.
1.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더불어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할 것.
1. 내시부를 혁파하고, 그 가운데 우수한 재능이 있는 자는 등용할 것.
1. 전후(前後)에 간탐(奸貪)하여 나라를 병들게 함이 심한 자는 정죄(定罪)할 것.
1. 각 도의 환상(還上)은 영영 와환(臥還)할 것.
1. 규장각을 혁파할 것.
1. 급히 순사를 두어 절도를 방지할 것.
1.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1. 전후에 유배·금고된 사람은 작량(酌量)하여 석방할 것.
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1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급히 근위를 설치할 것(육군대장은 세자궁을 첫 번째로 의망(擬望)함).
1. 무릇 국내 재정에 속한 것은 모두 호조가 관할하고, 그 나머지 일체의 재부아문(財簿衙門)은 혁파할 것.
1. 대신과 참찬(參贊)ー새로 차임(差任)한 6인은 지금 반드시 그 이름을 다시 쓸 필요는 없다ー은 매일 합문 안 의정소에서 회의하여 품정(稟定)하고, 정령을 반포 시행할 것.
1. 정부 육조 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직에 속하는 것은 모두 혁파하고, 대신·참찬으로 하여금 작의(酌議)하여 계(啓)하도록 할 것.

정강은 정치체제와 국가권력의 운영 방안에 대한 비중이 높았으며, 국가 재정의 확보와 군사적 기반 조성에 중점을 두었고, 청으로부터의 독립 구상 등이 담겨 있었다.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이 점차 서울로 들어와 합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본 공사는 궁궐을 경비하던 일본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청군이 정변에 개입할 조짐이 보이자 청·일간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옥균과 일본 공사가 철군 이후 청군을 방어할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 청군이 창덕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청군과 정변군·일본군과의 교전이 시작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으로 모실 것을 주장했다. 이날 전투에서 조선군과 청군 상당수가 사망 또는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2명이 전사, 8명이 부상을 당했다.

정변 주도층과 일본 공사는 모두 철수하기로 했다. 다만 홍영식과 박영교는 사관생도들과 함께 고종을 호위하여 북묘로 행했다. 고종을 호위했던 이들은 청군과 조선 군인에게 모두 살해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등은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후퇴했다. 이때가 10월 19일 저녁 7시 30분경이었으며, 이로써 개화당의 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10월 20일이 되자 민중은 일본 공사관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으며, 12시 경에는 일본 공사관을 방화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공격이 계속되자 일본 공사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오후 2시 30분에 김옥균 등과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퇴각하는 이들 일행은 조선 군인과 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김옥균 등 개화파 9명과 일본 공사 일행은 10월 21일 새벽 인천의 일본 영사관에 도착했으며, 10월 23일 일본으로 떠났다. 이때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유혁로(柳赫魯)·변수(邊燧) 등 9명이었다. 남은 행동대원들은 대역죄로 처단되고 관련자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 정계에서 숙청을 당하면서 개화파 세력들은 위축되었으며, 개화정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6 정변의 실패 원인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정변의 실패와 그로 인한 역효과에 대한 평가는 매서운 편이다. 이미 당대에 윤웅렬은 갑신정변이 임금을 위협한 것, 외세에 의존한 것, 인심이 불복한 것, 청군의 개입 가능성, 정치세력의 열세 등을 원인으로 실패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정변 주도세력은 예상되는 청군의 개입에 대비하여 일본군을 정변에 투입했는데, 이로 인해 갑신정변은 “외국의 군사를 불러들여 군부(君父)를 위협하였다.”고 비판을 받게 되었다. 민중들 또한 정변을 일본인과 난당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군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일본에 대해 적대감을 품은 민심에 반하는 행위였으며, 결국 민심의 이반과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개화당 세력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정권을 장악한 후 권력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김옥균 등은 우선 고종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기반을 조성하려 했지만, 고종은 정변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자 등을 돌렸다. 고종의 변심은 개화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청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당이 정변의 목표로 삼았던 청으로부터의 ‘독립’와 자수자강을 위한 ‘개화’ 역시 사회적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반포된 정령 또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부국강병책 추진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당대의 국민적 정서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목표 제시에 소홀했다. 이는 가뜩이나 취약한 개화당의 정치·사회적 기반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으며, 정변이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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